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맹·전농 아니면 몰입 방해하는 음성 해설, 관람 불편
배리어프리 영화 위해 법, 제도 정비 필요

2011년 청각장애인 인권침해를 다룬 영화 ‘도가니’가 4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지만, 정작 청각장애인들은 그 영화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2014년 기준 전 국민이 연간 4.19회 영화관을 방문했으나, 볼 수 있는 영화가 없던 장애인은 영화관에 못 갔다.
 

그나마 한국농아인협회(아래 한농협),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등 당사자 단체가 2011년부터 CGV, 영화진흥위원회와 운영한 ‘장애인영화관람데이’는 장애인들이 대중 영화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다. 한시련 등은 매월 셋째 주마다 최신 한국영화에 자막, 음성 해설을 넣은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상을 제작해 CGV, 롯데시네마 등에서 상영해왔다.
 

6월의 배리어프리 영화는 지난 1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로 여성 등장인물들의 사랑을 독특한 시선으로 담아내 화제를 불러모았다. 26일 기준 405만 6257명의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그렇다면 배리어프리 영상으로 풀어낸 ‘아가씨’를 시청각장애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지난 18일 시청각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구로CGV에서 배리어프리 영화를 감상해봤다.
 

영화 '아가씨' 포스터. (감독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용필름,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아가씨' 포스터. (감독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용필름,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자막·음성 해설 들어간 ‘아가씨’, 모든 시청각장애인에게 ‘배리어프리’는 아니다 

영화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원작소설 ‘핑거스미스’를 일제 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영화는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분)의 후견을 받으며 집에 갇혀 살았던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 에게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하정우 분)과 소매치기 숙희(김태리 분)가 접근하면서 시작된다. 배우 김민희와 김태리의 탁월한 연기 속에서 히데코와 숙희의 로맨스, 코우즈키의 성적 학대를 벗어나는 히데코의 모습 등이 통쾌하게 그려졌다.
 

‘아가씨’ 배리어프리 영상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동시에 고려해 제작됐다. 코우즈키의 저택, 히데코와 숙희의 베드신처럼 시각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부분에서는 일본풍과 고딕 양식이 조화된 저택 분위기부터 히데코와 숙희의 달뜬 분위기 등을 음성으로 전달됐다.
 

또한 영화에서 일본어 대사가 태반을 차지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더빙,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함께 들어갔다. 한국어 대사와 일본어 대사, 상황 설명 대사를 각각 다른 형태의 자막으로 띄웠다. 1부 숙희, 2부 히데코의 시점을 넘나들다가 3부에서 엔딩으로 치닫는 상황 전개에도 음성 설명을 덧붙였다.
 

배리어프리 영상은 전반적으로 시청각장애인들에게 영화 상황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으나,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막이나 더빙 등에 일부 기술적인 문제들이 있었고, 특히 배리어프리 영상 자체가 일부 장애인들에게는 영화를 보는 데 어려움을 줬다.
이들이 어려움을 느꼈던 대표적인 장면은 히데코가 코우즈키와 남성 신사들 앞에서 음란 소설 낭독회를 하는 장면이다. 히데코는 일본어로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능숙하게 드러낸다. 배리어프리 영상에서는 일본어 대사와 한국어 더빙, 화면 해설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이 모든 소리를 듣는 청자에게 혼란을 줬다.
난청이 있는 이지영 씨(가명, 청각·언어장애 4급)의 경우는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영화관 밖으로 30분간 나가있기도 했다. 이 씨는 “약간 들을 수 있는 농인이 영화를 볼 때, 화면 해설과 영화 소리가 섞이면 정신이 없다. 중간에 들어왔을 때도 일본어 음성이 더빙 음성과 섞이니까 보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저시력 장애가 있는 박승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시각장애 3급)도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있는데도 화면 해설이 나오면 몰입이 방해되는 것 같다”라고 털어놓았다.
반면 오로지 청각으로만 영화를 관람했던 김재왕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시각장애 1급, 전맹)는 “음성으로 영화가 과거인지 현재인지, 주인공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해줬다. 화면 해설로 영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라며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청각이 완전히 상실된 이의 경우도 음성 해설을 배제할 수 있어 영화 몰입도가 높았을 수 있으나, 대신 자막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됐다. 영화의 정보가 수화로는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화를 사용하는 일부 청각장애인들은 문자 언어의 문법이 수화와 달라 문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만 이 씨는 “수화 통역은 1인 2역까진 몰라도 1인 다역은 어렵다. 수화 통역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수화로 감정을 표현할 것인지와 같은 것들도 고려해야 한다. 아마 ‘아가씨’처럼 여러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는 영화에 수화 통역을 넣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로 CGV에 있던 배리어프리 영화 안내 데스크.
구로 CGV에 있던 배리어프리 영화 안내 데스크.

