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 창간 5주년, 『우리 균도』출판 기념 강연회바른길(均道, 균도)에서 마주한 삶의 모든 것

지난 18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 사람’에서 비마이너 창간 5주년 행사로 『우리 균도』 출판 기념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분이 참석하여 비마이너 창간 5주년과 『우리 균도』 출판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이날 행사는 수유너머N 이진경 연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의 축사로 문을 열었습니다. 1부에선 『우리 균도』 저자 이진섭 씨의 강연이 있었고 2부에선 비마이너 김유미 기자,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김현우 연구원이 이야기 손님으로 함께한 토크 콘서트가 펼쳐졌습니다. 두 분은 『우리 균도』 책에 글을 실어 내용의 풍부함을 더해주셨습니다. 이날 이진섭 씨의 강연과 토크 콘서트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싣습니다. 이진섭 씨는 발달장애인 1급 아들 이균도 씨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전국 3000km를 걸으며 발달장애인이 처한 문제를 세상에 알려왔습니다.  

《 1부. 『우리 균도』 저자 이진섭 강연 》

 

안녕하십니까. 어느 순간부터 제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진섭입니다. ‘균도 아빠’가 된 지는 24년 정도 됐네요.

 

균도, 마음으로 키운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었구요. 조금 전에도 균도가 화장실을 두 번 다녀왔는데 아직까지 배변 처리를 제가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균도 장애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배변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게 균도 현실입니다. 제가 원래는 남들 앞에 못 서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아이가 발달 장애인이기에 함께 길도 걷고 이렇게 남들 앞에 서게 됐습니다.

 

▲『우리 균도』 저자 이진섭 씨. 이진섭 씨는 발달장애인 1급 아들 이균도 씨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전국 3000km를 걸으며 발달장애인이 처한 문제를 세상에 알려왔다.

 

균도가 태어난 날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1992년 6월 6일이었습니다. 제가 균도 엄마랑 연애할 때 남들이 “소도둑놈이 여자 한 명 데리고 다닌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웃음) 그때 제 몸무게가 100kg 더 나갔고요, 집사람은 40kg 정도 나갔어요. 지금도 50kg밖에 안 나갑니다. 집사람 키가 157cm라고 하는데 더 작을지도 몰라요. 저는 지금 많이 빠져서 80kg 정도 나갑니다.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균도는 180cm에 127kg, 균도 동생 균정이는 110kg 나갑니다. 우리 집은 애 둘이 합쳐서 몸무게가 240kg이에요. 사무실 엘리베이터에 아줌마 5명이 타도 ‘삐’ 소리 안 나는데, 균도, 균정이, 저 셋이 타면 ‘삐’ 소리 납니다. 한 명은 나가래요. 그래서 저는 매일 걸어 다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달장애를 낳은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굉장히 떳떳하게 다니는 편입니다.

 

‘균도와 세상걷기’로 동생 균정이 설득한 게 제일 기뻐  

 

균도 어렸을 때, 제가 사업하다 부도난 뒤 취업이 안 됐습니다. 대리운전을 한 달 했어요. 제가 술을 못 마시는데 대리운전하면서 술 취한 사람들 만나니까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야간 택시 운전을 하게 됐습니다. 택시는 술 취한 사람 안 태워도 되더라구요. 5년 했습니다. 왜 택시를 선택하게 되었냐면, 그때 균도가 중학교에 갈 무렵이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친구들이 균도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균도가 좀 미남 아닙니까. 초등학교 때는 여자아이들 네 명이 많이 도와줬어요. 균도가 학교 오면 신발 받아주고 책가방 받아주고 옷 받아주고. 제 할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가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온전히 모든 것을 다해야 됐어요. 그래서 밤에만 일할 수 있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사업하면서 빌린 사무실 월세도 내야 했고. 낮에 균도한테 무슨 일 생기면 뛰어나갈 수 있는 직업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균도가 중학생이 되면서는 균도의 모든 것은 제가 했습니다. 집에서 저는 ‘균도 아빠’고 아내는 ‘균정 엄마’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균정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니, 알고 있되 애써 모른척하겠죠.

