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 출간과 함께 일곱 번의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몇 년 동안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 작게나마 의미가 있는 글을 써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나이 때 저와 비할 수 없이 훌륭한 글을 썼던 사람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 안에서 맴도는, 세상에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되는 글을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 역시 분명 어느 시점에 그런 글을 쓰게 될 텐데요.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년 전 이맘때, 첫 연구년을 앞두고 존경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답했다.

“교수님이 망가진다면, 그건 아마도 공부를 멈춰서일 거예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과 질병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로서, 내 공부의 한 뿌리는 통계학에 또 다른 한 뿌리는 인문사회과학에 두고 있었다. 2019년 연구년 한 해 동안 이 두 분야에서 모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공부에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는 내가 사용하는 통계 기법을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난 명백히 정체되어 있었다. 2011년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등장하거나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분석 기법 중 무엇도 내 연구 논문에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데이터 사이언스의 방법론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예측하는 데 있어 탁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머신러닝은 그 뒤처진 시간을 따라잡기에 적절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장애의 역사』(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표지 이미지. 제공 동아시아
『장애의 역사』(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표지 이미지. 제공 동아시아

그렇다면 또 다른 한 뿌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집필하면서 한 번도 장애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소수자 건강을 연구하는 사회역학자로서 장애에 관해 관심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관련해서 나는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고 그런 수준에서는 연구자로서 글을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할수록 장애인의 삶과 장애라는 개념이 소수자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장애 인권 운동은 ‘인간의 경계’에 대해 가장 급진적으로 질문하고 몸으로 증언하며 부딪쳐 왔다.

『장애의 역사』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번역을 무사히 해내고 나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언어가 조금은 넓어지고, 조금 더 사회적 약자에게 무해한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국제학술지 논문을 사랑하는 한국 대학의 평가 시스템에서 번역은 노력에 상응하는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는 영역이 아니었고, 누구도 내게 이 책을 번역하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책이 다루던 내용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외적인 조건만을 따지면 이 책을 번역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계속 의도적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관련 내용을 공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다녔다.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인가를 겪고 나면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헬렌 켈러가 다녔던 퍼킨스맹인학교와 세계 최초의 농인 고등교육 기관인 갈로뎃대학교를 찾아갔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갈 때마다 관련 내용들을 먼저 찾았다. 앞으로 일곱 번에 걸쳐 사진과 함께 정리할 간략한 방문기는 그 경험에 대한 짧은 기록들이다.

그 방문기를 공유하기에 앞서, 『장애의 역사』를 번역하며 느꼈던 점을 적은 역자 서문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2020년 11월이 되어서야 투고하는 차별 경험에 대한 머신러닝 논문이 학술지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그리고 같은 달 출판된 『장애의 역사』가 독자들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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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역사』 옮긴이의 말

사회적 약자의 몸과 건강을 연구하며 ‘인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종종 만났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인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는 어떤 몸을 일하고 투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몸으로 인정하고, 어떤 몸을 그 범주에서 배제하는가. 장애인만이 아니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의 건강을 연구할 때에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2019년 보스턴에서 연구년을 보내며 그 답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이 책을 만났다.

킴 닐슨은 『장애의 역사』에서 장애를 렌즈 삼아 미국의 역사를 재배치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실험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인간의 범주에서 밀려났던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장애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온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몸(Able-Bodiedness)’을 정의하고 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몸을 결핍된 혹은 퇴행적인 몸이라고 규정해온 권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럽인이 오기 전 북아메리카에서 토착민이 사용하던 지역언어의 수는 2,000개가 넘었고, 다른 부족을 만날 때면 그들은 상시적으로 수어를 사용했다. 그런 사회에서 농인은 청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토착민 공동체에서 인간의 가치는 개인의 독자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규정되었다. 다른 이들의 노동과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역할을 하는 한 농인은 유의미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맹인도, 한쪽 팔만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1장).

그러나 이후 북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정착하고 노예제 사회가 되면서, 그들은 능력 있는 몸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의 경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어떤 흑인들은 사망 시 보험금이 그들의 몸값보다 높다는 이유로 바다 상어의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운 좋게 노예선에서 살아남아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경우에도, 그들은 ‘폐품 노예’로 불리며 헐값에 처분되거나 버려졌다(3장).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만이 아니다. 불과 100여 년 전 미국의 대법원은 ‘퇴행적’인 몸을 가졌다고 분류된 인지장애나 뇌전증을 가진 사람들이 강제 단종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들은 독재를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해서 적합하지 않은 몸을 가진 시민의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6장).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지워졌다.

