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훈 단편소설

(「기침 ①」에서 이어짐)

정희 누나는 여전히 파란색 성인용 유모차를 타고 있었다. 누나는 유모차와 방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마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통닭처럼 팔을 구부리고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댔는데 그때마다 누나의 입가 주위에서 갓 튀긴 뻥튀기마냥 침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오곤 했다. 분비물 속에는 간간이 누런색의 액체도 섞여 있었다. 누나와는 재활병원에서 함께 물리치료를 받던 사이였다. 소아 물리치료실 바닥에 펼쳐진 파란색 매트리스에 누워 옆을 보면 누나가 있었다. 나는 물리치료 선생이 잘 펴지지 않는 내 다리를 고무 찰흙 다루듯이 늘릴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누나는 반응이 없었다. 나와 비슷하게 근육을 이완하는 치료를 받았는데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누나를 치료하던 선생 또한 마치 인간을 빚어내는 조물주와 같이 묵묵히 노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감마저 들기 까지 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인해 장애아로 태어나게 했던 아들을 걸리려는 일념만으로 하루도 물리치료를 거르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은 만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직립보행을 하지 못하는 돌연변이였다. 물리치료라고 해봐야 고작 무릎 펴기, 네발 기기, 무릎 꿇고 서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마저 하지 않으면 못 쓴다고 하면서 보채는 어린 아들을 억지로 병원으로 끌고 갔고 하루의 반나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물리치료 선생의 휴가로 치료가 없었던 날에도 여지없이 병원엘 찾아가 다른 선생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하루하루가 지난한 전쟁 상황이었고 내가 커갈수록 이러다 진짜 걷지도 못하고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의 연속이었다. 그건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 상태는 나보다 심했지만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나의 할머니가 더 극성이었다. 칠순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던 할머니는 날마다 외손녀의 유모차를 밀며 신촌 일대를 누볐다. 한 팔에는 기저귀 가방을, 다른 팔에는 도시락 가방을 끼고 행군에 행군을 거듭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외손녀를 보고 힐끔거리며 쳐다볼 때도,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을 때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오히려 더 큰 웃음소리로 그들의 웃음 위를 덧칠했다. 그것은 외손녀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억척이었다. 그런 외할머니를 뒤에 둔 채 누나는 그저 유모차에 앉아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의사표시를 하지 못했고 눈도 잘 뜨지 못했다. 그게 내가 지켜본 누나의 전부였다.

그리고 누나의 목 안에는 항상 가래가 끓고 있었다. 누나는 웃을 때도, 울 때도 가래 때문에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가래를 빼주고 싶은 강한 충동마저 느껴졌다. 어느 때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만큼 가래와 누나의 위험한 동거는 그 상태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가래 섞인 목소리는 누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듯 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누나의 목소리에서 포착되는 미세한 감정들을 알아챘다. 늘 가던 길로 가지 않으면 목소리를 높였고 먹기 싫은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음식을 넘기지 않고 가래 섞인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할머니는 내 마음대로 갈 것이라는 둥 이년이 편식을 한다는 둥 누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것이 누나와 할머니와의 유일한 의사소통이자 삶을 꾸려나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곁에 둔 누나가 부러웠다. 친가를 가도, 외가를 가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어머니는 한 집안의 장손을 병신으로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짐승 새끼처럼 방 한구석에서 틀어박혀 지내다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딱 한번, 나에게도 친가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때도 나는 시골로 내려가자마자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절을 올리고는 곧장 방으로 기어들어가 서울에서 가져온 책들을 읽었다. 어머니는 내 생일 때만 되면 조그만 그림책을 사주곤 했는데 주로 백설공주, 개구리 왕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 따위의 동화들이었다. 동화 속 우리의 가여운 주인공들은 죽을 위기를 넘기고 기껏 해봐야 찌질한 인생을 겨우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했던 나는 속으로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줄까 하고 생각했다. 동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는 슬픔에 잠기는 바람에 쉽사리 책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다음 장을 넘긴 나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저 예쁜 포즈로 잠만 자고 있는 숲속의 공주에게는 백마 탄 왕자가 알아서 오는가하면, 비린내를 잔뜩 풍길 것 같은 개구리 왕자에게는 어여쁜 공주가 무차별적인 키스 세례를 퍼부어댔다. 저마다 각양각색의 역경들이 휘몰아치며 삶을 압박하건 간에 결국 이들은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들이었다. 동화 저변에 깔려있는 운명의 힘은 세계의 개연성을 싹둑 잘라버릴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공주의 키스로 개구리 왕자가 비린내를 풍기면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려는 찰나 굳게 입을 다물었던 방문이 비명을 지르면서 열렸다. 그 비명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허리가 상당히 굽혀진 할머니는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집 밖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휠체어에 태웠다. 당황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끙 소리를 냈다가는 날카로운 할머니의 미간이 내 눈을 찌를 것 같았다. 휠체어 또한 숨죽이며 어디론가 향했다. 내 키를 훨씬 웃돌 정도로 자란 논밭의 벼들이 으스대며 흔들렸다.

