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①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1]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2] 정태수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 인터뷰 [3]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95년 4월, 장애인들이 한두 명씩 청계천 8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곁으론 온갖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값싸게 사고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죄다 그곳에 모인 듯했다. 삼일아파트 13동 앞 끝자락, 빼곡히 들어선 노점들 틈으로 빈자리가 하나 보인다. 한 장애남성이 그 자리를 파고들어 새 좌판을 깔았다. 장애인 혼자선 장사를 하기가 힘드니 비장애인도 함께 붙어 2인 1조로 장사를 시작했다. 얼마 후 16동과 17동 사이에도 좌판 하나가 들어섰다. 날이 지날수록 장애인들이 연 좌판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13동 앞서부터 20동 앞 사이에는 기존 노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결국 장애인 노점은 자리가 비어 있던 삼일아파트 20동 너머로 뻗어갔다. 21동, 22동, 23동, 24동…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장애인들의 노점은 스무 자리가 넘었다. 청계천 거리의 풍경은 그렇게 날마다 사소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침 한 사내가 조수석이 곁에 딸린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선 새로 들어선 좌판 곳곳을 기웃거린다. 어딘가 거칠어 보였지만, 그래도 굵은 테의 잠자리 안경을 낀 얼굴이 퍽 넉살 좋게 생겼다. 그는 새로 자리를 편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때론 시덥잖은 농담도 오갔다. 부아앙 달려가는 그를 불러 세워놓고선 이런저런 상담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오토바이를 모는 이의 이름은 박흥수, 당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 집행위원장이었다.

94년, 재계가 2%였던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 하자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는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강력히 반발한다. 당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서 ‘결사반대’라는 머리띠를 하고 집회에 참석한 박흥수 열사(가운데). 오른쪽은 정태수 열사. 사진 장애해방열사 단
94년, 재계가 2%였던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 하자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는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강력히 반발한다. 당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서 ‘결사반대’라는 머리띠를 하고 집회에 참석한 박흥수 열사(가운데). 오른쪽은 정태수 열사. 사진 장애해방열사 단
 

“저는 박흥수 열사와 깊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뭐랄까요. 당시 청계천 장애인 노점상들 사이에서 뭔가 큰형 느낌이 난달까요? 막 권위 부리고 명령하고 그런 형 말고 어떤 말이건 다 따뜻하게 잘 품어주는 그런 형 있잖아요. 인상도 참 좋았고 뭔가 신뢰가 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최인기)

박흥수는 본인도 청계천 노상에서 한동안 씨티폰 등을 팔았지만, 자기 장사보다도 다른 노점들 확보 투쟁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당시 이 투쟁에 제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보였다고도 전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돈 없는 장애인들에게 노점이란 스스로 벌어 먹고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91년부터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시행되었지만 장애인들이 노동자가 된다는 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재계는 2%였던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 했다. 저들이 장애인을 법적 기준만큼 고용하지 않아 내야 했던 장애인고용부담금이 기업 경쟁력을 저하한다는 이유였다. 마침 세계화의 기치와 함께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던 신자유주의화의 흐름을 타고서 나온 말이었다. 이 요구안은 장애운동계의 거센 저항 등에 직면하여 금방 철회되긴 했지만, 이것만으론 당연히 장애인들의 안정된 생존권과 노동권을 지켜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90년대 초중반 호황기에도 많은 장애인이 앵벌이로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이 세계의 생산 시스템과 괴리된 채 ‘기생적 소비’만을 이어가야 했다. 조건이 여의치 않아 기생적 소비조차 이어갈 수 없다면 그저 죽는 수밖에. 상황이 이러하니 장애인들이 자립하여 이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서기 위하여 노점은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박흥수는 장애인 노점 확보를 혁명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자본에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 저들의 시스템 안으로 어떻게든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 그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가져올 변혁을 낙관해서였을까? 어쩌면 사실상 무임금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운동가들의 생계를 이어가는데, 노점 운영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흥수형 말 중에서도 이게 참 아직까지도 인상적이에요. 장애인 50명만 제대로 모여 한군데서 생계를 꾸려가고 함께 고민을 나눠갈 수 있다면, 그게 장애인들을 혁명으로 이끈다는 거죠.” (조성남)

그러나 이 비루한 자들의 혁명은 환영받지 못했다. 노점을 하리라 맘먹은 이들은 응당 일상 속에서 싸움꾼이 되어야만 했다. 문민정부 5년 동안에만 3만 5,039개의 노점상이 강제 철거당했고, 5,662개의 손수레가 파괴될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2012년 1017 빈곤철폐의 날 열사추모제 자료집,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 42쪽). 실제로 청계천에 들어선 장애인 노점상들은 시작부터 온갖 적들과 마주쳤다. 삼일아파트 1, 2층에는 상가가 들어서 있었는데, 상점 주인들은 새로 들어선 노점들이 제 장사를 방해한다며 역정을 냈다. 장애인들이 차지한 새 자리 곁에서 이미 노점을 하고 있던 이들에서부터 주말에만 노점을 폈던 ‘떴다방(한자리에 있지 않고 주말이나 장날 등 특정 시기에만 문을 여는 이동형 노점)’들도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었다. 이내 상가 주인들의 민원으로 단속반까지 용역을 대동하고선 밀어닥쳤다. 당시 노점상들은 이들을 뭐 어렵게 표현할 거 없이 ‘깡패새끼들’이라 불렀다.

