2세 아동의 안타까운 죽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최근 복지관에서 유감스러운 사망 사고가 일어났다. 가해자는 발달장애 청소년이었고, 피해자는 치료서비스를 받으러 온 형을 따라왔던 2세 아동이었다. 피해 부모가 직접 정황을 설명한 글에 따르면, 가해 청소년은 놀이를 하듯 아동을 3층 난간 밖으로 던졌다고 한다(http://m.blog.naver.com/sangyuni2014/220232140286). 눈앞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니 부모로서는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을까. 힘들어할 그 가족들이 너무 안타깝다. 피해 부모는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해자 부모와 활동보조인, 복지관의 책임을 물으며 이런 일이 다시 재발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 ▲피해자 어머니가 블로그에 올린 정아무개 군의 사진 (네이버 블로그 캡쳐)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번 사건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사마다 “거구”, “180cm, 100kg이 넘는”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아마도 이번 사건이 특별히 위협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가해 발달장애인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 통제가 안 된 상태에서 아동을 사물처럼 다루었다는 부분 때문일 것이다. ‘불편한 진실’은 일부 최중도(最重度) 및 중도(重度)의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옳고 그름이나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으로 덩치만 컸지 마음은 여전히 어린 우리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편견의 시선 속에 갇혀 지내게 되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아직 발달장애인법의 시행령도 다 마련되지 못했는데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을 개인적 일탈이나 시스템의 부재 탓으로만 치부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우려’를 애써 덮어버린다면 결국 유사한 사고가 다시 재발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발달장애인인 내 아이의 ‘어려움’과 그에 대한 부모로써의 ‘두려움’을 어떻게 직면해갔는가에 대한 자기 고백적 글쓰기 정도인 것 같다.
둘째 아이 승기가 처음 자폐성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아이가 마음을 인식하거나 자발성을 가지고 세상을 탐험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들의 ‘예언’에 적잖이 당황감을 느꼈던 것 같다. 마녀가 요람의 아이를 납치하고 그 자리에 떼쟁이 도깨비를 놓아둔다는 줄거리를 지닌 유럽 동화책의 그림에서처럼, 몸만 있고 머리와 심장이 비어있는 나무 인형을 떠올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심과 상호작용을 늘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 당시 집에 산처럼 쌓여갔던 다양한 장난감들은 주로 자동차나 로봇, 그리고 병아리, 햄스터, 토끼처럼 (무생물이든 생명체이든) 움직이고 소리를 내는 것들이었다. 승기는 버튼을 누르거나 대상을 던지면 소리가 나고 움직인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손에 잡히는 것을 잘 던졌다. 나는 “던지면 아야한다.”라는 말로 승기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느 날 승기는 토끼를 ‘돌보려고’ 강제로 물을 먹였고 토끼는 결국 죽고 말았다. “어떻게 해! 토끼가 죽었네. 조심해야지.” 내가 탄식하자 승기는 재빨리 건전지를 가져왔다. 작동을 멈춰버린 자동차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방식으로 토끼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 승기는 이렇게 알고 있었구나….’ 그때 승기가 사물의 움직임과 생명체의 생기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참 난감해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승기를 데리고 아파트 공터에 가서 함께 토끼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이제 토끼가 죽었어. 하늘나라로 갔네.”라고 설명을 해주며 나무젓가락 두개를 열십자로 묶어 만든 십자가를 동그란 무덤 봉분 앞에 세워주었다.
그날 오후, 승기는 무덤을 파헤쳐 토끼를 꺼내고 흙을 잘 털어낸 후 자기 방 베란다에 숨겨두었다. 죽은 토끼를 발견하고서는 조금 더 슬퍼졌지만, 몇 권의 동화책을 함께 보며 죽음에 대해 설명해주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 때 미라와 해골을 그림으로 보여주자, 승기는 “죽어?”라고 내 말을 한 번 더 따라했다. 그 이후 승기의 놀이 목록에는 버즈 인형에 휴지를 둘둘 말아 놓는 미라 놀이가 추가되었고, 얼마 후 시댁에 갔을 때는 “죽으면 안 돼! 조심해!”라고 말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감동시켰다. 아마도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놀이의 일종이었고 학습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꼴까닥!’이라는 말을 종종 상황에 맞게 사용했고, 물건을 망가트리거나 연약한 생명체를 죽이는 일은 줄어들었다.
한참 후에 고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승기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디지털시계의 숫자를 “사일사, 사일오, 사일육” 계속 헤아리며 서성거렸다. 슬픔을 잘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낯선 공간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울음이 승기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 즈음에 발달장애 자녀를 둔 아버님 한 분이 돌아가셨고, 나는 승기와 함께 썰렁하기만 한 상갓집에 또 한 번 다녀왔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결혼식, 장례식, 돌잔치 등의 의례적 행사들에 폐가 되더라도 승기를 꼭 데리고 다니는 원칙을 갖게 되었다. 작년에 친정아버지가 소천하셨을 때, 승기는 가족들과 함께 염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슬퍼하는 엄마를 위로해주었다. 마지막으로는 “안녕히 천국 가기 바랍니다!”라고 따스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인지 수준이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발달장애인들이 청소년기와 성인 초기에 겪는 극심한 우울, 불안, 강박, 그리고 도전적 행동들은 성장에 따른 불안과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달장애인들도 성장과 경험의 누적 안에서 ‘생명과 죽음’을 배워갈 수 있다. 그들이 경험하는 일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존엄을 지킬 만한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에도 특수학교에 다니는 한 중학생이 가위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학생의 손가락을 자르려 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자신의 흥미를 인식하고 표현을 시도한 것이겠지만, 그 일이 상대방에게 미칠 영향이나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인지적 한계와 독특한 사고 체계는 의사소통, 상호작용, 사회적 관계에서의 규율과 경계를 인식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개인이 그러한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의 가치와 규범과 상호작용의 방식을 가르치는 일이 지속되어야 하며,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와 그의 주변을 함께 돌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특히 특수교육이, 사회복지가, 보건의료가 그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둘러볼 때마다 아쉬움이 크다. 더불어 발달장애인들도 자신을 존중해주는 환경에서 살아갈 때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켜가는 사람으로 성장해갈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지점도 조금 더 깊고 무겁게 성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험난한 여정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