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공보물부터 투표소까지
모든 과정에서 장애인은 참정권 박탈
장애인들 “국가 상대로 소송하고 공직선거법 개정운동 할 것”

선거공보물부터 후보자 토론회와 투표소까지, 선거의 모든 과정에서 참정권을 침해당한 장애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한국피플퍼스트 등 6개 장애인권단체로 구성된 ‘장애인 참정권 확보를 위한 대응팀(아래 대응팀)’은 10일 유권자의 날에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구제조치를 법원에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활동가가 커다란 피켓을 들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피켓에는 ‘후보자 사진, 정당 로고가 들어간 투표용지 만들기 서명운동. 그림 투표용지를 사용하면 누구나 쉽게 투표할 수 있습니다. 공직선거법을 바꾸자! 그림 투표용지 제공하라!’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한 활동가가 커다란 피켓을 들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피켓에는 ‘후보자 사진, 정당 로고가 들어간 투표용지 만들기 서명운동. 그림 투표용지를 사용하면 누구나 쉽게 투표할 수 있습니다. 공직선거법을 바꾸자! 그림 투표용지 제공하라!’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시각장애인, 발달장애인은 접하기 힘든 선거공보물

장애인 참정권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발달장애인, 신체장애인 등은 선거 전 과정에서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선거공보물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공직선거법 65조 4항에서는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책자형 선거공보물 면수의 두 배 이내에서 작성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장애계는 ‘두 배 이내’라는 규정이 시각장애인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송을 대리하는 이수연 법조공익모임 나우 변호사는 “묵자를 점자로 변환하면 분량이 세 배가량 늘어난다.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자형 선거공보물 때문에 시각장애인은 각 후보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텍스트로 된 후보자 정보를 USB에 담아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대응팀은 “USB 제공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지난 4·7 보궐선거의 경우 서울시장 후보 중 단 4명만 USB를 제공했다.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정보지원을 못 받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수연 변호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수연 변호사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공직선거법에서 고려조차 되지 않는 장애유형도 있다. 선거공보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공직선거법 65조에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의제공만 명시돼 있을 뿐, 발달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선거공보물 제작·제공에 관해서는 어떤 규정도 없다.

청각장애인은 선거 관련 방송에서 수어통역 화면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참정권을 침해당한다. 대응팀은 “수어통역사 한 명이 여러 후보자를 통역한다. 지난 보궐선거 토론회에서는 사회자가 후보들을 향해 ‘동시에 말하면 전달이 안 됩니다’라고 말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청각장애인은 제대로 된 선거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가오나시 분장을 한 활동가가 ‘후보자 사진 정당 로고 넓은 기표칸 그림 투표용지 제작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가오나시 분장을 한 활동가가 ‘후보자 사진 정당 로고 넓은 기표칸 그림 투표용지 제작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지난해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지원’ 선거지침 삭제한 선관위

발달장애인은 투표소에서 조력자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공직선거법 157조 6항에 따르면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은 투표소에서 자신이 지명한 2인에게 투표를 보조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은 해당 조항의 분류에 포함되지 않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장애계의 끈질긴 문제제기 끝에, 2016년경 중앙선관위는 선거사무지침에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문구를 넣어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지난해 이 선거사무지침이 어떠한 근거도 없이 삭제되면서 발달장애인은 더는 어떠한 편의제공도 받지 못하게 됐다. 

중앙선관위 공보과 관계자는 10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공직선거법에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만 투표 시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발달장애인이 시각장애나 신체장애가 있으면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표기한 건데 해석상 오해가 많아 삭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발달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신체상으로 기표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사람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1999년 대법원 판례도 있다. 모든 지침은 현행법과 기존 판례를 따른다. 법을 뛰어넘는 지침은 만들 수 없다는 게 원칙이다. 공직선거법이 개정돼야 하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9일, 투표 시 발달장애인이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한 조치가 차별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는 이에 관해 아직 아무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데, 투표용지조차 발달장애인이 인지하기 어렵게 돼 있다. 대응팀은 “선거 때마다 장애인 참정권을 모니터링하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림 투표용지를 도입해 달라고 10년간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성토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선거 시 후보자 이름 옆에 정당로고를 삽입한다. 케냐에서는 후보자 사진까지 넣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투표용지를 제공한다. 이수연 변호사는 “이처럼 발달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조하는 사례가 있는데도 아무 대안이 없다는 건 명백한 차별”이라고 강조했다.

