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애인들 사이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장애등급심사'다. 보조인이 없으면 꼼짝없이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 최중증장애인이 2급으로 탈락해 활동보조가 끊기게 생겼다느니, 목 밑으로는 사지가 마비된 경추장애인이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다는 이유로 등급이 떨어졌다느니, 뇌병변장애인은 무조건 두세 등급씩 떨어진다느니 하는 소위 ‘등급심사괴담’으로 장애인계의 민심은 전에 없이 흉흉하다.

 

아직 등급심사를 받지 않은 장애인들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불안에 떨고 있다. 어느 때라도 등급심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날아온다면 수십만 원 들여 등급심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다 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자립생활의 꿈도 깨지고, 근근이 삶을 지탱하던 복지서비스마저도 끊어지기 때문이다.

 

▲장애등급에 따라 달라지는 복지서비스. 장애등급이 낮아질수록 이용할 수 있는 복지서비스가 적어진다.

 

 

목숨 건 도박, 등급심사

 

마침내 2010년 7월부터 장애인연금이 시행되었다. 장애인계가 그토록 염원하고 수년간 도입을 위해 투쟁했던 제도였건만, 이명박 정부는 또 한 번 장애인을 우롱했다. 장애인의 소득보장제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급여액은 고작 월 최대 15만 원에 불과하고, 대상자는 전체 장애인 중에서 고작 13%에 불과하다.

 

결국 장애수당을 이름만 바꾸어놓고 ‘장애인연금’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이토록 기만적인 장애인연금이지만 그조차도 접근이 쉽지 않다. 기존 중증장애수당 대상자가 아닌 신규 해당자들은 장애등급심사를 받아 1급 또는 2급으로 재판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자립생활 지원’이라는 목적을 표방하고 있는 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급 장애인 중에서도 필요도 조사를 다시 해 극히 소수 최중증장애인에게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그마저도 신규로 서비스를 신청하는 경우 장애등급심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반드시 1급 판정을 받아야만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현재 1급 장애인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도 연금을 신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십만 원을 들여 장애등급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자칫 등급이 하락하는 날엔 활동보조가 중단된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일부에게만 특혜처럼 주어지는 복지제도를 설계하면서, 그마저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중의 장벽을 만들어 장애인을 대대적으로 선별하고 엄중 수색하고 있는 형국이다.

 

장애등급심사란 의사가 판정한 장애등급이 적절한지를 서류로 심사해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기존의 장애등급판정제도에 일관성과 형평성이 결여되어 있고 부적정한 장애판정 사례가 많아, 복지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는 2007년 4월부터 중증장애수당 신규신청자를 대상으로 장애등급심사를 진행했고, 2009년 10월부터는 활동보조서비스를 신규로 신청하는 1급 장애인에 대해 장애등급심사를 의무화했다. 2010년 1월부터는 신규로 1~3급 장애등록을 신청하는 경우에도 장애등급심사를 확대했고, 지난 4월에는 장애인복지법 및 시행규칙 등의 일부개정을 통해 장애등급심사를 국민연금공단에 위탁 운영하도록 해 법적 근거도 정비되었다.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를 생사의 저울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장애등급심사 결과는 엄청나다.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07년 4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총 92,817건의 장애등급심사 결과 장애등급이 유지된 경우는 60%이며, 상향조정된 경우는 고작 0.4%였고, 등급이 하향된 경우는 무려 36.7%인 34,064건이었다.

 

등급하락의 원인은 장애진단서와 진료기록지 상의 장애상태가 상이(74.3%)하거나 장애등급 판정기준 미부합(14.0%)으로 법령에 맞지 않는 장애등급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나 두 유형이 전체 사유의 88.3%를 차지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를 일선 의료기관에서 부여한 장애등급이 장애인복지법령에서 정한 장애등급판정기준에 비하여 후하게 부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엄청난 장애등급 하락 사례를 무슨 대단한 허위와 부정을 적발이라도 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실제 전문브로커까지 동원된 허위장애진단 사건이 발생하는 등 소위 ‘가짜 장애인’의 존재는 보건복지부의 이러한 주장과 장애등급심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심사의 공포와 하락의 악몽

 

장애등급심사의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다. 장애등급심사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도 전액 장애인이 부담하여야 한다. 의료보험 적용도 안 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대부분 CT, MRI, 근전도검사 등 수십만원짜리 검사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 비용을 장애인이 내야 한다.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으려면 먼저 자기 돈을 들여 테스트를 받고, 관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복지에 접근할 자격을 주겠다는 논리인데, 이렇게 정부가 일방적으로 행정지침을 개정하면 그 피해는 어쩔 도리 없이 장애인에게 전가된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검사비용이 30만 원이 넘는 사람에게 10만 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그것으로 별 위안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보건복지부도 장애인계와 마찬가지로 자립생활 패러다임을 이야기한다.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하고, 공공연하게 자립생활 이념을 역설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그리던 장애인들의 꿈은 장애등급심사의 공포와 등급하락의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없다면 자립생활은 고사하고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인데 시설에서 나와 활동보조서비스 신청을 하면 수십만 원을 들여 등급심사를 받아야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몇 달 동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며, 만약 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정말로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 있겠는가.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처럼 하루 한 시간의 생계대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보건복지부는 등급심사의 장벽을 먼저 통과하기를 요구한다. 장애인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편의주의는 이미 폭력이다.