 

균도와 균정이는 5년 차이가 납니다. 제가 인권운동하기 전엔 못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균정이한테 제일 미안한 것이 그겁니다. 어느 날 균도가 너무 외로워하기에, 집사람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자고.
 
장애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임신중절을 네 번 했습니다. 균도 하나 키우기 위해서 저와 집사람이 아이를 네 명 지웠어요. 그런데 마지막엔 균도를 위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일도 거의 같은 날이에요. 균정이 생일을 균도 생일과 맞추려고 부모가 작당을 했습니다. 미래엔 균정이 마누라가 균도 밥이라도 챙겨주라고 그 짓거리를 한 겁니다. 그 애의 인권은 아무도 모르고 부모끼리 만든 애가 균정이었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발달장애인이 네 살 아이를 떨어뜨려서 죽은 사건이 있었죠. 사실 발달 장애인 가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균정이도 몇 번 떨어졌습니다. 균도가 과잉행동을 하다 보니. 균정이는 2층에서 1층으로 붕 떨어졌습니다. 애가 죽을지도 몰랐던 것이 저희 현실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형을 이해하더라구요, 나이 들고 나니까.

 

옛날에 균도랑 제가 같이 걸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알까 봐 떨어져서 걷던 게 균정이었어요. ‘균도와 세상걷기’(아래 세상걷기)하며 가장 기쁜 게 균정이를 설득한 겁니다. 지금은 균정이가 균도를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형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웃음) 우리 형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문제는 근처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제가 ‘세상걷기’를 기획했던 의도도 그냥 온전히 보여주자는 거였어요. ‘보여주기’만큼 선생은 없습니다.

 

▲이진섭 씨가 '균도와 세상걷기'의 시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할 거 없어 떠난 길 위에서… “균도가 위로가 되는구나”

 

균도가 중학생 되고 나서부터 균도 엄마가 너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토요일마다 놀러 나가라고 했는데 10분도 안 돼서 들어옵니다. 공교롭게 집사람이 부산 사람이 아니라 서울 사람이어서 동네 친구가 없어요. 처가라도 멀면 거기 갔다 올 텐데 처가가 옆집이에요. 저희 집이 101호고 처가가 102호입니다. 옛날 복도식 아파트 살 때는 저희 집이 202호고 처가는 203호 살았습니다. 갈 데가 없어요.

 

2011년 균도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 그 다음 날에 저도 (2009년 학사 편입으로 들어간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둘 다 백수가 됐어요. 학생일 땐 좋았는데 졸업하니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집을 떠나보자는 게 솔직한 계획이었습니다. 앞뒤 아무것도 안 따졌어요. 이슈가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 안 했습니다. 어찌 보면 ‘무대뽀’로 시작했어요. ‘세상 걷기’는 전국 어떤 부모도, 활동가도 생각 못 한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습니다. 걷는 김에 장애아동복지지원법 제정하라고 써서 달고 걸었어요. 균도가 발달장애인이니까 ‘발달장애인법’(지난해 4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명칭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_ 편집자 주)도 제정하라고 썼습니다. 사실 처음엔 서울까지 오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쳤습니까. 저 얘를 데리고 서울까지.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웃음)

 

제가 몸이 안 좋습니다. 암 환자기도 하고 당뇨도 심합니다. 남들 보기 말짱해 보이죠. 공복 혈당이 300, 밥 먹으면 500. 요즘은 공복 혈당이 200 이하로는 안 내려가더라구요. 약을 먹어도 내려가진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 글을 쓰래요. 저는 집사람이랑 연애할 때도 편지 한 장 쓴 게 전부입니다. 일기 쓴 적도 없어요. 균도 태어났을 때, 상품에 눈이 어두워 ‘여성시대’ 라디오에 사연 보낸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오더만 박경석이 글을 쓰래요. 짧은 글이지만 걷다가 드는 생각을 매일 밤 하나둘 쓰기 시작했고, 그걸 비마이너에 싣게 됐습니다.