케냐의 투표용지. 정당로고와 후보자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사진 케냐 독립선거관리위원회(IEBC)
케냐의 투표용지. 정당로고와 후보자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사진 케냐 독립선거관리위원회(IEBC)

휠체어를 이용하는 신체장애인은 투표소에 갈 수조차 없다. 대응팀은 “2018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투표소를 1층 또는 승강기 등 편의시설이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하지만 ‘원활한 투표관리를 위하여 적절한 장소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라는 예외조항 때문에 투표소 접근권이 온전히 확보되지 않고 있다.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차별 사례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김수원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투표소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 활동가는 “이번 보궐선거 때, 평소에 자주 가는 카페가 투표소로 지정됐다. 하지만 그 카페 입구에 계단이 있었다. 1층이었지만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은 거기서 투표할 수 없었다. 그 공간을 투표소로 지정할 거였으면 경사로를 설치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활동가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권단체 활동가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활동가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장애인들 “국가 상대로 소송하고 공직선거법 개정운동할 것”

장애인차별금지법 48조에서는 차별을 당한 피해자가 법원에 구제조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응팀은 소송대리인단과 함께 빠른 시일 내에 소장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고는 대한민국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 47조에서는 입증책임이 차별을 한 쪽과 당한 쪽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침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대응팀은 소송과 더불어 공직선거법 개정운동도 추진할 예정이다. △시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선거공보물 제공 △방송연설이나 광고 시 자막과 수어통역 화면 제공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림 투표용지 제공 △투표 시 장애유형 한정하지 않고 조력자 도움 제공 △투표소 접근성 예외 없이 확보 등을 골자로 공직선거법의 여러 문제점을 알릴 계획이다.

대응팀은 “작년 국회의원 선거 때 행정안전부에서는 한 표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해 투표를 독려하는 홍보를 한 바 있다. 향후 4년간 국회 심의예산을 유권자 수로 나눠 투표가치를 계산한 결과, 한 표에 4,700만 원이라고 산정했다. 장애인 표를 사표로 만든 중앙선관위는 몇백 억을 날린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성토했다.

김대범 활동가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활동가가 든 피켓에는 ‘유권자 한 표 4,700만 원. 장애인 사표비용은?’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김대범 활동가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활동가가 든 피켓에는 ‘유권자 한 표 4,700만 원. 장애인 사표비용은?’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김대범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는 “‘좋은 정치를 지향하고 국민과 함께하며 미래를 열어나간다’ 이게 중앙선관위 비전이다. 중앙선관위가 말하는 ‘국민’에 장애인은 없다. 장애인은 그동안 투표소에 가지 못하고 투표용지에 도장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 2018년에 청와대 인근 삼청동 주민센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우리의 요구를 말하기도 했지만 바뀐 게 없다”며 정부를 규탄했다.

한국피플퍼스트와 장추련은 이번 주 내로 중앙선관위와 면담하고 장애인 참정권 침해 문제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끝낸 후 한 표당 '4,700만 원'의 가치가 있는 장애인의 표가 사표가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한 활동가가 5만원 권을 떠오르게 하는 돈 모양의 종이를 허공에 흩뿌리고 있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끝낸 후 한 표당 '4,700만 원'의 가치가 있는 장애인의 표가 사표가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한 활동가가 5만원 권을 떠오르게 하는 돈 모양의 종이를 허공에 흩뿌리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바닥에 나뒹구는 돈 모양의 종이들. 
바닥에 나뒹구는 돈 모양의 종이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선관위가 장애인을 신경 안 쓰는 겁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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