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 세 모녀 2주기 추모제… '극락왕생' 빌어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14년 2월 26일, 서울 송파구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 살던 세 모녀가 번개탄을 피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두 딸은 신용불량 상태였고, 어머니 혼자 식당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오고 있었다. 이들은 편지와 함께 돈 70만 원을 남겼다. ‘송파 세 모녀 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참혹함을 안겨주었다.
파장은 컸다. 정부는 복지사각지대에 대한 일제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조사만 할 뿐 실제 지원으로 이어진 경우는 미비했다. 이어 ‘송파 세 모녀 법’이라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개정됐다. 그러나 부양의무자 기준과 낮은 재산 기준 등 수급자가 되기 위한 까다로운 선정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고, 재산의 소득환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근로능력평가는 그대로 남겨졌다. 오히려 정부는 수급비의 각 급여항목의 주무부처를 쪼개서 급여에 대한 신청과 이의 신청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를 ‘개악’이라며 “송파 세모녀법으로는 송파 세 모녀를 구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비판의 목소리는 거셌지만 가난한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더 가차 없었다. 개정 이후 정부는 시행령을 통해 수급권자의 5년간 처분 재산을 조사해 소비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재산은 소득으로 환산하겠다고 했다. 또한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수급자가 얻는 자활소득 중 30%를 공제하여 탈수급을 촉진하는 자활장려금도 폐지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여전히 죽음의 벼랑에 섰고 자주 힘없이 고꾸라졌다. 죽음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서러운 죽음을 위무하고 빈곤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26일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빈민·장애계와 송파 세 모녀 2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해치마당엔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자신을 ‘꺽쇠’라고 밝힌 홈리스 당사자는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긴급복지지원제도가 개정됐지만 사실상 달라진 점을 모르겠다. 나 또한 부양의무제 때문에, 부모님이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수급을 못 받고 있다”면서 “동사무소에 가니 장모님의 ‘관계 포기 각서’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미 커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는데 뭘 또 헤어지라는 건지 모르겠다”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만성 허리 통증으로 일하기 힘들지만 (먹고 살기 위해) 가끔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다. 아내도 장애가 있다.”면서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죽지 못해 사는데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윤애숙 빈곤사회연대 조직국장은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시행하겠다고 했다”면서 “그러나 작년 2월, 70대 노인이 통장에 잔고 27원만을 남긴 채 방 안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송파 세 모녀 죽음 이후 발달장애인에 대한 부모 존속 살해만 10건 가까이 된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단순히 ‘찾아가지 않아서’인지 되짚어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윤 국장은 개정된 기초생활보장법인 ‘송파 세 모녀 법’에 대해서도 “고인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이어 “이제까지 제도의 잘못된 점들에 대해 투쟁해왔지만 이젠 가난한 이들이 더는 죽어가지 않기 위한 법이 무엇인지, 우리가 원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할 것”이라면서 “더는 이런 추모제를 지내는 일 없게 다시 열심히 싸우겠다”라고 다짐했다.
김명학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공동행동 집행위원은 “가난과 장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죽음을 막는 게 우리의 의무”라면서 “잡은 손 놓지 말고 야만의 사회에 맞서 끝까지 싸워 우리의 권리를, 약자의 권리를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장인 혜용스님은 “먼저 가신 분들께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가 됐으면 한다”라면서 가난으로 스러져간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