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생물학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강력한 전략은 장애가 바로 사회적 억압의 산물이라는 명제 위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회과학의 연구결과들은 그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장애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장애가 바로 사회적 억압의 산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전략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과학적 기초로서도 중요한 명제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기만 할까? 장애, 더 넓게는 인간의 몸에 관한 각종 지식은 분명히 사회적인 근거가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진화론에 기초한 새로운 심리학, 생물학 이론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증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우생학으로 변질된 이후 사회과학의 집중포화를 맞고 쇠락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이른바 ‘신종합’을 완성하고 새롭게 탄생한다. 이에 기원을 둔 대표적인 학문이 바로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었다.
새로운 종합을 통해 더욱 정교해진 다윈의 진화론은, 특히 인간의 행위에 있어 유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화론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게 이어지도록 하려는 ‘유전자의 이익’에 맞게 코드화되어 있으며,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의 중요한 단위는 바로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그 안의 유전자라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의 원조격이라 할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닭은 달걀(유전자)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라고까지 말한다. 즉 인간의 몸은 인간의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건강하게 양육해야 비로소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아이를 양육하면서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유전자의 이익을 고려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어머니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 다만 그렇게 아이를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하는 성향이 있는 인류 역사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기르는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던 ‘어머니’들보다 대개 성공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는 본성이 현재의 인간 어머니들에게서 다수 발견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진화론의 핵심 전제는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보는지에 대해서 사회마다 다른 시각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마른 몸과 살찐 몸 가운데서 어떤 몸을 아름답게 보는가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어떠한 사회에서도 허리와 엉덩이의 비율은 날씬하든 뚱뚱하든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밝히는 식이다. 그리고 대칭과 균형이 잡힌 몸, 하얗고 배열이 고른 치아 등도 대부분 사회에서 공통된 아름다움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미디어와 자본주의가 인간의 몸을 상품화하는 사회나, 세상과 격리된 인도네시아 정글 속의 부족사회나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생후 3개월 된 아이들도 이러한 몸을 바라볼 때 동공이 더 커진다. 진화심리학자들은 특정한 몸의 비율과 대칭적인 몸 등이 공통적으로 아름다움의 요소로 선호되는 까닭은, 그러한 몸이 기생충에 강한 면역을 가졌고 따라서 건강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에 적절한 몸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것이 ‘유전자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진화심리학의 연구결과들은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근거에 타격을 주는 것임이 틀림없다. 예컨대 장애가 있는 몸은 대체로 대칭과 균형이 맞지 않고, 아이에게 유전적으로 장애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이 연애나 성생활은 물론 일상 전반에서 소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즉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은 장애인을 억압하는 경제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온갖 미디어가 직립보행하는 특정한 몸매를 가진 여남의 비장애 중심적 사랑관과 미적 기준을 퍼뜨리기 때문이라기보다(물론 이것들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몸 자체는 유전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이런 결론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물론 진화심리학의 연구결과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것들은 여전히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사회학적인 풍부한 연구결과들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서울의 대형 서점만 가도 발에 차일 정도로 널려 있는 진화론 관련 책들은,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새로운 다윈주의의 시대가 우리에게 도래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질문은 이것이다. 진화론의 인간 이해 또한 오류를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만약 명백히 옳은 부분들도 포함하고 있다면 어떨까? 인간은 정말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에 불과하며, 인간의 몸에 대한 시각은 유전자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전달자로서의 가치를 중심으로 평가받는 것이 명백한 사실로서 후대에도 인정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가져서 비뚤비뚤하고 불균형한 신체를 가진 나 원영은, ‘지구는 돈다’고 주장하던 지동설의 갈릴레오를 애써 무시했던 과거 교황청처럼 그 높은 이론적 정합성과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을 강력하게 거부해야 할 뿐인가? 진화론은 이처럼 장애인에게 언제나 우울한 결론들의 근거만을 제시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비장애/서구/백인/남성 중심의 과학이라며 부정하는 것뿐인가? 분명히 우리는 진화론에 내재해 있을 과학적 편견들을 의심해야 하며 과거 우생학의 공포를 늘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장애를 설명하는 더 나은 입장들을 탐색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나는 바로 이 ‘휠체어 위에서’ 진화론 그 자체에 대하여 우선 묻고자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스티븐 핑커, 2007,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김한영 역, 소소
울리히 렌츠, 2008, 『아름다움의 과학』, 박승재 역, 프로네시스
에드워드, O 윌슨, 1997, 『사회생물학』, 이병훈 역, 민음사
지체장애인. 올해가 20대의 마지막. 지하생활자로 15년간 살았고 세상으로 나온지 올해가 지나면 15년이 된다. 한국사회의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서 대학을 지나 대학원까지 왔다. 관심사는 연극, 장애학, 생물학, 드라마, 소설, 진화론 등 다양하다. 까칠한 말투로 종종 비난을 듣는다.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자연과학도로 진화론이 말하는 사실들과 대면하면서, 장애인의 몸을 긍정하는 것이 가능할지 항상 궁금해왔습니다. 3부작의 마지막 글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