 

보건복지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장애등급심사는 장애등급판정 기준에 의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장애등급 부여로 장애인복지 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장애인복지를 지속적으로 확대·강화할 수 있는 기반 조성에 기여”한 것으로 자평하면서, “꼭 필요한 장애인이 좀 더 많은 서비스를 받게 하기 위하여 장애등록제도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얼핏 일리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장애등급심사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자 본질은 결코 등급판정에 대한 ‘의료적 형평성’ 여부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말하는 공정하고 객관적 장애등급 부여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환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장애인의 삶은 의학적 몸 상태뿐만 아니라 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의학적으로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도 환경에 따라 삶의 모습과 욕구는 다를 수 있다.

 

같은 1급 시각장애인이라도 흰 지팡이와 점자를 사용할 줄 알고 주변 환경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조건과 욕구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하방에 사는지, 누구와 함께 사는지, 주변 환경에 얼마나 익숙한지, 심리상태와 의지가 어떠한지 등에 따라서도 장애인의 조건과 욕구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애초에 장애란 고정된 것도 의료적인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문제는 바로 등급제

 

의학적 기준만을 절대시하여 사람의 몸을 저울질하여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복지서비스의 여탈을 정하는 시스템은 장애인의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장애인의 욕구를 무시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적인 시스템이다.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제일 먼저 배우고 듣게 되는 상식이란, 한국에는 장애인이 인구의 약 5%이고, 15가지 유형에 1급부터 6급까지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따위의 사실이다.

 

▲예산에 맞춰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서비스를 잘라내고 있는 현실, 장애인의 몸을 자르는 것과 다름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퍼포먼스.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겨 분류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고유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장애등급제도에 익숙한 우리는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는 장애등급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장애인에게 복지서비스가 제공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장애등급제는 참으로 많은 것을 은폐하는 기능을 해왔다. 장애등급제는 장애와 장애인의 사회적 관계성을 은폐하고, 장애인이란 신체기능의 손상이 몇 퍼센트 이하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장애등급제는 저마다의 삶의 환경과 욕구를 무시하고, 가짜장애인을 색출하겠다는 공포정치를 정당화시킨다. 장애등급제는 결국 장애인의 권리를 부정하고 예산에 따른 선별적 복지, 동정과 시혜의 차별적 시스템을 정당화시킨다.

 

장애인이란 결국 어떠 어떠한 사회적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 불과할진대 장애등급제는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묻기보다는 당신의 몸은 몇 점짜리인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한사코 장애등급심사의 목적이 예산절감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스스로도 적은 예산에 맞추어 대상자를 잘라내기 위해 의료적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장애등급을 기준으로 서비스를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차별적인 시스템은 영원히 장애인의 권리를 예산의 틀 안에 가두게 될 것이다.

 

중증장애인의 처절한 투쟁으로 2007년에 시행된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는 여전히 1급 장애인으로만 신청자격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직 예산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도 일상생활에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은 35만 명이나 된다.

 

2010년 7월부터 시행된 장애인연금은 1, 2급 및 중복 3급 장애인 중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연금의 목적이 장애로 인해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빈곤에 내몰린 장애인이라고 할 때 그 대상자는 거의 대부분의 장애인이어야 마땅하다.

 

두 제도 모두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행되던 것이며, 그 대상자와 제공되는 수준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까운 일본에서 활동보조가 처음 시행된 것은 1974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연금과 수당을 합쳐 장애급여를 받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1%에 불과한데, 유럽 국가들의 경우 10%대에 이르며 룩셈부르크는 인구의 17%나 된다.

 

장애등급제의 존재 근거는 바로 이것이다. 장애등급제라는 기계장치는 동정과 시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선별적 복지를 유지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는 예산절감을 위해 복지의 대상자를 엄정하게 색출하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장애인의 권리와 욕구조차 차별적 시스템 안에 가두고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믿음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선전하면서 장애인으로 하여금 복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만드는 정부, 장애인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복지예산을 줄이기 위해 장애인 수를 줄이려는 정부의 작태를 보면, 도대체 이 나라의 장애인복지라는 것이 과연 장애인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의 사회서비스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등급하락으로 졸지에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 장애인들과 장애등급심사의 악몽에 시달리는 장애인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고 장애인계 단체들도 공동대책기구를 구성하고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겁다.

 

사람들은 장애등급제 폐지의 대안이 무엇인지 묻곤 한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장애인들은 이제 더 이상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줄서지 않을 것이다. 대신 복지가 발전한 나라들처럼 장애인 개인의 삶의 환경과 욕구를 파악하기 위한 전달체계와 개인별 지원체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동안 장애인운동은 이동의 권리, 교육의 권리, 자립생활의 권리, 탈시설의 권리 등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주장하고 투쟁으로 쟁취하고 확장해내며 전진해왔다. 이제 장애인운동은 장애등급이라는 낙인을 없애고자 한다. 장애인의 몸에 새겨진 차별의 낙인을 지우면 장애인의 존재와 권리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이 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년 9·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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