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몇 달 전의 일이다. 멀끔한 양복 차림으로, 알이 큰 메탈 소재의 시계를 차고 찍은 사진을 프로필로 해둔 사람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크론병 치료제가 개발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소식을 알려주어 고맙다고 답장하니, 그는 나에게 직접 만나서 그 약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주치의 선생님과 알아서 잘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9월의 일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로 난데없는 아침 인사를 받았다. 그는 나를 방송에서 봤다며,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방송’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내가 크론병 환자로서 잠시 출연한 공중파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다. 질병의 개인적이고 의료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던지는 질문의 의도를 일부러 피하며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방송에 담긴 것은 환자로서의 나와 어머니의 눈물뿐이었던 바로 그 다큐멘터리.
PD와 작가는 내 책과 내가 참여한 연극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고 말했고, 장내 미생물 무료 검사 기회를 준다고 했다. ‘마이크로바이옴’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라고 하더라도, 나를 환자로만 재현하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촬영에 응했다. 하지만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9월에 나에게 난데없는 아침 인사를 건넨, 나를 방송에서 봤다던 사람은 얼마 후에 갑자기 자기가 지금 공부하고 있다는 마이크로바이옴 책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보내는 의료 정보와 음성 메시지는 그날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나.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답장에 그는 자신이 홍보하는 피부 관리 제품이 마이크로바이옴에 관련된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도 주치의 선생님을 언급했지만, 그는 또 의료 정보를 보냈다.
9월의 다른 날, 자신을 “같은 크론병 환우”라고 지칭하는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 추천사를 써달라고 말했다. 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던 그가 나에게 추천사를 부탁한 원고는 질병을 사회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태도로 접근하는 글이었고,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예비 작가를 꿈꾸는 환우들에게 질병이 있어도 꿋꿋이 활동하는 작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화가 났다. 사람들의 ‘선의’가 나에게 증오를 불러일으켜서 스스로 예민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치료 정보를 알려주는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을 끊어내기 위해 ‘주치의 선생님’을 언급하는 나 자신이 더럽게도 무력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난데없이 나를 동정하고 연민하거나 환우들의 희망으로 만들어 버릴 때마다 나는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오하게 된다.
아픈 사람도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한 마디를 전달하지 못하는 나의 글들이 무력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글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돌베개, 2010)에서 고통 서사와 자기계발 서사가 분리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서사가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계발이 치료와 등치된다는 점이다. 고통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치료를 통해 제거되어야 하며, 이것이 바람직한 과정이라는 게 ‘치료 서사’다. 치료를 통해 고통을 제거하여 자기계발을 이루어내는 것.
나아가 일루즈는 이런 치료 서사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동력이 치료의 성공이나 고통의 극복 그 자체보다도, 누구나 언제든 정신적 고통에 시달릴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와 부유층이 정신적 고통을 정체성의 한 특징으로 공유하면서, 심리적 문제가 계급과 같은 사회적 위계와 무관하게 경험하는 “민주적 질병”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철저히 개인화된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본래 정신적 고통을 중심으로 논의되었지만, 이런 치료 서사는 다른 질병 서사의 분석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나의 글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질병 서사는, 그것이 ‘극복 서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평온하던 삶에 갑자기 찾아온 질병’과 그것과의 분투로서의 투병(鬪病), 그리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치병(治病)으로 나아가는 구성일 때가 많다. 이때 질병의 의미는 ‘상실’에서 ‘반려’로 변해 간다. 하지만 질병의 실제는 언제나 상실과 반려 사이를 진동하는 삶의 조건이다. 언제 갑자기 증상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몸의 변동성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내가 아픈 이야기를 쓴 것은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과정에는 어쩔 수 없이 약물과 생활습관 개선으로 나아진 몸의 상태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개인화된 건강 관리는 많은 부분에서 아픈 사람의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의 글에서도 이러한 치료 서사는 고통 서사와 결합했고, 나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아픈 사람’이라고 밝혔다. 일루즈의 분석에 따른다면, 이런 서사는 언제든 자기계발 서사로 미끄러질 위험을 지닌다.
탤컷 파슨스는 질병을 사회적 ‘정상’에서 벗어나는 일탈로 이해하면서, 환자의 역할(sick role)은 일탈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 치료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 이 환자 역할이라는 개념이 아픈 상태와 아프지 않은 상태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만성질환자에게 별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오랫동안 지적되었지만, 질병 서사가 자기계발 서사로 미끄러질 때 우리는 다시금 ‘건강’이라는 범주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아픈 사람’이 아닌, 얼른 사회적 정상으로 복귀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환자’로 환원되곤 한다.
‘저항적 질병서사’는 “질병을 개인의 관리 실패가 아닌 사회적 구조의 결과로 보고 아픈 몸으로서 겪는 차별과 배제를 폭로”2)하기 위한 질병서사로, 질병 서사와 자기계발 서사를 분리해내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의료적 조치나 개인적인 건강 관리가 결코 질병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아픈 사람’에서 ‘환자’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부수는 이야기들.
‘아픈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다. 대신 저항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병원 바깥에서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나은 몸’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상상하기 위해 사회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저항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무엇이 아픈 것인지, 무엇이 질병인지 질문하는, 그래서 고통과 치유 너머의 수많은 일상을 드러낼 수 있는 저항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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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alcott Parsons, 『Illness and the role of the physician: a sociological perspective』, The American journal of orthopsychiatry, 21(3), 452–460, 1951.
2) 조한진희, 「우리 시대 건강권을 넘어, 질병권(疾病權)을 제안하다 - 질병권을 통한 상상력」, 한국문화인류학회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 175쪽, 2020.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