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41년, 장애인은 시설과 집에만 있었다
“군사독재에 저항한 모습과 우리 싸움이 뭐가 다른가”

활동가들은 518번 버스 두 대와 419번, 95번, 55번 버스를 한 대씩 점거하고 도로에 커다란 현수막을 펼쳤다. 버스 위에 올라가 현수막을 펼치는 활동가도 있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은 518번 버스 두 대와 419번, 95번, 55번 버스를 한 대씩 점거하고 도로에 커다란 현수막을 펼쳤다. 버스 위에 올라가 현수막을 펼치는 활동가도 있다. 사진 하민지
점거현장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 활동가들이 바닥에 펼친 현수막에는 ‘생계급여,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하라’, ‘중증장애인 노동권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점거현장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 활동가들이 바닥에 펼친 현수막에는 ‘생계급여,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하라’, ‘중증장애인 노동권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들이 5·18 광주항쟁 41주년을 맞아 광주시 동구 금남로사거리를 점거하며 “지난 41년간 장애인에게 민주주의는 없었다”고 외쳤다.

18일 오후 2시 20분경,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소속 장애인활동가 50여 명이 금남로사거리에 진입하는 버스 다섯 대를 점거했다. 금남로는 광주항쟁 최후 항거지였던 옛 전남도청 건물 앞에 있는 도로다.

버스 위에 올라간 활동가가 미얀마 투쟁을 지지하는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버스 위에 올라간 활동가가 미얀마 투쟁을 지지하는 손가락 모양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탈 수 없는 ‘차별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현수막을 펼쳤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로 촉발된 장애인이동권 투쟁의 모습을 재연한 것이다.

또한 사거리에 “생계급여·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하라”, “중증장애인 노동권 보장하라” 등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구안이 적힌 대형현수막을 펼쳐 보였다.

버스에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경찰이 과잉진압해 박 상임공동대표의 목이 쇠사슬에 졸리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 하민지
버스에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경찰이 과잉진압해 박 상임공동대표의 목이 쇠사슬에 졸리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 하민지

이 과정에서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쇠사슬로 버스와 자신의 신체를 묶자 경찰이 달려들어 이를 저지하면서 충돌이 일기도 했다.

박 상임공동대표는 “우리가 멈춘 버스는 ‘차별버스’다. 보시다시피 이 버스엔 계단이 있어서 장애인은 탈 수가 없다”면서 “헌법에는 법 앞에 누구든 평등하고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헌법에 위배된 ‘차별버스’가 왜 아직도 돌아다니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20년 전부터 했다”고 외쳤다. 이어 “2006년 정부가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을 만든 후 2011년까지 저상버스 31%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10년 전 약속이 지금도 안 지켜지고 있다”고 규탄했다. 현재 전국 저상버스 도입률은 약 28%다.

또한 박 상임공동대표가 목에 쇠사슬을 걸자 달려든 경찰을 향해 “목에 쇠사슬 묶는 게 위험한가”라고 물으며 “지하철 타기 위해 리프트 타다가 장애인이 떨어져 죽는 건 안 위험한가. 20년을 기다렸는데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지 정부는 답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절규했다.

그는 “41년 전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광주와 현재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외치는 미얀마 투쟁, 20년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고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면서 “감옥 같은 시설에 장애인을 처넣었던 게 대한민국의 역사다. (버스 점거로 인한) 욕은 먹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광주시민을 향해 호소했다.

419번 버스 뒤편. 한 활동가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워서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419번 버스 뒤편. 한 활동가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워서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광주항쟁 이후 41년, 장애인은 시설과 집에만 있었다

이 같은 규탄은 점거한 버스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이어졌다. 서미화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민주시민은 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이뤄냈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라 믿었고 장애인에게도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 속에서 장애인은 여전히 시민이 아니다”라며 “장애인이 완전하게 사회참여할 수 있는 사회가 광주항쟁 정신을 실천하는 사회”라고 강조했다.

이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날 전국 각지의 장애인 활동가들이 광주에 모였다. 이들은 광주항쟁 이후 41년이 지나는 동안 장애인은 시설에 있거나 집에만 갇혀 있어야 했다고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정기열 경기장차연 공동대표가 518번 버스 앞에서 피켓을 양손에 들고 두 팔을 높이 뻗고 있다. 사진 하민지
정기열 경기장차연 공동대표가 518번 버스 앞에서 피켓을 양손에 들고 두 팔을 높이 뻗고 있다. 사진 하민지

정기열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장애인에게 이동의 자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렵게 집 밖으로 나오면 왜 나왔냐고, 왜 쓸데없이 집회하냐고 한다. 장애인은 평생을 코로나 세상처럼 자가격리 당하며 살았다”면서 “광주항쟁 정신을 계승해 장애인차별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버스 앞문에 올라타 버스와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문경희 세종장차연 공동대표.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버스 앞문에 올라타 버스와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문경희 세종장차연 공동대표.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문경희 세종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도 “광주항쟁이 12살 때 일어났다. 그 후로 41년이 지났는데 나는 집에만 있었다. 장애인에게 민주주의는 없었다”며 “20년 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참사 이후 이동권투쟁과 함께 장애인에게도 민주주의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장애인이동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는 배제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 오늘도 싸운다”라고 외쳤다.

고 김재순 장애인노동자의 아버지 김선양 씨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고 김재순 장애인노동자의 아버지 김선양 씨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날 기자회견에는 고 김재순 장애인노동자의 아버지 김선양 씨도 참여했다. 고 김재순 씨는 작년 5월 22일, 광주 조선우드공장에서 혼자 합성수지 파쇄기에 올라 폐기물을 제거하던 중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 ‘다발성 분쇄손상’으로 사망했다.

김선양 씨는 광주가 민주주의의 도시가 아니라 ‘차별주의의 도시’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는 “광주가 무슨 민주주의의 도시인가. 장애인이 일하다가 파쇄기에 끼여 가루가 돼 죽었는데도 재판부는 조선우드 대표 편을 든다. 장애인도 사람이고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가 있다. 광주는 민주주의의 성지가 아니라 차별주의의 성지다”라고 분노했다.

전장연은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1만 개 쟁취 △최저임금법 7조(장애인 최저임금 적용제외) 폐지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개정 △장애인평생교육법 제정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한편 버스점거는 세 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점거 도중 광주시청 대중교통과에서 현장을 방문해 장애계 대표단과 면담을 진행했다.

활동가들이 점거한 버스 왼쪽에 옛 전남도청 건물과 시계탑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이 점거한 518번 버스 왼쪽에 옛 전남도청 건물과 시계탑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이 점거한 55번 버스. 피켓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두 명의 활동가가 버스 왼편 도로를 점거했다. 도로통행이 차단돼 사거리가 탁 트여 보인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이 점거한 55번 버스. 피켓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두 명의 활동가가 버스 왼편 도로를 점거했다. 도로통행이 차단돼 사거리가 탁 트여 보인다. 사진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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