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인터뷰] 김영진 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

▷(전편) [잠실포차②] 농부에겐 땅이, 노점상에겐 마차가… 그곳에 삶을 짓다 / 김윤영 

2012년 4월 18일, 노점상 폭력단속에 항의하며 서초구청 앞에서 발언하는 김영진 당시 민주노련 위원장. 사진 김윤영 
2012년 4월 18일, 노점상 폭력단속에 항의하며 서초구청 앞에서 발언하는 김영진 당시 민주노련 위원장. 사진 김윤영 

굳은 얼굴에 한 음절 한 음절 똑 부러지는 말투를 가진 위원장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빈말이 없었다. 같은 단체 동료 활동가들은 안건지만 쓰면 틀린 맞춤법과 비문을 잡아내는 영 까다로운 위원장이라고 흉보곤 했지만, 거기엔 똑똑한 위원장이라는 자랑도 내심 담겨 있었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을 지내던 시절(2012~2013년) 김영진에 관한 이야기다.

2012년 서초구청 앞에서는 서초구 노점상들의 집회가 열렸다. 핵안보정상회담 기간 동안 노점상 운영을 중단해달라는 요청에 협조해 장사를 며칠 접었더니 노점상들이 돌아오기 전 구청에서 마차 자리마다 돌화분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위원장이었던 김영진은 집회 중 구청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 결과를 기다리며 구호도 외치고 발언도 듣고 있는데, 구청 너머로 김영진 위원장이 다시 뛰어나와 거칠게 마이크를 휘어잡았다.

“저 자식들이요, 지금 우리를 바보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생계를 뺏긴 주민이 여기서 외치는 말을 바보 같다고 비아냥거리는 놈들과 상대할 수 있습니까! 이대로 협상 진행 못합니다! 모두 서초구청으로 쳐들어갑시다!”

화가 난 노점상들이 모두 담벼락과 꽃밭을 건너 서초구청 마당에 모여 항의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너무나 야성적인 위원장의 외침이었다. 바보 같다고요! 모욕 위에 약속이 있을 수 있습니까? 동지들, 담을 넘어 싸웁시다!

인터뷰를 위해 그가 운영하는 ‘만복래 곱창’에 방문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동그라미가 되어 있었다. 도깨비 같은 눈썹이나 강한 눈빛은 굵은 웃음 주름에 가려졌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눈도, 코도, 입도 동그랗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복래 곱창 사장님 김영진은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의 말투와 전혀 달랐다. “여보세요오? 네에, 십분뒤에 오쎄요오”라며 부드럽게 굴리는 말투는 어린이 손님에게 꼼짝 못 하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맹렬히 외치던 위원장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어쩐지 양쪽 다 그답고 편안해 보였다.

김영진 전 민주노련 위원장이 곱창을 볶고 있다. 그는 현재 송파구 ‘만복래 곱창’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김윤영
김영진 전 민주노련 위원장이 곱창을 볶고 있다. 그는 현재 송파구 ‘만복래 곱창’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김윤영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졸업 후 노동법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법대 학생장이었다는 이력을 들은 적이 있어 나는 그가 노점상이 된 것은 세상을 바꿔보자는 풍운의 꿈이 있어서였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그렇게 멋진 이유가 아니라 단지 먹고 살려고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했다. 법대에 입학했지만 사법고시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야말로 백수로 살다가, 당시 신설된 노무사 시험에 강사가 필요하다는 지인의 요청으로 노동법 강의를 시작하며 노동자들에게도 법에 명시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사로 제법 잘 나갔으나 원래 법이나 공부에 뜻이 있던 사람이 아닌데 남을 가르치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타성에 젖’고 싶지 않아 혈혈단신 서울에 상경했다. 무엇을 해서 벌어 먹고살까, 생각하다 찾은 곳이 가락시장이었다. 가락시장 질서요원, 지금으로 하면 가락시장 청원경찰이나 단속반 같은 일이 서울에서의 첫 직장이었다.

