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②
박흥수는 1958년 5월 15일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다음 해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장애를 입었고 살아가는 내내 가난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진보적인 성향의 성당에 다녔는데, 훗날 그곳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당 사람들과 함께 각종 투쟁들에 연대하고 곳곳에서 주워들은 책도 집어와 읽으면서 저도 몰래 훗날 싸움의 토대를 닦아갔다.

그는 청년기에 뜨거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금방 무너져 내린다. 사랑하던 이의 집안에서 그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장에 뛰어든 이후 “활동가에게 연애나 사랑은 사치”(이상호)라는 생각을 언제나 맘 한 구석에 가지고 있었던 박흥수는 말년 즈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당시 실연의 고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함께 살던 동지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여지껏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은연중에 덧붙였다. 운동에 대한 절망으로 맘이 한껏 약해진 상태에서야, 그것도 잔뜩 취해서야 겨우 튀어나온 말이었다.
박흥수가 싸움꾼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건 88년.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아직도 살아남아 세상을 달구던 시기였다. 장애인운동 역시 이 시대에 열기를 더했다.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장애인운동단체들이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장애인 노동권, 생존권 보장을 위해 필요했던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논의와 함께, 의무조항이 없어 전혀 법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던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논의도 87년 대선 국면부터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장애인운동 단체들은 88년 10월에 열릴 서울장애자올림픽 거부 투쟁에 나선다. 장애자올림픽은 실질적인 장애인 삶의 개선 의지도 없던 정부가 마치 자신들이 장애인을 위하는 체제인 것 마냥 선전하기에 딱 좋은 ‘생색내기용’ 행사였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낸 부활절 헌금을 장애자올림픽 지원금으로 기부하려던 송인학 등 목사들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보람의 집’ 장애인 스무 명이 종로 연동교회를 점거하기도 했고, 이어 4월 16일 명동성당 앞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애인 대중 집회인 ‘장애인 권익촉진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렸다. 울림터 회원 6인은 이날, 바닥에 흰 천을 깔아놓고선 손가락을 째서 나온 피로 ‘노동권리쟁취’라는 붉은 글자를 한 자씩 써 내려갔다.
당시 박흥수는 정립회관 등에서 울림터 회원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몇몇 장애인 단체들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결성된 ‘서울경인장애인연합회’ 야유회 등을 통해 곳곳에 소속된 소위 ‘운동권 장애인들’을 골고루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 자신이 졸업한(목공예과 출신)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과정 동문회 ‘싹틈’ 회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조직을 일굴 기반을 닦아간다. 그가 ‘싹틈’ 회장이 된 동기는 애초부터 불순했다. 그의 목적은 하나, 후배들을 ‘빨갱이’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박흥수 나름의 ‘하방’이었다.
그는 후배들이 모인 자리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묘하게 후배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심어주기 시작한다. 요지는 “장애인이 겪는 억압은 당신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탓”이라는 것이었다. 소위 ‘상담치료’였다. ‘상담치료’는 줄곧 ‘약물치료’로 이어지곤 했는데, 이는 쉽게 말해 술을 먹으며 나누는 교양의 장이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후배들에게 88년 벌어진 각종 투쟁들에 참석할 약속을 끈질기게 받아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술이 깨고 난 뒤 정신을 다잡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후배들도 있었는데, 박흥수는 이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어떻게든 다시 그들을 조직하려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물리치료’라 불렀다.
이 ‘3대 치료’를 거치면서 복지관엔 어느덧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주로 목공예반 학생들과 전산과(컴퓨터반) 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전산과의 소아마비 장애인 정태수는 유난히 눈에 띄는 친구였다. 도대체 어디서 운동물을 먹은 건지는 잘 몰라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녀석이 이상하게 투쟁에 대한 열의가 단단했다. 그는 툭하면 “의연한 산하”를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불러댔다.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이 강산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한편 정태수와 전산과 동기이자 장애를 입기 전엔 대학을 다니기도 했다는 지체장애인 박경석은 어째 좀 석연찮았다. 그는 직업훈련을 받고 얼른 취직해서 엄마에게 첫 봉급을 드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런데 같이 투쟁을 안 할 거라 굳게 맘먹었으면서도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나와서 맛있게 술을 마셔댔다.
