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지원은 등급폐지, 소득기준 철폐가 전제다.
단식을 하고, 농성을 하고, 삭발을 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질게 마음을 먹고 작정을 한다. 정치도, 운동도, 사회현상에도 관심을 두지 못하고, 오직 아이 돌보는 것에 ‘올인’하며 지내는 이 사람들이, 특별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독하게 작정을 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그렇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삶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오직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왜 뿔이 났는지, 누구라도 나서서 알아보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애인에게 예산은 인권이다.'
어떤 기자회견에서 사회자가 한 말이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대통령과 복지부 관계자들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이 인권이라 한다는 말이 얼핏 오해를 낳을 수 있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8월 31일,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 마흔아홉 명이 집단으로 삭발을 했다. |
무엇이 필요한가?
장애아동에 대한 재활치료 지원은 현재 운영되고 있는 방식의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 소득기준에 의해 대상자를 선발하는데 이 소득이란 것이 좀 애매하다. 장애아 부모들은 자식의 장애를 위해 수입을 늘려 가려 안간힘쓰고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입은 고스란히 장애 아이에게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집을 소유하고 있거나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소득으로 환산되면서 매달 발생하는 수입과 달리 고정된 수입으로 판단하는 것도 하나의 문제다.
단순하게 소득을 많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지출대비 소득을 따지는 것이 적절한 것이고, 더 나아가 복지지원의 보편적 서비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득기준의 전면적인 폐지로 장애 때문에 추가 지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 지원의 본질이라 하겠다. 수입이 생겨도 지출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단순하게 소득을 기준으로 복지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선별하겠다는 것이고, 이는 정부가 말하는 보편적인 서비스의 확대 시행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기준으로만 재활치료서비스를 지원하겠다는 말은 직장도 그만두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정책인지는 현장에 나와 현장의 소리를 들어보면 바로 드러나는 것들이다. 부모들은 제대로 된 복지정책이 세워지고 질적, 양적인 확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돌봄서비스의 경우는 장애아를 키우면서 가지는 정신적인 고통을 덜어주고, 육체적인 휴식을 지원하며 가족을, 가정을 건강하게 지켜내기 위한 것이 기본이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공통적인 현상은 장애아를 키우면서 부모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고, 장기간 장애라는 문제에 묶여 지내다 보니 심적인 고통이 커져 몇 년 전부터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동반자살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질곡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하나의 원인이고, 다른 요인으로는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장애로 인한 위험에 정신적인 고통에 의한 위험요소까지 나타나, 두 배 이상의 위험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단이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단위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지금처럼 단순하게 재가지원(목욕, 병간호)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이라는 기능을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장애아동 돌봄서비스는 가족과 가정이 장애 때문에 파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지원의 내용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가사도움, 이동보조, 학습보조, 일상생활훈련보조 등 자립생활을 위한 훈련프로그램의 지원과 그에 따르는 전문화된 보조인력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돌봄의 기능을 단순하게 부모가 장애아동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해 주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활동을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돌봄이란 것은 좁은 의미로 보면 일정 시간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큰 의미로 본다면 장애아동 스스로 자립훈련을 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지원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돌봄서비스가 활성화되면 치료와 교육에 지출되는 경제적인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낼 수 있으며, 양육과 치료 등으로 생기는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 낼 수 있어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진다.
돌봄서비스를 찾아가는 서비스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동기부터 사회통합을 위한 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인기를 맞이하고 지역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하고, 많은 시간이 투자되어야 한다. 발달장애인이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고 그것을 활용해 가기 위해서 지속성과 반복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돌봄의 기능을 좁은 의미가 아닌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 ▲삭발 중인 함께가는서울장애인부모회 최석윤 회장. 장애아동 예산 확보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단식을 진행 중이다. |
하나 더 본다면 장애성인의 지원에 관한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성인기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현실이다. 성인기에 이르면 장애와 관련한 모든 문제가 장애 당사자나 그 가족들의 몫이지 국가의 몫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법’을 제정하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법 제정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발달장애 성인들에게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부와 복지부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성인기에는 부모의 노령화와 경제력 상실로 말미암아 고통은 몇 배 가중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단순한 고통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로 전이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없애기 위한 방안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장 문제로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시설을 확대, 확충해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시설의 개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의 시설운영이 돼야 한다. 시설 운영과 관련해서 수용이나, 보호의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생활훈련, 그리고 직업과 관련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학교의 형태로 운영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단순기능의 시설에서 탈피해 종합적인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형태로 전환된 내용이어야 한다.
대략 살펴본 내용이다. 물론 이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욕심을 가지고 없는 것들을 당장 만들어내라는 요구를 하지 않겠다. 위 내용은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들이고, 그 내용을 보강하고 확대해 가자는 것이며, 성인기의 문제들은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으로 반영한 요구들이다.
부모들은 모질게 마음을 먹고 길거리에 나선다.
밥하고, 청소하고, 직장생활하고, 아이 돌보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 그것들을 팽개치고서 거리로 나와 아우성이다. 죽겠다고, 못살겠다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삭발이라는 결정은 여자에게, 엄마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을 결행하겠다는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고 방안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이 ‘전가의 보도’로 작용하는 말잔치는 거두어야 한다.
‘오죽하면 그럴까’라는 말이 있다.
종일 장애아이 치다꺼리하는 것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사람들이 살기가 오죽이나 팍팍했으면 일이고, 집이고, 아이들이고 다 팽개치고서 천리길 마다치 않고 서울 한복판에 주저앉아 눈물로 목청을 돋우겠는가. 이 핑계 저 핑계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궁리는 그만하고, 이제 이들 부모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줄 것인지 시원하게 답을 만들어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통령이든 복지부장관이든, 기획재정부 장관이든 나서서 입을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소득이고, 등급이고 다 치우고 장애만 가지고 이야기하자. 복지라는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자.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 조건을 앞세워 사람을 가르지 말고, 장애로 인한 고통은 누구나 같은 것이니 복지 지원의 대원칙은 조건 없는 지원을 시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속 시원한 이야기 좀 누구라도 나서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최석윤의 '늘 푸른 꿈을 가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