배리어프리 영화 기술은 있지만 뒷받침할 법·제도 개선 시급
이처럼 ‘장애인영화관람데이’ 상영 방식은 음성과 자막 해설을 함께 보고 듣는 개방형 상영이다. 당사자들이 영화를 보던 중 겪었던 불편을 고려한다면 음성, 자막 해설을 필요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폐쇄형 상영도 필요해 보인다.
 

현재 기술로 폐쇄형 상영을 구현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난청인들은 높은 주파수로 원음을 바로 전달하는 FM 보청기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시각장애인들도 별도의 화면 해설을 이 기기로 들을 수 있다. 농인들은 자막을 띄워주는 HMD(안경 모니터), HUD(헤드업 디스플레이, 유리에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 안경을 이용할 수 있다. 현재 배리어프리 영화에서 수화 통역을 넣기는 어렵지만, 문장을 수화 문법으로 재구성한 자막을 별도로 HMD 등에 보내면 농인들이 자막을 읽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약 폐쇄형 상영이 구현된다면 굳이 별도로 배리어프리 상영관 없이도 비장애인과 시청각장애인이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 김철환 한농협 기획부장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선택권이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이 편의 제공을 선택하는 폐쇄형으로 가는 게 맞다. 외국 사례를 기반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폐쇄형으로 만드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토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 15조를 보면 스크린 기준 300인 이상 영화상영관에 대해 편의시설, 보조인력, 보조기기를 제공하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어떤 편의시설과 보조기기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부족하다. 보조기기로 보청기가 명시돼 있긴 하나, 그것이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에 필요한 FM 보청기라고 정해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현행법에는 장애인도 볼 수 있는 배리어프리 영상 자체가 영화관의 편의 제공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배리어프리 영상을 위해서는 개방형이라도 자막, 음성 해설이 들어간 영상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폐쇄형이라면 자막, 음성을 보내고 받는 송출 기기와 보조기기가 추가로 갖춰져야 한다.
 

현재로는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 영화관 사업자들이 이런 것들을 굳이 갖출 필요가 없다. 따라서 시청각장애인들이 배리어프리로 대중 영화를 보는 것은 한농협 등 당사자 단체들의 노력과 CGV 등 영화관 사업자의 선의가 있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한 셈이다. 그마저도 보고 싶은 영화와 장소를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는 제약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은 지난 2월 CGV 등 영화관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보게 해달라는 취지로 차별 구제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김 기획부장은 “현재로서는 정부와 업체가 배리어프리 영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어느 정도 기술이 담보되더라도 영화관이 어떤 보조기기를 구비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라며 “지금 법률 구조로서는 이런 것들을 논의하기 힘들다. 국회에서 예산을 확보하고 법률을 바꿔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거 부산국제영화제와 장애인영화제 등에 폐쇄형 배리어프리 기술을 지원한 바 있는 보조기기 업체 대표 또한 “앞으로 영화관에서 음성이나 자막을 송출을 하는 방식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용을 법제화시켜서 송출해야 할 장비나 내용을 의무화하면 영화관 가는 사람들의 선택권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월 시청각장애인들이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을 촉구하며 각 영화관 사업자들 대상으로 차별구제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월 시청각장애인들이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을 촉구하며 각 영화관 사업자들 대상으로 차별구제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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