“흥수형이랑 친해지면 인생 조지겠구나 싶었지. 빨갱이 테러리스트가 될까 봐. 더군다나 난 조국 수호를 맘 깊이 체화한 해병대 수색대 출신이었잖아. 그런데 나도 장애 입고서 집에만 있다가 5년 만에 세상에 나와서 딱히 갈 데가 없었어. 그러니 흥수형이 술 사주는 데를 열심히 나갈 수밖에. 외로우니까. 그렇게 갈 데가 없어서 흥수형을 만나던 나와 달리 태수는 흥수형과 원래 코드가 잘 맞았어. 그러니 태수를 많이 귀여워했지. 흥수형이 나한텐 그런 말도 했어. 넌 대학물도 먹었었고 그러니까 갈 데도 우리보단 많을 거라고. 언젠가 니는 운동판 밖서 혼자 잘 먹고 잘살 거라고.” (박경석)

복지관 내에서 일정한 지지 세력을 확보한 박흥수는 이내 정태수와 함께 복지관 내 싸움을 조직한다. 당시 서울장애인복지관에서는 학생들의 자활의지를 북돋고 심신 단련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점심시간마다 국민체조를 시켰다. 그동안 학생들은 사실 별생각 없이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운동장에 나가 각자의 장애에 맞게 익숙한 몸짓을 반복했다. 한편 그들이 체조를 하는 동안 복지관 선생들은 먼저 밥을 먹고 나머지 점심시간을 여유롭게 즐겼다. 박흥수는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 정태수와 함께 ‘국민체조 거부투쟁’에 나선다. 학생 스무 명 정도가 이 저항에 동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반란은 조기에 진압당했다. 그렇잖아도 운동권이 되기 무서웠던 박경석이 결전의 날 직전에 이 사실을 평소 자신과 친했던 전산과 선생님에게 일러바쳤던 것이다. 그는 ‘국민체조 거부 투쟁’을 빨갱이 장애인들이 복지관의 좋은 의도도 알아주지 않은 채 괜히 트집을 잡는 거라 생각했다. 결국 국민체조 거부투쟁에 참여한 학생은 고작 정태수를 비롯한 두세 명 뿐이었다. 다행히도 얼마 후, 점심시간마다 이뤄지던 국민체조 의식은 중단되었지만, 박경석은 배신자 취급을 받아 한동안 그들과 어울려 놀 수 없었다.
이렇듯 후배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지만, 박흥수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때부터 복지관 바깥에서 이뤄지는 각종 투쟁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87년 말부터 88년 5월까지 청량리 1동에서 이루어진 ‘신망애재활원’ 건립추진 투쟁도 그중 하나였다. 신망애재활원은 당시 110명가량을 수용한 장애인 거주시설로 교회, 점포 등의 임대사업을 진행하여 고정임대수입을 피수용인들의 생계 보조에 사용할 계획을 세워 놨다. 그러나 청량리 주민들은 동네 땅값이 떨어진다느니, 자녀들 교육에 좋지 않다느니 외쳐대며 이를 저지하려 했고, 이를 장애인 차별이자 지역이기주의로 규정한 장애인들은 주민들에 대항한 싸움에 나섰다. 한 신문기사에는 공사가 주민들에 의해 저지되자 장애인들은 “봉고차와 오토바이 등을 타고 와 북 등을 두드리며 밤새 농성”(장애자 복지회관 “‘짓는다’‘안된다’: 장애자-주민 대치 6개월”, 중앙일보, 1988. 5. 24.)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과 유혈 충돌이 발생하여 입원하는 자들도 나왔다. 물론 지금의 진보적 장애운동이 추진하는 ‘탈시설’, ‘장애인수용시설 폐쇄’의 기조에서 볼 때엔 분명 한계가 있는 투쟁이었을 수 있지만, 당시엔 시설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88년 7월 2일 ‘기만적 장애자올림픽 반대’를 외치며, 장애자 올림픽 조직위를 기습 점거한 청년들 사이에도 박흥수가 있었다. 곧 밀어닥친 경찰들과의 치열한 사투 끝에 그들은 바로 다음 날 정부 담당자들과의 공청회 약속을 받아냈고, 이 공청회는 실제로 7월 27일에 개최된다. 사실 이 공청회를 통해 실질적으로 얻어낸 건 많지 않았지만, 이 투쟁은 박흥수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그는 훗날에도 이 투쟁을 무용담으로 재구성해 술자리에서 여러 번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가 술에 취해 당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면 흡사 무협지 분위기를 풍기기도했다.
하긴 이 기습 점거는 박흥수가 앞으로 10여 년간 시도할 상담치료, 약물치료, 물리치료를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될 만도 했으니 뿌듯할 만도 했다. 하물며 다른 진보 장애인운동 조직들은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대학생 출신인 이들이 주도했지만, 이후 박흥수가 주도한 투쟁들에 함께 선 전사들은 대개가 대학물 한 번 먹어볼 생각조차 못해 본 이들로 채워지지 않았던가. ‘못 배운 기생적 소비계층’은 그렇게 박흥수의 88년 실천들과 함께 처음으로 저항하는 자로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이 세계에 새겨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마침 외로움에 다시 박흥수, 정태수 무리로 되돌아온 박경석의 생각도 박흥수의 끈질긴 ‘약물치료’ 과정에서 점차 변해 가고 있었다.
▷ ③부에서 계속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