당시 가락시장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89년도 용산청과물시장에서 철거7)로 쫓겨난 노점상들이 모여들며 가락시장은 더욱 커졌다. 노점상만 4~500명은 족히 장사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 당시에 가락시장 장사가 진짜 너무 잘됐어. 성남이나 강남에는 재래시장 마땅히 큰 데가 없으니까. 그 당시엔 시장 형성이 안 되어 있으니 (상권 형성을 위해) 용산에서 철거당한 노점상을 가락시장에 확 풀어놨거든. 명절 같은 경우는 발 디딜 틈도 없었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니 시장 내부 비리가 말도 못 했어. 경비들, 단속반원들이 아주 대장이야, 대장. 뒷돈 챙기면 자리 좋은 데 심어주고. 아주 무법천지야. (…) 경비 중엔 진짜 조폭도 포진해 있고, 특수부대 출신들도 있고. 영화에서 본 그대로야. 쇠막대 질질 끌고 다니면서 저거들 마음대로 하고. 말 안 들으면 구둣발로 차고. 리어카 끌고 저기 저 (가락시장) 관리공사 지하실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그러던 시절이야.”

- “싸움 없이 뭉쳐진 조직은 사실은 사상누각이거든”

경비들과 노동조합을 만들려다가 해고된 그는 자리를 바꿔 노점상이 됐다. ‘일심회’(가칭)라는 이름의 노점상 모임을 만들고 폭력으로 농락하는 단속반원, 비리투성이로 운영되는 가락시장 관리공사와 싸움을 시작한다.

“(문정동에 있는) 법조타운, 그 당시 비닐하우스촌이었거든. 비닐하우스에 가서 그 당시에 창립총회라고 칭하지도 않았지만 창립총회 비슷한 걸 하고, 일심회라고 가칭. 조직원들은 표시를 내야 된다 해가지고 (일심회라고 적힌) 모자를 이렇게 쓰고. 하하. 그러니까 이제 모자 쓴 놈들만 데려다가 족치고 그랬을 거 아냐? 육탄전도 엄청나게 벌였지. 좌우지간 그렇게 탄력을 받기 시작해서 가락시장에서 경비들을 제압하고 나니 관리공사하고 본 게임하고. 또 이기고 나니 인제 사방팔방에서 가입문의가 들어오게 된 거지. 그렇게 안착이 되면서 외곽에 지부가 하나둘 쭉쭉 늘어나게 되는데, 단 한 군데도 싸우지 않고 생성된 지부가 없었지. 전부 가서 어떤 푸닥거리를 하더라도 단속반 용역하고 치고받고, 구청 가서 치고받고 하면서 투쟁 속에서 결성이 되다 보니 그나마라도 송파가 단단해진 거지. 싸움 없이 뭉쳐진 조직은 사실은 사상누각이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고 했지만 그래도 나름 원칙을 지키려고 했던 조직이지.”

가락시장에서 노점을 시작했던 그는 1989년도에 잠실지부 회원들과 함께 잠실 포장마차를 세우고, 91년도 신천 새마을시장 투쟁으로 처음 징역을 가게 된다. 대부분 노점상이 여성인 새마을시장에 들어온 용역깡패는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둘렀다. 사람을 거꾸로 들어 아스팔트에 메어다 꽂고, 회원들은 수주의 치료 진단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분노만큼 싸움도 커졌다.

경찰은 당시 직책을 갖고 있지 않았던 김영진을 콕 집어 죄를 씌웠다. 거리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징역 정도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16일 만에 구속됐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였다. 부인에게도 미안하고 작은 아가 모습이 눈과 귓가에 매일 아른거렸다. 밥알을 조금 덜어내 창가에 두면 아침마다 비둘기가 날아와 밥알을 먹으며 구구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리움으로 비둘기 소리마저 아기 울음소리로 들렸다. 그걸 듣고 있다 보면 조금 분한 마음이 일었다. 매일 아침 징역방 창살 너머로 “야, 이 도둑놈들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고함을 쳤다.