1864년 설립된 농인을 위한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 갈로뎃대학교(Gallaudet University)에서. ⓒ김승섭
1864년 설립된 농인을 위한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 갈로뎃대학교(Gallaudet University)에서. ⓒ김승섭

장애인들은 자신을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전시당하는 프릭쇼에서조차 동료들과 공동체를 만들며 저항의 근거지를 만들어나갔고,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차별과 권리의 언어로 스스로의 경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애 인권 운동은 비장애중심주의만이 아니라 성차별주의, 인종주의와도 맞서며 자신의 몸을 되찾아갔다. 그 이야기는 농인 학교의 총장이 청인이었던 124년의 과거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진행한 점거투쟁으로 농인 총장을 탄생시킨 갈로뎃 대학의 사례에 이른다(8장).

능력 있는 몸에 대한 규정은 오늘날 비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흑인은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그들 자신을 위해서 노예로 사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하거나(4장),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야 하고 국가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5장). 사회적 약자의 몸이 온전한 시민이 되기에 충분치 않다는 주장은 인간을 위계화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렇게 ‘능력 있는 몸’은 정치, 경제, 법, 문화를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고, 그 불평등은 인간의 몸에 다시 질병과 상처를 남겼다. 얼핏 능력주의를 뜻하는 듯 보이는 ‘Ableism’이 장애인 차별을 뜻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책을 번역하는 내내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 위해 논문을 읽고 동료들과 상의하며 씨름했다. 처음에는 ‘Deafness’와 ‘Blindness’를 ‘청각장애’, ‘시각장애’라고 번역했었지만, 이후 장애인 당사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과 ‘맹’이라는 단어로 바꿨다. ‘Ableism’은 고민 끝에 ‘비장애중심주의’로 번역했다. 장애인의 삶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서술하려 했던 저자 닐슨의 집필 의도를 생각하면,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문제는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와 같은 표현이었다. 그것은 맹인이 배제된 비장애중심주의적 표현이었다. 세계의 다수가 맹인이었다면, 그런 표현이 쓰일 리 없었다. ‘Perspective’를 번역하기 위해 이 책에서 결국 사용했던 관점(觀點)이나 시각(視角)이라는 표현도 다르지 않았다. 적절한 번역어를 찾다가 좌절하곤 했다. 의심하지 않고 바라보면 삶의 모든 자리에 당연한 듯 존재했던 비장애중심주의적 언어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꼭 필요한 단어들이 내가 가진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종종 그 현실과 타협했다.

역사를 다룬 이 책에서 닐슨은 과거 장애인을 비하하는 데 거리낌이 없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당대의 용어를 인용하며 서술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적절히 분석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 그 시기 사용했던 용어를 쓰는 일은 필수적이다. 한국어 번역도 그러한 의도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6장의 제목인 ‘저능아는 삼대로 충분하다’와 같은 문장은 그 자체로 특정 집단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지만, 1920년대 우생학이 지배하던 미국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말인지라 이처럼 번역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또 8장에서는 정신지체(Mental Retardation)라는 발달장애를 비하하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발달장애 운동의 역사에서 그 용어와 부딪치며 결국 정신지체라는 용어가 단체 이름에서 빠지게 되는 사건을 설명해야 했기에 그대로 사용했다.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반이 교육받았던 퍼킨스맹인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에서. ⓒ김승섭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반이 교육받았던 퍼킨스맹인학교(Perkins School for the Blind)에서. ⓒ김승섭

이 책은 장애학과 미국의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쓰인 책이었다. 책이 다루는 내용은 소수자 건강을 연구하는 보건학자, 사회역학자로서 그 중요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내 실력은 그 예민한 세계를 번역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을 두고 몇 번을 고쳐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문장이 나오지 않아 괴로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나 혼자서는 닿을 수 없었을 문장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책의 저자인 킴 닐슨 교수님과 미팅을 통해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미묘한 문화적 맥락을 알 수 없었더라면, 몇몇 문장은 번역자조차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한국어로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장애학을 연구하시는 김도현 선생님과 상의한 덕분에 낙인찍힌 장애의 역사를 서술하면서도 장애인 당사자분들께 무례하지 않은 번역의 길을 조금이나마 찾아갈 수 있었다. 고려대에서 19세기 미국문학을 가르치시는 영문학자 윤조원 교수님과의 두 차례에 걸친 회의가 아니었다면 이 책의 몇몇 문장이 어찌 되었을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물론 모든 최종 선택은 번역자인 내가 해야 했고, 그 결과물의 부족함은 당연히 나의 몫이다. 다만, 혹시라도 책을 읽다가 의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읽기에 불편하지 않은 어떤 문장이 발견된다면, 장담하건대 그건 세 분의 흔적일 것이다.

작년 5월에 시작한 번역을 마무리하는 데 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해준 동아시아 출판사의 조유나 편집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차별은 공기와 같아 기득권에게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 번역하며 책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했다. 우리 모두는 상처받고 다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인 동시에 그 약함을 응시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간의 존엄은 독립(in-dependent)보다도 상호의존(inter-dependent)을 통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실은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힘이라는 사실을 그 대화에서 배웠다.

당신도 그 대화에 함께했으면 한다.

필자 소개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장애의 역사』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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