‘깡패새끼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좌판 곳곳이 뒤집어졌다. 물건들이 거리에 불규칙하니 나뒹굴었고 여기저기서 욕설과 고성이 오갔다. 어떤 깡패는 잔뜩 취한 채 칼을 들고 나타나 이들을 협박했다. 어떤 이는 좌판 위에 드러누워 버텼지만 어떤 이는 맥없이 끌려나갔다. 어떤 이는 제 물건을 강제로 실어 놓은 단속반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 손에 붙잡히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꽉 움켜쥐고선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떤 이는 깡패의 멱살을 잡고서 흔들어도 보았지만 조롱거리만 되었다. 목발을 마구 휘둘러 가며 저를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 양측 모두에서 부상자들도 꽤 나왔다. 어느 여름날 이들은 장시간 도로를 점거하기도 했고, 이 탓에 그렇잖아도 북적거리던 청계천 거리는 한동안 마비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싸움 과정에서 장자추 회원들 중 5명은 구속을 당한다.

박흥수는 언제나 이 싸움의 선봉에 서 있었다. 딱히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선동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곁에 선 동지들을 전선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제일 기억나는 박흥수 선배의 모습은 싸움 때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앞장서겠다!’라고 외치며 몇몇 장애인들과 돌진해 가는 모습이었어요. 상황에 맞게 오토바이를 탔다가 목발을 짚었다 휠체어를 탔다가 하면서 정말로 매번 중요할 때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쭉 앞서 나가는데, 그게 그렇게 힘이 많이 되었지요. ‘불나비’란 노래 있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 노랫말 같더라고요.” (익명 요청)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해가 지고 잠시의 평화가 찾아와도 박흥수의 혁명은 끝나질 않았다. 간혹 홀로 남아 고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밤은 동지들과의 술판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에게 술판이란 곧 조직의 장이었다. 그러니 모여 앉은 이들이 바뀌어도, 박흥수 특유의 썰렁한 ‘아재 개그’들이 대화의 틈새를 자연스레 비집고 들어오던 와중에도, 술자리 주제는 이 질문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장애인 빈민의 힘으로 어떻게 세상을 변혁할 것인가?’ 후배들의 꿈에서부터 신세 한탄이나 가족, 애인 고민 등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들어주고 격려도 잘해주던 그였건만, 투쟁 좀 적당히 하고 형 개인 생활도 좀 챙기라는 후배들의 말만큼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혁명이나 투쟁 같은 거야 뭐 배운 놈들이나 하는 거지, 우리 같이 무식한 놈들이야 먹고사느라 바쁜데 무슨...’ 간혹 등장하던 이런 푸념도 그 앞에선 별 소용이 없었다. 물론 그런 말들도 자상히 잘 들어주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답답할 정도로 확고하게, 그러나 따스하게 전해 왔다.

“흥수형이 이런 말을 했어요. 지식인들이 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혁명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민중이다. 즉 못 배운 당신들이 바로 혁명의 주체라는 거죠.” (이상호)

오히려 민족 해방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라느니 이미 의식화되어 있는 노동자들만이 혁명을 선도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들만 어렵게 떠들어대면서, 빈민, 장애인을 단순히 룸펜 내지 쁘띠 부르주아라 규정하여 운동의 곁가지로 밀어다 놓은 ‘배운 놈들’은 그에게서 욕을 들어먹기 일쑤였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묘하게 거세지던 그의 고집은 술자리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어서야 잠시나마 잠잠해졌다.

생 내내 비루한 곳을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벗어날 생각도 없었던 박흥수의 가슴은 날마다 뜨거웠다. 동지들은 그 열기가 절대 식지 않을 줄만 알았다고 한다. 차갑게 식은 듯 보이던 박흥수의 고독마저도 그가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곧장 사라진 듯했기 때문이다.

“95년이었을 거예요. 청계천 장애인 노점 확보 투쟁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니까. 그때도 박흥수 선배는 혼자 집에 있을 때면 그렇게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형 너무 고독해 보인다, 힘들어 보인다 말하면 그제야 씩 웃으며 ‘너나 힘내 임마. 운동하다 보면 다 그런 거야’ 하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는 거예요. 그럼 또 서로 같이 웃으면서 막 기운이 나더라고요.” (익명 요청)

박흥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해 11월에 닥친 장자추 아암도 지부 소속 이덕인의 죽음에 복수하는 긴 싸움의 여정이 열기를 잃기 전까지는.

▷ ②부 상담치료, 약물치료, 물리치료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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