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이현준, 최정환, 최옥란 열사의 삶과 죽음
장애해방운동으로 계승되는 열사의 정신
![]() ▲ 최정환 열사 장례식 모습. |
어떤 죽음은 저 생으로 건너가지 않고 여전히 이 땅의 차별과 폭력을 향해 사라지지 않는 외침으로 존재한다. '나'의 장애를 세상이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침으로 이 땅의 모순된 구조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열망들. 그것은 장애해방운동이 계승하는 정신의 뿌리가 되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한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약자를 위한 '귀'를 열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소수자의 외침은 사라지지 않고 낮과 밤으로 이 세상의 변화를 촉구한다.
서초구청 단속반의 살인적인 폭행과 모욕 속에서 반민중적 빈민정책에 항의하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한 최정환 열사. 1989년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등 양대법안 쟁취 단식농성과 인천 아암도 노점 투쟁, 최정환·이덕인 열사 투쟁 등 장애인운동을 이끌었던 정태수 열사. 빈곤층 장애여성으로서 겪은 '폭력'을 온몸으로 저항했던 최옥란 열사. 근육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근이양증을 앓으면서도 중증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 존엄성과 권리를 부르짖었던 이현준 열사. 석암재단생활인인권쟁취를위한비상대책위원회(아래 석암비대위)에서 활동하면서 시설 퇴소 후에도 자립생활을 위해 투쟁했던 이인석 열사.
다른 달보다 유난히 많은 3월 장애해방열사들의 함성이 봄바람을 타고 울려 퍼진다.
■ 최정환 열사(1958~1995년. 기일 3월 21일)
어린 시절 보육원과 애덕의 집 등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기도 했던 최정환 열사는 85년에 친부를 찾았으나, 아버지 쪽에서 친자확인을 거부해 혼자 살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친부가 존재해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할 수 없어 열사는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94년 방배역 부근에서 대중가요 테이프 노점상을 시작해 생활을 이어나가던 열사는 95년 서초구청 단속반의 살인적인 폭행으로 전치 8주의 부상을 당했다. 이후 6개월 뒤 열사는 다시 구청 단속반에 스피커와 배터리를 압수당해 이를 돌려달라고 찾아간 구청에서 심한 모욕을 당하고 생계를 이어가던 물품은 돌려받지 못한다. 결국 열사는 1995년 3월 8일 반민중적 빈민정책에 항의하며 서초구청에서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전신에 88%의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열사는 약자를 끊임없이 짓밟던 이 사회를 향해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1995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열사는 용인 가톨릭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 ▲정태수 열사.(맨 오른쪽) |
■ 정태수 열사(1968~2002년. 기일 3월 3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전산과'를 수료한 정태수 열사는 복지관 측이 수료생들의 취업률을 자체 조사해 실은 소식지를 압수하자 이에 반발해 동료와 함께 15일간 삭발투쟁을 하면서 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이어 1989년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등 양대법안 쟁취를 위해 동료활동가들과 함께 12일간의 단식농성을 진행해 양대법안 제·개정의 성과를 얻었고, 90년대 초 정립회관 비리척결 점거농성, 95년 최정환 열사투쟁, 인천 아암도 노점 투쟁, 이덕인 열사 투쟁 등을 주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열사는 이 과정에서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열사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각 지부를 순회하며 장애인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장애인고용촉진 걷기대회'를 주도했으며, 장애인활동가 양성을 위한 장애인청년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열사는 2002년 3월 초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 도중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 등의 증세로 숨을 거두었다. 열사는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묻혀 있다.
![]() ▲ 이동권 투쟁에 함께한 최옥란 열사. |
■ 최옥란 열사(1966~2002년. 기일 3월 26일)
"저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민, 사회, 장애인 단체에 부탁드립니다. 비록 지금은 저 혼자 텐트농성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 하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이 저의 투쟁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 '2001년 최옥란 열사의 명동성당 농성 결의문' 중에서
최옥란 열사는 1980년대 말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활동을 시작으로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투쟁, 장애인운동청년연합과 정립회관 정상화를 위한 공대위 등에 참여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 당시 철로를 점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수급권과 의료보호를 받기 위해 노점마저 접어야만 했던 열사는 최저 생계를 보장한다는 미명 아래 가난한 자를 가난의 굴레에 묶어놓고 최소한의 생계조차 보장하지 않는 현실에 맞서 명동성당 농성을 진행했으며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집에 수급비를 반납하기도 했다.
최옥란 열사의 삶은 극빈곤층의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가 오히려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우리나라의 복지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열사는 벽제 봉안당에 안치돼 있다.
![]() ▲이현준 열사. |
■ 이현준 열사(1965~2005년. 기일 3월 16일)
"노부모님이 더 이상을 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한 독립이었지만, 운도 따랐고 주위의 도움도 적절히 받았다. 물론 캐어비와 보장구 구입비만으로도 1년 월급의 대부분인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생활은 적잖은 위험을 동반하고 있었다. 빗길 고가도로에서 우비가 바퀴에 걸려 생사절명의 위기를 맞았고 웅덩이에 휠체어가 엎어진 일, 저체온 증세와 가래로 단말마의 위기를 넘겼던 일, 혼자 방에 있다가 몸이 기울어 위기를 넘긴 일 등 여러 차례 목숨이 오고가는 일들을 겪어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하고도 다음날은 멀쩡하게 출근하곤 해, 아마도 나의 위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 -이현준 '내 잠 좀 돌려도~'中
근이양증을 앓았던 이현준 열사는 90년대 초 장애를 시혜와 동정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거부하고 정부정책의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글을 '장애인복지통신-나누리'에서 게재하면서 다양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 평론부문에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함께걸음' 기자로 활동하면서 글을 통해 장애인의 삶을 풀어내고 권리를 요구했다.
이후 열사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에서 활동하며 장애인기초연금제, 성년후견인제도, 장애인콜택시, 장애비하용어 정리, 활동보조인제도, 자립생활제도 도입 등 장애인 정책제시와 실현을 요구했다.

열사는 독립생활을 실천하다가 활동보조인이 없는 밤에 호흡곤란 등의 증세로 사망했다. 중증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열망하던 이현준 열사에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고 장애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열사는 화장 후 강화도 외포리 바다에 뿌려졌다.
■ 이인석 열사(1948~2009년. 기일 3월 21일)
이인석 열사는 석암재단이 운영하는 베데스다요양원(현 향유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시설 내 비리 문제와 맞서 싸우며 탈시설 운동을 전개했다. 시설 퇴소 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운동을 이어가며 석암비대위 활동을 지속했다.
열사는 탈시설 이외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인권위 축소 행안부 규탄 결의대회'를 비롯해 각종 집회와 기자회견에 참석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열사는 벽제 봉안당에 안치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