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대선을 앞두고 선거캠프들에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말밥에 오른 것 중 하나는 조동연 전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아래 조 전 선대위장)의 ‘혼외자 논란’이다. 소위 ‘사생활 논란’이라고 불리는 것들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중에도 조 전 선대위장이 이혼 당시 혼외자 때문에 귀책배우자였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내 소셜 미디어 피드에 올라왔다.

한 사람이 소셜 미디어 피드를 보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한 사람이 소셜 미디어 피드를 보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어떤 이들은 조 전 선대위장이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하게 되었으므로 그에게도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인의 사생활’은 검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단지 사생활이 아니라, 공인의 ‘신뢰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검증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이 논란에 말을 얹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말하는 일이 곧 정치 참여라고 믿는 듯했다.

나에게도 침묵보다는 ‘말하기’나 ‘참여’가 익숙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수업시간에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모두가 말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배우며 자랐고, 그러한 이상이 잘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여는 언제나 ‘말하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한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에서의 소통이 풍요로워졌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런 환상은 소통의 기본 단위를 ‘메시지’에서 ‘단순 기여’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내용과 무관한 댓글을 달거나, 내용도 모른 채 ‘좋아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여기서 각 게시물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다. 심지어 응답의 여부나 메시지가 이해되었는지조차 무의미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좋아요’나 댓글처럼 단순한 반응만으로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고 믿게 되고, 바로 이런 ‘착각’이 사람들을 탈정치화한다.1)

페이스북 아이콘과 ‘좋아요’를 의미하는 엄지손가락 배지가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페이스북 아이콘과 ‘좋아요’를 의미하는 엄지손가락 배지가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이 구절을 읽고,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넷 기사, 페이스북 게시물 등에 달리는 댓글이나 반응들이 떠올랐다. 장애와 질병의 경계와 그것의 법적 쟁점, 실질적 변화 등을 다루는 영상에도, 사적인 상처나 감정에 관한 글에도, 어떤 이들은 걸핏하면 지금 당장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의견을 추궁하곤 한다. 당사자도 아닌 나까지 당황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맥락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댓글을 남기거나 ‘화나요’, ‘웃겨요’ 같은 반응을 남기는 이들도 많다.

이런 종류의 반응은 소위 ‘사생활 논란’에 대해 더욱 거세다. 토크쇼에 관한 어느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010년대부터 특히 연예인이나 정치인, 일반인이 TV에 나와 자신의 내밀한 사생활을 고백하는 토크쇼가 유행하며 그런 경향이 가속화되었다. 여기서 출연자의 사생활은 진행자, 패널부터 시청자까지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맘대로 펼칠 수 있는 “사회적 참견의 장”이 되었고, 이야기가 은밀하고 ‘비정상적’일수록 그러한 경향은 강해졌다. 여기서 미디어를 통한 개인적인 ‘고백’은 “철저하게 사회윤리의 점검을 받으며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윤리를 견고하게 하는”, 즉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기술이다.2)

이처럼 지금의 사회에서 ‘말하기’는 단지 ‘참여’와 같은 말일 뿐 아니라,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도 기능한다. 여기서 침묵, 말로 풀기 어려운 어색함은 단지 소통의 방해요소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결코 모두에게 같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딘가 어색한 침묵을 발견하곤 한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먼 곳이나 구석을 향하는 시선, 작아지는 목소리, 흐려지는 말끝, … 나에게는 전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상대는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한 그런 침묵.

지난 학기, 나는 연구를 위해 홈리스야학에 방문했다. 그때 학생분들께 나와 동료 연구자는 야학을 알게 된 계기나 야학에 다니는 이유, 야학에서 힘든 점 같은 것들을 여쭈었다. 질문을 만들 때는 분명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인터뷰에서는 아주 짧은 대답만 돌아온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면, 교사로 활동하는 이들의 대답은 훨씬 길고 상세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초보 연구자로서 ‘써먹기’에 좋았다. 내가 특별히 언어화하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교사들의 경험과 감정은 대체로 이미 맥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가 끝난 후에 계속 마음에 남는 것은 아주 짧은 대답,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 이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의 당황이었다. 나는 말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 가깝지 않은 이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에만 익숙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백 개의 침묵이 있다면 백 개 이상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안 친해서, 혹은 그냥 싫어서, 아니면 자신의 경험을 자신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회가 보호하지 않는 자신이나 타인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대는 사람을 믿을 수 없어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끊임없이 댓글을 달고 반응을 남길 때 깨지는 것은 침묵만이 아닐 수 있다.

노트북 자판 위에 놓여 있는 한 사람의 손이 타자를 치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노트북 자판 위에 놓여 있는 한 사람의 손이 타자를 치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사람들은 토크쇼를 보며 출연자를 평가하듯 온라인에 수없이 글을 쏟아내었다. 그렇게 온라인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성별 규범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고, 거기서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진 것은 조 전 선대위장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이들의 신상까지 까발려졌다. 조 전 선대위장은 결국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해야 했고, 맡았던 직책 또한 내려놓았다. 그제야 어떤 이들은 자신의 말들을 후회했고, 다른 이들은 마지막으로 공개한 사실까지도 의심했다.

때로, 말할 책임이나 의무보다 필요한 것은 침묵의 윤리다. 그것은 누군가의 침묵을 다룰 때 필요한 윤리이고, 말하기보다 침묵이 나을 때를 찾는 윤리이고, 어떻게든 ‘침묵을 듣고자’ 애쓸 윤리이다.3) 누군가의 침묵은 그 자체로 이미 많은 걸 말하고 있다. 공동체가 갖춰야 할 능력은 더 추궁해야 할 침묵과 그렇지 않은 침묵을 가려내는 ‘분별력’이다.

모든 침묵에는 다른 맥락이 있다. ‘취조관’으로서의 시민은 정말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모든 걸 말하길 요구받지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추궁에 떨고 망설이며 눈을 피하는 이에게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되는가?

*                   *                   *

1) 이희은, 「디지털 노동의 불안과 희망」, 『한국언론정보학보』, 2014, 217쪽
2) 권유리야, 「토크쇼, 문화적 관행으로서의 제의」, 『한국문학논총』, 2021, 87, 471-502쪽
3) 김애령, 『듣기의 윤리』, 봄날의박씨, 2020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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