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야학 교육공간 마련 위한 특강 첫 번째 - 박래군 416연대 상임위원
세월호 사건은 슬픔과 애도의 대상에서 이제는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되었다. 정부는 그만 잊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유가족을 향한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무성한 오해와 은폐들. 이 가운데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퍼즐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 비방과 의심의 거센 물살 속에서도 세월호 문제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416연대, 그리고 그 물살의 한 가운데 있는 박래군 416연대 상임위원. 참사가 일어난 지 721일째 되는 날이자 참사 2주년을 앞둔 4월 5일, 그가 노들장애인야학을 찾았다.
세월호, 그 때의 기억
“가족의 시신을 찾아서 진도체육관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남은 사람들은 ‘축하한다’고 하고, 떠나는 사람들은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은 유가족 앞에서 고개를 못 들었어요. 유가족은 미수습자 가족 앞에서 고개를 못 들었고요. 미수습자 가족들의 소원이 ‘유가족이 되는 것’이었어요.”
박 상임위원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진도체육관에 머물러 있던 실종자 가족들의 불안감을 전했다. 처음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있던 가족들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신이라도 찾았으면’으로 바뀌어갔다. 당시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내가 진도체육관에 가장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면 어떡하지’였다. 하지만 가족들의 간절함과 불안함에는 아랑곳없이, 정부의 대처는 느리고 답답하기만 했다.
“정부의 발표가 계속 바뀌었죠. 세월호는 처음부터 정보들이 불분명했어요. 전원 구조라더니, 나중엔 사상 최대 구조 작전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16일 당일에, 잠수사들이 두 명씩 두 번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입니다. 사건 다음날인 17일, 한창 구조 작업에 전념해야 할 그 때, 대통령이 온다고 구조 작업이 다섯 시간 동안 중단되었어요.”
‘구조 작업에 최선을 다 하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은 하루도 채 가지 않았다. 정부는 탑승자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다섯 번이나 발표를 번복했고, 구조 작업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원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거듭되는 둘러대기에 가족들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가족들의 상처는 서울에서도 곪아가기 시작했다.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 희생자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생각하면 그리 많지 않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분노한 유가족들은 5월 8일, 아이들 없이 맞이한 첫 어버이날에 여의도 KBS에 항의 방문을 했다. 사장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공영방송국에서 발생한 일이니까, 정부에서 바로잡으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유가족을 꽁꽁 에워쌌다. 가족들은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생애 첫 ‘노숙 농성’을 했다.
“이 날 처음으로 생존 학생들이 유가족 앞에 섰습니다. 당시 학생 대표는 ‘우리만 살아와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가장 힘든 건 이 아이들이었을텐데, 너무 잔인한 일이지요. 결국 길환영 당시 KBS 사장이 찾아와 사과를 하고 농성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에 충격을 받은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처음에는 무사 귀환을, 나중에는 단 한명이라도 살아 돌아오길 바라며 촛불문화제가 연일 진행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권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모욕과 혐오
하지만 6.4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유가족을 모욕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어떤 이들은 유가족더러 ‘시체장사 한다’고 했고,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저렇게 떼를 쓰는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이 이런 말을 그대로 받아 썼다.
“정부가 유가족에게 돈을 지급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특별법’이 2014년 12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즉, 6월부터 본격적으로 나왔던 ‘유가족이 얼마를 받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죠.”
단원고 피해 학생들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유가족이 받게되는 총 배·보상금은 약 8억 2천만 원이다. 여기에서 국민 성금 3억 원, 여행자 보험금 1억 원을 제하면,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상금은 4억 2천만 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부에서 전액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청해진 해운에 구상권(채무자 대신 돈을 갚고 후에 되돌려 받는 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유가족 130명은 정부 보상을 거부했다. 보상을 받으면 진상규명 이후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가 추가로 밝혀지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특별법’ 제16조에 따르면, 배∙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 시 국가와 재판상 화해가 성립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가족들은 보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라며 국가와 청해진 해운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자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진상규명을 위해 길고 험한 길을 택한 것이다.

진상규명과 ‘기억하기’를 방해하는 정부는 무엇이 두려운가
박 상임위원이 말하는 선박 인양의 이유는 세 가지. 아직 바다 안에 있는 실종자를 수습해야 하고, 진상규명을 해야 하며, 세월호 사건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같은 경우 인양해서 전시해 놓고 안보 교육용으로 사용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월호도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안전사회의 인식적 토대가 되겠죠”
정부는 처음에 비용이 많이 들고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세월호 인양을 포기했다. 하지만, 유가족과 국민들의 항의가 뜨거워지자, 박 대통령은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인양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양 업체로 선정된 중국의 ‘상하이 샐비지’가 선박을 온전하게 인양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침몰 현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동거차도’에서 유가족분들이 인양 감시를 하고 계신데요, 대체 뭘 숨기려는건지 밤에는 강력한 서치라이트를 섬 쪽으로 쏴서 시야 확보를 방해해요”
“정부는 특별조사위원회 활동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해수부 장관이 여당 특조위원들에게 ‘청와대 조사는 무조건 막고, 막지 못하면 다 사퇴하라’고 지시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죠. 보수단체를 동원해서 특조위 상임위원장을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조위 활동기간이 1년에 6개월 연장이 가능한데, 작년 8월에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니 내년 2월까지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특조법이 지난해 1월 1일 발효니까 그때부터 조사활동이 시작된 걸로 봐야 한다며 올해 6월까지 조사를 마무리하라는 거예요”
‘스데롯 언덕’과 ‘소녀상 의자’ 중,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폭탄에 눈이 있어 나쁜 사람만 죽이나요? 거기엔 무고한 사람들이 있어요. 남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감정적 유대가 끊어진 사회는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 옆에는 빈 의자가 있지요. 그 곁에 앉아달라는 요청입니다. 여러분의 자리는 스데롯 언덕입니까, 소녀상 옆의 의자입니까”
슬퍼하는 사람의 옆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연대’는 ‘동정’과 다르다. 사람들이 ‘이제 세월호 이야기는 지겹다’고 이야기하는 배경에는 ‘이 일은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박 상임위원은 연대는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미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는, 자기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이것은 ‘아직’ 이 일을 겪지 않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것입니다. 남의 슬픔을 팔짱 끼고 구경만 한다면, 결국 내게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나를 위해 싸워줄 사람이 없어집니다.”
박 상임위원은 광주 518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36년이 지난 지금도 5월이 되면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세월호 사건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다.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책임자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건만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낸다. 은폐하려는 정부는 너무도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또 다시 잔인한 4월이 왔다. ‘내가 설 자리’를 선택할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