 

장애 운동은 부모 운동이라고 하지만, 저는 박경석 통해서 장애 운동을 많이 배웠습니다. 지난해 발달장애인법이 통과됐는데 이 법이 시행돼도 부양의무제 폐지 안 되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첫날엔 사람 정말 많이 옵니다. 언론, 기차게 받아 적습니다. 그날 TV, 신문에 처음 나와 봤습니다. 너무 즐거웠어요. 그런데 둘째 날 아무도 안 오더라구요. 균도랑 부산에서 양산 넘어가는데 너무 서러웠습니다. 둘째 날 20km 넘어가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래서 끝까지 가겠나. 그런데 밀양 방송에 나오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밀양까지 갔습니다.

 

▲2011년, 1차 '균도와 세상걷기'. 발달장애인 1급 이균도 씨와 그의 아버지 이진섭 씨.   

 

집에 있던 등산화 신고 걸었습니다. 걸을 때 등산화 신으면 하루 만에 물집 다 나요. 워킹화가 있다는 거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 준비 안 되어 있던 거죠. 밀양까지 방송하려 걷는데 발가락 네 군데 물집 터지고, 균도 발가락에도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운동화매장 들어가서 워킹화 사는데 상상도 못 할 금액을 달라 해요. 한 켤레에 30만 원. 처음 걸을 때 돈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돈 줄 생각 안 했습니다. 부산 장애인부모회에서 얼마 모아 주긴 했습니다.

 

당시 집사람한테 여행 갔다 생각하고 500만 원만 빌려 달라 해서 나왔습니다. 아내는 며칠 만에 돌아올 거라 생각하면서도 빌려줬어요. 그 돈으로 균도와 제 신발, 60만 원짜리 샀습니다.

 

TV 나오니까 가야 되겠다, 했죠. 조금만 더 가보자, 한 것이 ‘세상걷기’였어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부모들이 균도한테 바람을 이야기하더라구요. 혹시나 싶어 밖에 나갔는데 균도 보다 더한 얘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휠체어를 탄 애 데리고 균도랑 걸을 거라고 부모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게, 이 사람들한테 균도가 위안이 될 수 있겠구나. 반쯤 오고 나니 기왕 돈도 받은 거 안 되겠다, 끝까지 가자.
 
처음에 뭣도 모르고 시작해서 무리하게 올라오니 너무 빨리 온 거에요. 페이스 조절을 좀 해야겠더라구요. 하루에 30~35km 걷다가 하루 10km 걸으니 균도가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까지 28일 걸리더라구요. 전국에서 온 부모들이 균도 환영회 할 때 그렇게 많이 울었습니다. 저 사람들한테 위안을 준 게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사실 저는 다른 부모님들보다 운동을 많이 한 부모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균도와 놀기 위해 시작한 거였습니다.

 

조선일보 싫어하지만 ‘세상 걷기’는 사실 조선일보가 띄웠어요. 2011년 1차 ‘세상걷기’ 출발하기 하루 전날,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터졌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에 처음 비 온 게 4월이었어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와서 좀 걷자고 해서 걸었어요. 비 맞고. 비 오는 날, 원래 안 걷습니다. 조선일보가 1면에 실어준다고 해서 걸었는데 다음날 1면에 이상한 게 나왔습니다. ‘후쿠시마 방사능 비, 이상 없다.’ 신문 넘긴 다음 장엔 ‘암 환자 아버지와 발달장애인 아들, 비 맞으며 걷는다.’ 신문 헤드라인은 기자가 안 뽑습니다. 위에서 다 뽑죠. 취재 왔던 기자가 연락해서 죽으려고 하데요. ‘아버지, 그런 뜻으로 쓴 게 아닌데요’ 하면서. 어찌 됐든 조선일보 나가고 난 다음부터 모든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날 제가 전화기 껐습니다.

 

웃기는 얘기는요, 2011년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방송은 박경석이 아니라 균도 편이었어요. (웃음) KBS에서 70분 동안 균도 얘기만 했어요. KBS 여유만만에서도 연락 왔습니다. 취재 때문에 갔던 길 다시 찍고, 갔던 길 다시 찍고. 서울 왔는데 다시 내려가서 찍고 또 찍고. 새벽 5시에 사람 깨워서 밤 12시까지 1주일 동안 촬영합디다. 이젠 그런 방송 안 합니다.

