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얼마 전, 인터뷰에서 오랜만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에 크론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치료받으실 건가요?”
질문자는 자신이 강한 장애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만약 장애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을 것이라고 먼저 솔직하게 말하면서 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나는 다른 질문들에 비해 쉽게 대답을 시작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공개적으로 치료를 바란다고 말하는 아픈 사람의 모습이 미디어에 덜 등장하길 바라기에, 나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그때 내가 내놓은 대답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치료가 된다면 좋겠죠? 그렇지만 그 이후가 잘 상상이 안 돼요. 누가 갑자기 5000억 원을 주겠다고 하면 너무 좋겠지만, 너무 큰 돈이고 그런 돈을 만져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것 같거든요. 치료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나는 치료를 온전히 거부하지도, 그러나 치료만을 생각하지도 않는 아픈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얼핏 저 시도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 대답을 곱씹을수록, 이게 나의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만으로 나의 삶을 상상하지 않겠다는 것은 노들장애학궁리소의 강의 ‘근본 없는 장애학’에서 알게 된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의 이론에서 얻은 언어였고, 치료 이후가 잘 상상되지 않는다는 건 세 명의 지체장애남성이 액션을 펼치는 영화 ‘어쩌다 암살클럽’(2017)에 나온 “걸을 수 있게 된다면 그만한 악몽이 없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라는 대사에서 얻은 언어였기 때문이다.
개운한 상태나 건강했던 시기의 에너지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8년 차 아픈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저 대답은 관성에 가까웠다. 대답하면서도 어딘가 찔리고, 묘하게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진 건 내가 안전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글을 계기로 좀 더 솔직한 대답을 꺼내 보자. 나는 치료될 수 없기에 아픈 채로 살아가고자 했지만, 만약 치료될 수 있다면 그때는 치료에 온 힘을 쏟을지도 모른다. 도수 높은 술과 격한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게 치료는 상상 이상으로 큰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크게 치료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치료만을 생각하지 않는 것 또한 증상이 별로 없는 사람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솔직한 대답 또한 여전히 부족하다. 그 이유는 여기서도 ‘치료’가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치료라고 하면 수술, 주사, 약 복용 등의 의료적 조치라는 순간으로만 상상되고, 그 이후의 과정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것이다. 질병과 질병으로 인한 상실과 마찬가지로, ‘치료’라는 과정 또한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에 말이다.
얼마 전, 한 친구는 시력 향상을 위해 눈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바로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몇 주가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회복 중이다. 물론 상태는 호전되고 있지만, 병원에서 이야기한 수술 경과와 그의 일상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다. 시야가 흐리거나 눈을 오래 뜰 수 없고, 화면을 오래 볼 수 없는 그는 한동안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핸드폰이나 텔레비전도 보기 어려워서 즐겁게 쉬는 데에도 제약이 있었다. 수술 직후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지금도 화면을 되도록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다.
수술 이후의 부작용이나 회복 과정은 지식백과나 블로그, 병원 사이트에서도 몇 줄 정도로 간략히 처리되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는 것은 바로 그 몇 줄이다. 부작용이나 회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작을 때조차도,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을 가하는 수술에 뒤따르는 예상치 못한 사건은 일상을 뒤흔들어놓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작은 균열들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감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상당 부분 앗아간다.
물론 우리는 부작용과 같은 위험을 알아보고 ‘그럼에도’ 수술이나 치료를 결정하지만, 그 이후 겪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모두 ‘처음’이다. 의료적 개입을 활용함으로써 자신이 목표한 대로 몸이 바뀌어 나가는 과정을 치료라고 부른다면, 그래서 부작용에 대응하는 일과 회복까지도 치료에 포함된다면, ‘치료’란 아주 불편하고, 또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치명적인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워리어 넌’은 얼핏 아주 흔한 치료 서사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목 아래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주인공은 보육원에서 보호받다가 살해되지만, 그 직후 신의 선택을 받아서 부활할 뿐 아니라 초능력과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설정은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과 얼핏 비슷해 보인다. (▷참고 :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쓸모’)
하지만 ‘워리어 넌’의 주인공은 자신의 치료된 몸에 적응하지 못한다. 바닷가에서 처음 뛰어 보고, 클럽에 처음 가 보고, 술도 처음 마셔 보는 그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민폐’ 캐릭터로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이게 훨씬 자연스럽다. 갈 수 있는 곳은 늘었지만, 그는 치료된 몸으로 살아가는 법, 나아가 타인과 상황들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모두 새롭게 배워 나가야 했다. 심지어 부작용도 없이, 신에 의해 단숨에 이루어진 치료마저 그에게 ‘중도 비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 것이다.
의료적 개입으로서의 치료는 완벽하지 않다. 부작용에 대응하고 회복해나가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치료는 내 삶을 개선해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치료를 받을 것이냐는 질문에 내가 해야 했던 대답은 어쩌면 조금 더 시원치 못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치료된 이후가 쉽게 상상되지 않지만 아마 지금보다는 낫겠죠? 하지만 치료에 드는 돈, 제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부작용, 그 이후의 적응과 같은 과정 전반을 생각한다면, 치료에 도전할 때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만큼의 용기가 있는지, 아직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