 

휠체어가 가닿은 곳은 저수지 부근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그 사람들의 중심에는 울긋불긋한 저고리와 치마를 두르고 기이한 모양의 모자를 쓴 여자가 빨빨대며 몸을 놀리고 있었다. 여자는 저수지 앞에 차려진 상을 잘 정돈하는가 하면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여자의 앞에는 커다란 작두가 놓여있었다. 제법 큰돈이 들어간 굿판이었다. 줄곧 저수지를 보고 있었던 할머니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눈빛은 여느 손자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귀신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승에서 억울하게 죽은 애기귀신이 되었다. 바람이 저수지 부근을 지나가자 느티나무가 소름끼치도록 긴 머릿결을 휘날렸다. 여자가 작두 앞에 서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끊겼다. 햇볕을 등지고는 깊은 숨을 한두 번 내쉬더니 떨리는 발을 칼날 위로 살며시 갖다 댔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사람들은 탄식 비슷한 탄성을 질렀다. 여자의 왼쪽 손에서 흔들리는 방울은 환호성에 묻혀 소리 없이 울렸다. 곧이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는 작두를 타는 여자의 맞은편에서 누군가에게 쉴 새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 손자를 살려주시옵소서 걷게해주시옵소서. 마치 고요한 절간에서 공양을 드리듯 굿 한복판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정오의 햇볕 아래 할머니의 주름살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자는 양팔을 벌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았다.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위태로움은 커져만 갔다. 나는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애기귀신이 되어 이승과 저승 사이를 맴돌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를 눈치 챈 아버지, 어머니가 성급히 와서 어지러웠던 굿판을 끝내는 바람에 귀신 신세는 면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 댁에는 부적들이 붙여졌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날 이후로 가문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애기귀신이 된 셈이었다. 부적을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집안 곳곳에 붙여진 부적들은 효력이 없는지 나는 두 발로 서 있기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날 이후로 내 가슴 한켠에서 이승에 있는 동안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것 같은 슬픔이 차곡차곡 얹혀만 갔다.

이 세상에는 무당의 힘을 빌려 친손자를 걷게 하려던 할머니가 있었다면 신의 힘을 빌려 외손녀를 지키려던 할머니도 있었다. 신실한 크리스천인 정희누나 할머니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나갔고 석 달에 한번은 기도원을 다녔다. 누나에게 밥을 먹이기 전에 꼭 기도를 했는데 눈치 없이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나도 왠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신에게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인지 할머니는 말끝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읊조렸다. 나는 누나도 신에게 감사한 마음일까 궁금했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어머니가 아멘! 으로 맺는 할머니의 기도 말미에 맞춰 큰 목소리로 아멘! 하고 외쳤다.

어머니와 정희누나 할머니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김장한 다음날이면 서로의 김치를 주고받았고 외롭거나 힘든 날에는 가족 몰래 야밤에 회동을 가졌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리기만 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나와 같이 다니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장애라는 크나큰 공통점이 있었다고 해도 우리는 전혀 다른 곳에 잔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희번덕거리는 누나의 눈동자는 어린 나에게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친척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과연 내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우려를 표했다. 어떤 이들은 일반학교에 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특수학교에서 맘 편히 생활하는 것이 어떠냐고 달콤한 말로 회유하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학급에서 수업을 받는 일은 제법 희귀한 광경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머니와 나는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둘의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를 가고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공부와 치료를 병행해야 했기에 숨이 차오를 때가 많았지만 어머니는 이것만이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섬뜩한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에게 아직 핏기도 마르지 않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반발하기 일쑤였던 나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 말에 조금씩 수긍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정희 누나는 특수학교를 다녔다. 나는 10을 넘어 훨씬 더 큰 숫자와 세계를 조금씩 배워나갔지만 누나는 그 이상을 배우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일반학교와 특수학교의 본질적인 차이라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끔찍한 것이었다. 누나와 나는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는 아예 얼굴 한번 마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내가 다녔던 동네 중학교 옆에는 누나가 다니는 특수학교가 있었다. 교실 창문에서 내다보면 그 학교가 보였는데 정작 학교를 다니는 장애학생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나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장난기가 발달한 몇몇 친구들은 길가에서 마주쳤던 장애 학생을 과장해서 흉내 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따라 웃어댔다. 만약 한국에 청년시절 오이디푸스가 있었다면 그가 바로 나였을 것이었다. 끝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처럼 나는 나를 외면한 셈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삶에서 정희 누나의 자리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친구들에게서 배운 욕지거리와 음흉한 생각들이 들어섰다. 누나를 지워버림과 동시에 내 모습 또한 치밀하게 지워나갔다. 학교 친구들을 사귀는 데엔 ‘장애’라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았고 체육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와 친구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이 희미해 보였다. 마침내 나는 친구들과 똑같은 존재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글에서 계속)

홍성훈의 난장판

뇌병변 1급 장애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열등감이었다'. 일반 초중고에서 비장애인 친구들과 공부했고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려고 한다.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준비 중이며 인정투쟁이 아닌 또 다른 논리로 소수자를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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