 

그런데 균도는 참 행복한 아이인지, 그렇게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균도가 걷고 난 다음에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 통과됐습니다.

 

‘원전 소송’의 진짜 목적, “발달장애인 문제 이야기하고 싶었다”

 

1차 걷고 나니 전라도 사는 아줌마한테 연락이 왔어요. 왜 모든 사람들은 다 서울로 갑니까. 우리 동네도 와주세요. 그래서 그 한마디에 그리로 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연락 오는 대로 여기저기 가다 보니 3차까지 1800km였어요.

 

그때 원자력 소송 이야기가 나옵니다. 균도와 제가 사는 곳이 부산 고리 원전 근처입니다. 사실 저는 원전 잘 모릅니다. 그 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데 상처받았던 게 조선일보 기사였어요. 후쿠시마 터진 뒤 그러한 보도가 나가니 ‘조선일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전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걷기’ 3차까지 진행하면서 언론에 많이 알려지니 좀 더 큰 싸움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이진섭 씨

 

균도는 원전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실 방사능 때문에 균도가 발달장애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 직장암도 원전 때문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집사람이 갑상선암인데 집사람까지 그러지 않았으면 저도 소송 걸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집사람 혼자 싸우는 건 너무 부담감이 크니 ‘세상걷기’에 원전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갑상선암 환자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건 스토리가 안 됩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고리 원전 주변에서 태어난 아이가 발달 장애고, 우리 장모님이 위암입니다. 가족력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장암, 아내는 갑상선암. 스토리가 많아집니다. ‘세상걷기’도 그렇지만 모든 운동은 스토리가 있을 때 사람들한테 다가갈 수 있더라구요.

 

저는 이긴다고 생각 못 했습니다. 변호사가 판결 전에 하는 말이 “균도 아버님, 10월 17일 날 10시까지 오지 마세요”, “왜요”하니까 “아시잖아요. 이기려고 한 싸움 아니잖아요.”

 

네, 이기려고 한 싸움 아닙니다. 저는 발달장애인 문제를 비롯한 장애인 문제를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과 같이 얘기하고 싶었어요. 운동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 운동을 폭넓게 보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운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수는 줄어드는데 발달장애인은 계속 늘어나요. 지금도 발달장애 원인에 대해서 너무 궁금합니다. 발달장애인 원인에 대해 밝혀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환경, 먹고 마시는 것, 공기 등이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지역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었습니다.

 

부산 기장에 사는 사람들이 부산 어느 지역보다 평균 수명이 짧습니다. 한번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판결 나던 날 변호사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겼습니다. 균도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이 뭔지 알아요. 반핵 운동하는 사람들도 균도 때문에 발달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밟기’를 하던 4차 때, 부산에서 삼척 지나 대관령 넘어 춘천에 가야 했는데, 박경석이 꼬셔서 양양 하조대로 가는 바람에 그 후 속초 넘어 한계령에 갔습니다. 4차 거리가 800km라고 알려져 있는데 박경석 때문에 150km 더 뛰어서 950km입니다. 제주도는 500km 아니고 300km 좀 넘습니다.

 

부산에서 삼척까지가 고리원전, 월성원전 있죠. 영덕, 삼척에도 원전 있습니다. ‘원자력 밟기’는 ‘세상걷기’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라서 그렇지. (웃음) 

 

삼척 가니까 참 즐거웠습니다. 삼척 주민투표 할 때, 삼척 연단에서 ‘균도와 세상이야기’ 살짝 섞어서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더라구요. 영덕 가서도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균도 아빠, ‘뻠쁘질’ 대장입니다!” 하는데 전 있는 얘기만 해요. 저 암 환자, 아내, 장모님 모두 암 환자, 그리고 균도 발달장애로 태어났습니다. 삼척 시장통에서 이 이야기하는데 사람들 충격받았습니다. 제 옆에서 균도 소리 지르며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원전 유치하면 큰일 나는 갑네” 해요.

