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프란시스 라이언, 기고에서 지적
“장애인 흉내 내는 연기, 흑인 흉내와 다르지 않아”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대한 일화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고 있는 장애인 스티븐 호킹 역할을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게 해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찬사에 힘입어 그는 지난달 11일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영예까지 얻었다.

국내 배급사의 홍보자료에 따르면,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향한 언론의 평가는 극찬 일색이다.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매우 놀랍고 진정으로 본능적이다’, ‘숨이 멎을 듯 놀라운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연기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넋을 빼놓는 에디 레드메인과 펠리시티 존스의 명연기’….
그러나 에디의 연기에 보기 드물게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가 있다. 바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프란시스 라이언(Frances Ryan)이다. 장애와 페미니즘, 그리고 성소수자 권리에 관해 글을 쓰는 자유기고가인 그녀는 지난달 13일 기고한 글에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세간의 시선과는 다소 상반된 평가를 전했다.
라이언의 글이 물론 에디의 연기가 별 볼일 없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에디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공유하고 있다. 그녀의 비판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비장애인이 장애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일반적인 영화 흐름 전반을 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글의 제목에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흑인 흉내’를 내는 배우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왜 ‘장애인 흉내’를 내는 것에는 박수 치는가?”(We wouldn’t accept actors blacking up, so why applaud ‘cripping up’?)
라이언은 배우 케이트 윈슬렛이 한 드라마에서 “만약 당신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당신이 오스카상을 받는 것은 따놓은 일일 것이다.”라고 말한 대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이는 장애에 관한 영화에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당신이 비장애인 배우라면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생각이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 되묻는다. 일반적으로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 집단으로 여겨지는 흑인의 경우, 흑인 역할을 백인 배우가 맡는다면 대중의 공분을 샀을 텐데,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흉내’를 내는 연기를 하는 것에는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두 경우 모두, 배우들은 소수자 집단의 일원으로 보이기 위해 그들의 외양을 바꾸는 데 소품이나 대체물을 쓴다. 두 경우 모두 소수자를 흉내 내기 위해 목소리나 몸을 조작한다”며 “그들은 진짜 그 (소수자적) 특성을 가진 이들로부터 직업을 빼앗아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산업에서 이들 집단이 과소대표 되는 현실을 영속화한다”라고 꼬집었다.

그녀는 절단장애를 가진 극작가 크리스토퍼 신(Christopher Shinn)의 말을 인용하면서 비판을 이어갔다. 신에 따르면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성공하는 이유는 “관객들을 안심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아는 배우가 연기하는 장애인 캐릭터를 보는 일은 장애에 대한 사회의 공포와 혐오가 ‘마법처럼 초월’되도록 한다”며 “대중문화는 장애를 실제 사람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이는 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어 라이언은 “만약 백인 배우가 흑인 연기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면, 우리의 분노가 치솟아 올라 결국 해당 장면은 편집실 바닥에 버려졌을 것”이라며 “인종과 관련해서 우리는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주류 집단의 일원이 소수자 집단 내 사람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믿고 있지만, 장애인에게는 그와 같은 자기표현의 권리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이제는 ‘장애인 흉내’내는 연기에 박수 치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라며 “장애인의 삶은 비장애인 배우가 흉내 내는 것 그 이상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가끔 좀 지나치게 풍부한 논의를 하는 분위기는 아무 말이나 다 갖다 붙이는 억지를 만들기도 하는데, 현대 사회 서양에서 그런 일이 흔한 듯하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는 이름난 그리스 고전을 연극으로 하기로 했는데 얼굴에 구릿빛 칠을 한 배우 사진 때문에 인종차별이라며 연극을 강제로 막았고 이에 학교와 정부 쪽은 '창작과 표현에 대한 지나친 폭력'이라고 꾸짖은 바도 있다.(실제 연기에서는 전통에 따라 검은 가면을 쓰기로 되어 있었고, 사진은 얼굴에 구리빛 칠을 한 배우 사진을 보고 흑인 분장이라고 해석한 흑인인권단체가 항의하고 공연을 막은 것이라고...)
흑인차별의 아픈 역사가 있는 유럽 쪽에서 흑인들이 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흑인 비슷하게 꾸미는 것을 모두 막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혹은 그렇다면 얼굴에 검은 칠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흑인 노예를 표현하는 연기를 하고 그들을 아주 안 좋게-하지만 그때로서는 현실적으로- 표현 했다면 그건 괜찮은가?(당연히 안 되겠지. 이건 또 다른 이유로...)
현상은 본질을 비추어 주기는 하지만, 현상이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연기는 장애인 차별 표현인가? 인종 차별 표현인가? 살펴보는 인식까지는 무척 좋았으나 단지 표현 만으로 그것을 무엇으로 규정해 버린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스티븐 호킹 연기를 할 수 있는 이는 스티븐 호킹 밖에는 없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뿌리를 둔 잘못된 본질 규정은 필요없는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그것이 때로는 무척 무서운 결과를 만든다는 점에서...
“저 ㄴ이 어제 밤 몰래 돌아 다니더라. 저 ㄴ이 마녀다!”(“저 ㄴ이 고양이를 좋아한다. 저 ㄴ이 마녀다!”라고 해도 마찬가지...)
“조센진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가 우리 민족의 피를 더럽힌다.”
“5천년 중화민족의 문화 순수성을 지키자!”하면서 5천년 역사를 깡그리 불사르고 사람들을 죽였던 것처럼...
역사는 교묘히 되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