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대한 배려·동정·은폐에 맞서 "장애인" 정체성 갖기
장애인·비장애인 사이에 있는 나, 경계를 허무는 첫 위치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는 생애 속 사건들을 3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이 글은 내가 어떻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기생애사’ 이야기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비장애인들의 시선, 제도 등이 나에게 장애인으로 정체성을 부여해온 지점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장애인으로 호명되는 지점을 찾아내서 제거한다면 장애인/비장애인에 대한 분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거친 비약이 담긴 염원을 살짝 담아서….

(2편에서 이어짐 - 2편 기사 보기)

대학에 들어와서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과연 사회학과다운(?) 환경과 인연의 적절한 조합으로 장애인운동에 관심이 많은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 새내기 때 처음으로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회를 갔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20살이 되어서야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는 것을 알았고, 장애인 차별의 심각성도 알았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느꼈던 불편함이 많은 장애인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언가 위로받는 느낌도 들었다.

▲대학에 들어오니 '데코'(장식)만 있더라.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웃으며 넘겼던 일들, 들었던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오는 것인지 알아가면서 개인이 느꼈던 불편과 불쾌감을 사회의 문제로 연결 지을 수 있었고, 이러한 말을 대신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으로 바꿔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나는 스스로가 장애인임을 자신 있게 드러내기도 했다. 같은 과 친구, 선배, 선생님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렸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중·고등학교 때처럼 누군가가 나의 상태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말을 해야만 했고, 처음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긴장되는 일이었지만, 반복하면서 그런 것들은 사라졌다.

말을 꺼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경험이 하나 있다. 내가 장애인임을 말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한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괜찮다고 말하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사람은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했을까. 이번 상황 역시도 내가 경증이고 외관상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장애인인 것을 몰랐던 것을 왜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느꼈을까. 미리 배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말하지 않았을 때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나의 장애 정체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부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넘겨짚고 과도한 배려를 해왔을 뿐이다.

선생님들께서 ‘동정’의 시선으로 과도한 배려를 한 적도 있다. 하루는 철학 관련 교양수업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자기 소개서를 통해 나의 장애를 알게 되셨고, 수업이 끝난 뒤 면담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공부를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것이 힘들 테니 과제의 분량을 줄여주겠다고 하셨다. 예전 같았으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끝낼 일이었지만, 당시에 장애인운동을 알아 가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불쾌감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께 곧바로 말씀드리기가 머쓱해서 상황을 그냥 넘겼다. 이 일이 있고나서, 고민이 깊어졌다. 그냥 무던하게 바라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한 쪽에 있으면서도, 그런 과도한 배려가 편하기는 했다. 결국 나는 이것을 마음껏 누리기로 하는 사악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장애인 학생을 너무나 다른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대학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장애 인식의 부재 속에서 과도한 배려와 장애의 은폐라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황대처가 번갈아 나타났고, 이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줬다. 과도한 배려는 대학생이 잘못된 장애 인식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조심스러워하면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오히려 ‘장애’ 자체를 은폐시켜서 나를 사라지게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앞서 말했던 장애/비장애인의 통합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포섭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가 장애인임을 모두가 인지한 상태에서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과, 내가 장애인임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은 분명 다른 맥락이다. 같은 과 학생들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장애인’(여기서의 맥락은 ‘정상인’의 반대개념으로 규정하여 비하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이나, ‘병신’ 등의 욕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내가 과실에 친구들과 있을 때 그들이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을 듣곤 했다. 이는 내가 장애인임을 그들이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의 차이는 나의 장애정도가 경증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실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언행들은 친구들이 나를 ‘비장애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장애정도가 중증이었다면 특별반에 속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비장애인 친구들의 사회에 속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장애인으로 인식되는 순간에 과도한 배려를 받는 어색함을 느꼈고, 정작 장애인으로서 인식되고 존중받아야 할 지점에서 비장애인 사회의 일원으로 포섭되어 나의 장애가 사라져버리는 기묘한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결국 경계에 서 있던 내가 혼란스러워 택했던 방식은 자신을 더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도한 배려, 동정과 같은 타자화된 시선에서 벗어나면서도 차별에 단호히 맞서기 위해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장애인들과의 만남