 

이렇게 균도랑 같이 다니니 사람들이 발달장애인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제 부모운동 원칙은 모든 곳에 균도와 함께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한테 ‘우리 이래요’ 이야기하는데, 아이 이야기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오지 않으면 집에 있는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며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 균도를 통해서 우리를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균도와 함께 해야’ 사람들이 압니다.

 

▲이진섭 씨와 그의 아들 이균도 씨. 해바라기 씨로 '우리 균도'라고 수놓아진 브라우니를 들고.

 

“우리 얘는 안 될 거야” 부모 생각이 성장 막는다

 

책 많이 팔려야 두 번째 책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 책엔 외국 다녀온 얘기는 하나도 안 들어갔어요.

 

예전에 균도와 패키지로 대마도에 다녀온 적 있습니다. 그런데 발달 장애는 패키지여행 절대 안 됩니다. 밤에 너무 힘들어하고 과잉행동이 잦아지더라구요. 그래서 균도한테도 휴식을 주고 싶어서 제주도에서 실험을 해봤어요. 그게 ‘세상걷기―제주도 게스트하우스 편’이었어요. 균도 저 덩치에 코 진짜 잘 곱니다. 사람들한테 제가 하루만 같이 있어달라고 빌었어요. 하루 지나니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거예요. 이렇게 설득해나가는 작업을 하다 보니 외국도 잘하면 될 것 같더라구요. 

 

5차 끝내고 집에 있다 보니 너무 무료했습니다. 제주도까지 국내 여행은 다 했는데. 어느 날 밤, 집에서 느닷없이 필(feel)이 꽂혀 제주항공 들어가니 태국이 1인당 38만 원밖에 안 되더라구요, 둘이면 76만 원. ‘세상 걷기’하고 남은 돈 200만 원이 있었습니다.

 

태국까지 비행기 6시간 걸립니다. 그런데 균도가 한 자리에서 부동자세하고 가만히 앉아있더라구요. 6시간 동안 앉아있는데 전 놀랐습니다. 태국에선 말이 안 통하니 균도가 제 곁에서 1m를 안 벗어났습니다. 진짜 눈치가 있어요, 몰랐습니다. (웃음)

 

한 번은 옆에 여자가 너무 예뻤나 봐요. 균도는 여자 보면 ‘이름이 뭐예요, 몇 년생이에요’ 이거부터 물어봅니다. 의미는 없어요. 물어보면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상대방이 반응도 없고, 아빠 얘기하는 거 가만히 보니까 안 거예요. “마이 네임 이즈 균도”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커 나가는 게 보이는 겁니다.

 

부모들이 안되는 게, “우리 얘는 안 될 거야”라고 스스로 재단하는 경우입니다. 부모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 애들은 클 수가 없는 거예요. 

 

▲강연을 듣는 사람들.

 

균도 같은 얘들 명동에 100명 데리고 나오면 다음 날 바로 서울시장이 발달장애인법 제정할 겁니다. 한 번씩 균도가 부산 시청에 들어가요. 다들 미치려고 합니다. 균도 같은 애 세 명 들어가면 절단 납니다. (웃음)

 

‘세상걷기’ 할 때 한번은 경기도청에 들어갔습니다. 균도가 빈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공무원이 균도한테 비키라고 강압 행동을 했습니다. 균도가 열 받아서 그 사람을 때렸어요. 저런 애 처음 봤답니다. 장애인복지과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발달장애를 모르는 거예요. 도청에 부모들이 많이 오는데 자식 데리고 오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아이를 온전히 사회에 내어놓는 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길(均道, 균도) 위에서 만나다

 