곱창을 볶는 김영진 전 민주노련 위원장의 뒷모습. 그는 현재 송파구 ‘만복래 곱창’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김윤영

그의 뜨거운 시절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잠실포차에서 일할 때도 사무국장, 지역장, 위원장을 번갈아 하며 바쁘게 살았다. 잠실포차를 그만둔 이후에도 김밥집, 실내포차를 운영하다가 잠실포차 시절의 주 종목, 곱창으로 돌아오기까지 십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고단했을 부인과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밀려오는 때다. 잘 살았던가, 요즘은 회한이 인다.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그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노점상 한 자리 한 자리에는 우주가 있습니다. 한 인간과 가족의 생계가 달렸는데 우주가 아닙니까. 당신이 싸우고자 하면 나는 늘 당신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치졸하게 요행을 바라지 말고, 당당하게 인간으로 싸우라는 이야기를 늘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길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명동성당 농성부터 꾸준히 함께해온 영원한 지부장 울내미와 ‘내가 기침하면 저쪽에서 벌써 독감 걸려있는’ 동지 김흥현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 지금까지 왔다. 길 위의 포장마차가 어떻게 단지 노점상의 것일까. 잠실포차는 이곳을 오고 간 모든 사람의 공공재였다. 위에서 결정하는 사람들의 손은 안 탔어도, 철거하러 오는 용역 깡패조차 단골인 곳이었다.

“중간중간 싸움이 있을 때마다 진짜 우군이 되었던 게 손님들이고, 우리를 단속했던 롯데 직원들. 우릴 단속했던 송파구청 직원들. (포차 사라질 때) 걔들 중에도 눈물 흘린 애들 많아. 롯데 같은 경우에는 보안요원들이 단속을 몇 년간 했을 거 아니야. 우리한테 많이 맞기도 하고 욕도 뒈지게 먹기도 하고. 하하. 우리가 너거들은 참 속도 없다. 밤엔 또 웃으면서 술 마시러 오고 (그러니까). 하하.”

이야기를 마치면서 김영진은 본인의 이야기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며 고심했다. 나의 비겁한 점, 잘못한 일들 그런 걸 생략하고 말한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영 틀린 얘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었다. 혹시 나를 영웅적으로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겪은 일을 마치 무용담처럼 얘기한 건 아닐까? 집행부들의 지적처럼 그는 퇴고에 꼼꼼한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김영진에게도 실수와 잘못, 비겁한 일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몇 개의 성공과 몇 개의 실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먹고 살기 위해 노점상이 되었다는 그 자체로 보인다. 노동법 강사에서 가락시장 단속반으로, 단속반에서 노점상으로 고여든 삶의 경로는 그가 누구와 한패가 될 것인지 결정해왔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기로에 설 때마다 가장 약하고 평범한 사람의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삼았던 선택이 김영진의 오늘을 만들었다.

스스로 영웅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현장 회원들의 목소리가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무수한 싸움이 남긴 한 줄 역사 뒤에는 작은 성공과 작은 실패, 쩨쩨하고 평범한 이기심, 세상을 바꾼다는 벅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므로.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그는 이 난해한 세계를 홀로 탈출하지 않고 곱창집을 지키는 평범한 삶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민주화의 거리는 누군가에게 출세의 든든한 씨앗이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이름은 그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은 실패와 작은 성공을 인생 전체로 누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언제나 겨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보통의 궤도와 조금 어긋난 형태로 세계에 불을 지폈다. 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규칙이 민주주의의 외곽을 확장한 진짜 힘이었다. 자신의 삶으로 세상과 불화하며 없던 길을 만들어 낸 사람들 모두에게 경의를 보낸다. 그들 중 한 사람, 김영진 역시 마땅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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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자리에 현재 용산전자상가가 있다. 1989년 세운상가에 입점한 업체 중 전자컴퓨터 업종을 모아 이주한 단지다.

◎ 참고

《가난의 시대》, 최인기, 동녘, 2012.

《가난의 도시》, 최인기, 나름북스, 2022.

〈송파노련 30년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2017.

〈노점상인과 명동성당〉, 허남, 가톨릭신문, 1989.07.16.

〈“노점상 소탕… 끼니조차 벅차요”〉, 이상수, 한겨레신문, 1991.2.3.

〈석촌호수 노점상 철거〉, 손관승, MBC뉴스데스크, 1989.7.10.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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