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이용 입주민이 계단 경사로 설치 요구하자
주민 찬반투표에 부쳐 부결시킨 시흥 신한토탈아파트
장애인 당사자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요구 끝에
‘후문 경사로 공사 결정’ 공고문 내걸어

장애인 입주민의 경사로 설치 건의를 주민 찬반투표에 부쳐 끝내 부결시켰던 아파트가 경사로를 설치하기로 했다. 장애인 당사자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가 약 1년간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성과다.

신한토탈아파트 후문 계단. 경사가 높지 않지만 휠체어나 유아차는 지나갈 수 없다. 사진 하민지
신한토탈아파트 후문 계단. 경사가 높지 않지만 휠체어나 유아차는 지나갈 수 없다. 사진 하민지

공계진 씨는 작년 5월에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신한토탈아파트로 이사했다. 주로 목발을 이용하고 필요할 경우 휠체어를 타는 공 씨는 아파트를 둘러보다가 후문에 계단만 있고 경사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 씨는 그 즉시 아파트 측에 경사로 설치를 건의했으나 돌아온 건 ‘주민투표’였다. 장애인 이동권을 투표에 부친 것이다. ‘경사로 설치 찬반투표’ 과정 중 아파트 측이 투표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주민이 투표하려고 할 때 투표관리위원이 ‘경사로를 설치하면 돈이 많이 든다’고 말하는 식이다. 투표 결과, 240세대 중 반대 130세대, 찬성 24세대, 기권 86세대로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경사로 설치는 무산됐다.

이후 공 씨는 시흥시청, 시흥시의회 등에 문의하고 여러 언론사에 제보하며 이 문제를 알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19일에는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다.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라며 아파트 측을 규탄했다.

아파트 측은 처음에는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공 씨가 “해주세요”라고 하며 부드러운 태도로 부탁해야 설치해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이후 비마이너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문제가 보도되면서 비판적 여론이 들끓었다. 시흥시청과 시흥시의회에서도 “장애인 편의시설은 조건부가 아니다”라며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보이자, 아파트 측은 “올해 가을까지 설치하겠다”라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지난달 25일에 게재된 공고문. ‘제 1호: 장기수선계획 검토 및 조정안 건. 장기수선계획 검토 시 부출입구(후문) 공사 장기수선계획 조정하여 공사 진행하기로 함’, ‘제 3호: 기타 논의 사항. 후문 경사로 공사, 시청 건축과 질의내용. 시청 건축과 공문대로 이행하고 공사비 과다로 장기수선계획 조정하여 공사하기로 함.’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공계진
지난달 25일에 게재된 공고문. ‘제 1호: 장기수선계획 검토 및 조정안 건. 장기수선계획 검토 시 부출입구(후문) 공사 장기수선계획 조정하여 공사 진행하기로 함’, ‘제 3호: 기타 논의 사항. 후문 경사로 공사, 시청 건축과 질의내용. 시청 건축과 공문대로 이행하고 공사비 과다로 장기수선계획 조정하여 공사하기로 함.’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공계진

지난달 25일, 아파트에 게재된 공고문에 따르면 아파트 측은 실제로 경사로를 설치할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공고문에는 ‘시청 건축과 시정 공문대로 이행하고 공사비 과다로 장기수선 계획 조정하여 공사하기로 함’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 아파트는 주민으로부터 매달 ‘장기수선충당금’을 걷는다. 이는 아파트의 여러 시설이 오래돼 낡았을 때 아파트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수리하는 비용을 일컫는다. 공문 내용은 주민에게서 이 금액을 걷은 후 경사로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아파트 측은 처음엔 “공 씨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파트에 기여한 게 없기 때문에 경사로를 설치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 씨의 경사로 설치 요구는 정당하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4조에 따르면 아파트 주 출입구 접근로, 주 출입구 높이 차이 제거 등의 편의시설 설치는 의무사항이다. 시청과 시의회도 이 법에 따라 경사로 설치를 권고했다.

공계진 씨는 지난달 19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아파트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하민지
공계진 씨는 지난달 19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아파트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하민지

공 씨는 8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처음에 경사로 설치를 요구했을 때 바로 진행했다면 좋았을 텐데 왜 이제야 설치를 결정한 건지 아쉽다. 하지만 잘된 일이다. 나뿐 아니라 이 아파트에 사는 교통약자들 모두 후문의 경사로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시흥시민이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시흥이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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