『우리 균도』에서 ‘우리’는 내 아들 균도가 아닙니다. 요즘 페이스북에 책 홍보만 하는데, 책을 사라는 게 아니라 읽어보라는 겁니다. 많은 부모님들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세상걷기’ 할 때 비 오면 중간에 하루 쉽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기억은 청주에서 걸을 때, 어느 부모님이 이틀 동안 절 기다렸데요. 그 얘기에 속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어찌 아시고 왔느냐’ 물으니 TV 보고 균도 지나간다고 해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부모님이 균도 손잡고 걷더라구요. 그날은 그 엄마 때문에 더 걸었어요. 좀 더 가자, 좀 더 가자, 하셔서. 그 부모님이 하시는 말이 “저도 균도 아빠랑 걷고 싶어서 아이랑 나오고 싶었는데 아까 그 자리가 우리 아이가 죽은 자리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균도 아빠 걷는 거 보고 우리 얘 생각이 나서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지금도 그 엄마가 누군지 잘 몰라요. 그분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주셨습니다. 200만 원. 그 돈으로 균도와 태국 갔다 왔습니다.

 

제가 얘기 계속하면 재미없죠. 책 사셔서. (웃음) 딴 거 아니고 전 많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책 사신 분은 집에 가서 한 권 또 신청해서 주변 사람과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전국에 있는 ‘발달장애인 균도’를 위해서. 바를 균(均)·길 도(道), 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힘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열심히 하겠습니다.

《 2부. 토크 콘서트 》

 

사회 : 임영희(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손님 : 이진섭, 이균도, 김유미(비마이너 기자),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

임영희 : 이야기손님으로 나오신 두 분,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유미
: 노들장애인야학 상근 교사이면서 비마이너에서도 활동하는 김유미입니다.
김현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 김현우입니다. 연구소는 만들어진 지 5년 됐습니다.

 

임영희 : 두 분은 이진섭 님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김유미 : 2011년 ‘세상걷기’하면서 아버님이 시작과 동시에 비마이너에 매일 밤 기고하셨습니다. 전 당시 글을 받아 매일 편집하는 일을 했는데 같이 걷는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김현우 : 과거 진보신당(현 노동당)에서 일했는데 이진섭 님이 장애인위원회로 같이 활동하며 중앙에 균도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땐 의아했는데 설명해주셔서 알게 됐습니다. 장애인운동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더 잘 알게 됐구요. ‘세상걷기’ 때 평택에서 합류하며 그때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토크 콘서트 중 이균도 씨가 장난치며 지나가자 한바탕 웃음이 터진 사람들

 

임영희 : 두 분 다 같이 걸으신 적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김유미
: 1차 때 아버님이 경기에서 서울로 넘어오신다는 연락받고 고속버스터미널에 갔어요. 그때가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기억에 많이 남아요. 페이스북 보면 균도가 언제나 브이(V)하고 밝잖아요. 글로는 ‘균도가 과잉행동했다’고 써도 확 오지 않죠. 같이 걷고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균도가 밥을 엄청 빨리 먹더니 식당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라고요. 그날 체감했던 것 같아요.
김현우 : 저는 3차 때 하루, ‘원자력 밟기’하던 4차 때 1박 2일 같이 했어요. 아까 말씀하셨는데 삼척 주민투표 준비 중에 아버님 강연으로 굉장한 호응 받아서 서로 힘 받고 이해가 넓어졌어요. 핵 방사능 문제가 여러 가지로 연관돼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탈핵 운동의 감수성과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만큼 자기 일, 자기 문제로 서로 생각하게 된 것 같구요.

 

고리원전 10km 인근 주민 256명, ‘공동소송’ 제기

 