그런데 이런 나의 ‘드러냄’이 경계에 서있다는 생각에 멈칫했고, 더구나 다른 장애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 머뭇거려졌다. 여러 집회를 다니거나, 장애인 활동가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느꼈던 점은 각각의 장애가 다르고, 느끼는 차별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장애인이 단순히 ‘장애’로만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장애인은 발달장애인이면서도 여성이었고, 어떤 장애인은 또 다른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으로 복합적인 구성을 이루다보니 매뉴얼과 같은 기계적인 차별사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저자(현 「비마이너」 발행인)를 초청해 강연을 들으며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장애인마다 세상과 마주하는 지점도 조금씩 달랐다. 시각장애인이 전혀 느낄 수 없는 불편함을 휠체어를 이용해야하는 장애인은 느낀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내가 장애인운동을 접하고 나서 1년 뒤에나 깨달은 사례이기도 하다. 동국대의 사회과학관 화장실은 입구가 꺾여 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동안 실내에 점자블럭이 깔려있지 않는 것에 더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퍼포먼스를 위해서 휠체어를 빌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화장실을 들어가려다 입구가 꺾여서 들어가지 못하는 일을 겪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장애인들은 화장실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겠구나.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모든 장애인의 문제를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각 장애마다 경험이 다르고 맥락이 달랐다. 시각장애 6급으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뒤, 다른 장애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장애인일까 아닐까에 대한 질문이 계속 되었다. 비장애인과 비슷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비장애인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내가 과연 장애운동의 당사자이며, 장애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되는 이질감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와 더 가깝다고 느껴진 장애인들이 오히려 더 멀게 느껴졌다. 나와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은 장애인들의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외로움을 느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게 되었다. 비장애인의 세계에서는 좀 도와줘야하는 장애인이고, 장애인의 세계에서는 별 큰 장애도 없이 장애인으로 복지혜택은 누리면서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비장애인으로 취급되는 느낌도 받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물으며 보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나의 정체성을 찾았노라 당당하게 밝혔던 것은 잠시였다. 다시금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냥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어느 한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쩌면 두 입장을 다 말할 수 있다는 거만함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으로서 느끼고 있는 시선과 차별을 받기도 하며,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도 보통의 장애인보다는 불편함 없이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비장애인 중심의 대부분의 일은 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나에게 비장애인으로서 정체성을 더 강하게 구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애매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그 애매함을 적극 이용하려고 한다. 경계라는 위치가 때로는 외로울 지라도, 경계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가장 첫 지점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맺음말 - 나는 어떻게 장애인이 되었나

장애해방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노동해방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해석한다. 노동해방이 ‘전복’의 성격이라면 장애해방은 ‘공존’의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전복과 공존 중에 무엇이 우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모순지점과 해결방법이 다를 뿐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사회, 장애인을 그저 무던하게 바라보고 사회구성원으로 인식하는 사회가 장애해방이 이루어진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장애를 어떻게 다루고 인식하는지 알아보는 게 첫 번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단순하게 나의 경험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것이 오직 나의 사례에만 적합한 것일지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

28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어렸을 적에는 알게 모르게 장애인으로서 분리와 규정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시선이든, 제도이든 간에 말이다. 지금은 분리와 규정을 떠나서 스스로가 비장애인 집단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장애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뒤에 찾아온 차별을 뒤늦게 발견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스스로에게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마음먹게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의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려는 의지에서 선택한 길일수도 있겠다. 어찌되었든, 현재로서는 나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장애인이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장애인이다’를 외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정체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허준기 님.
장애인으로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법을 가진다는 것, 나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소중하다. 이것은 장애인들의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고, 장애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재해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가로수가 어떻게 보일까. 비장애인의 시각에서는 아름다운 거리의 나무일뿐이겠지만, 장애인의 시각에서는 이동권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다. 횡단보도의 24초가 비장애인들에게는 왕복할만한 여유 있는 시간일지라도, 장애인들에게는 속이 탈 정도로 촌각을 다투는 짧은 시간이다. 이처럼 시선이 어느 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인다. 그리고 이 달리 보이는 시선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논쟁해야 서로를 알 수 있다. 가까워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마침내 서로 마주 보게 되었을 때,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장애인이 되었나’에 대한 질문이 해결된다면 그 다음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어떻게 구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경계에서 방황했던, 지금도 가끔은 방황하고 있는 나의 역사와 나의 언어가 이런 고민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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