임영희 : 4차에선 ‘원자력 밟기’, 탈핵 걷기를 하셨는데 탈핵 운동 측면에서 ‘세상걷기’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소송 진행 상황도 이야기해주세요.
김현우
  : 원전 인근 주민이 저선량 방사능에 노출됐을 때 질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근거가 있다, 보상해달라는 소송이 1심에서 일단 받아들여졌어요.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리라 생각 못 했어요. 삼성 백혈병에도 볼 수 있듯,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직접 입증해야 하는데 굉장히 어렵죠. 일본에서도 많은 소송이 있었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어요. 
앞으로 힘든 과제가 많습니다.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입장에선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서 유병률 높다고 하면 굉장히 타격을 입는 거거든요.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밥줄이 걸려있으니 일단 쉬쉬하지만 이게 터져 나오면 둑처럼 무너질 수 있어요. 굉장히 비싼 돈 들여 법률회사를 고용해 2심을 준비하고 있다 합니다. (2심에는 이진섭 씨의 아내만 원고로 참여한다_편집자 주) 사회적으로 더 이슈가 되면 정말 목숨 걸고 할 거라 걱정이 많이 돼요. 하지만 이젠 균도와 아버지가 혼자가 아니다, 이해를 넓힌 만큼 같이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원과 재판 결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구요.
방사능은 통계적으로 ‘어느 정도면 괜찮다’고 하는데 나이와 체질에 따라선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데이터가 안 나와 있어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가 있고, 파장을 만들어갈 수 있고 파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진섭 : 공동소송이 4월 10일부터 시작합니다. 전국적으로 548명 모았고 우리 지역만 256명이 함께 합니다. 이들은 고리원전 10km 이내에 사는 사람입니다. 2차 땐 30km까지 넓히려고 하는데 그럼 1000~2000명이 더 나와요. 동네에 함께하는 사람만 256명이고 제가 연락받은 사람만 600명이 넘습니다. 우선 10km 넘는 사람은 뺀 겁니다.
지역주민 1%가 갑상선 암 환자입니다. 이에 대해 한수원이 어떻게 대답할지 너무 궁금합니다. 이는 다른 대조군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거로 아는데, 제 소송으로 이렇게 확보한 게 가장 기쁩니다.
김현우 : 이 사회에 발달장애인이 많은데 사회가 이를 못 챙겼다는 걸 ‘세상걷기’로 알게 됐죠. 발달장애인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피폭자가 나오는 것도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전엔 한 집 걸러 암으로 죽는다는 ‘소문’만 있었는데.

 

임영희 : 엄청난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이균도 씨 나이가 24세인데 균도 씨와 균도 씨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이진섭 : 비장애인은 의무교육이 중학교인데 장애인은 고등학교까지 입니다. 과거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지금 30~40대가 된 장애인과 달리 학교 문은 열려있는 편입니다. 문제는 지역 내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느냐, 학교 내 통합 학급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면 여전히 갈 곳이 없습니다. 복지관에선 중증보다 경증을 받으려고 하고, 이마저도 3년으로 이용기한이 제한되어 있어 아이들은 여전히 부모에게 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개별화 교육도 전혀 안 되어있고, 통합하여 평생 교육해야 하는데 이것도 어렵고.
만약 부양의무제를 성인 발달장애인에 대해서 풀어준다면, 장애인연금과 기초생활수급비로 발달장애인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양의무제 폐지 없이 발달장애인이 설 수 있는 길은 요원합니다.

 

임영희 : 마지막 질문입니다. 책에 ‘발달장애인 죽음에 부쳐’라는 꼭지가 있어요. 발달장애인 가족이 목숨을 끊는 일이 많은데 고민이 많으실 것 같아요.

이진섭 : 장애아동 둔 부모님들이 『우리 균도』 읽고 너무 절절하고 자기 입장 대변하는 것 같다, 하십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발달장애인 문제를 알아달라고 쓴 책입니다. 발달장애인 가족을 보고 발달장애인 문제를 봐달라는 게 제 이야기입니다. ‘우리 균도’야말로 ‘우리시대 발달장애인’ 아닙니까. 앞으로도 이 이야기는 발달장애인 부모에게 바치는 노래가 될 겁니다.

 

임영희 : 균도씨, 앞으로 또 걸을 계획 있어요?
이균도
: 계속 걷고 싶어요.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걷고 싶어요.
이진섭 : 올해는 책으로 ‘세상걷기’ 하려고요. 7월엔 미국에, 9월엔 독일에서 강의가 있어요. 내년엔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박 터질 정도로 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법, 장애아동지원법 다 통과시켰습니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서 휠체어 탄 동지들과 함께 ‘빡세게’ 해보고 싶습니다.

 

▲이날 온 사람들과 함께 단체사진.

▲강연회 후 저자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이진섭 씨가 책에 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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