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잠실은 88올림픽과 함께 만들어진 도시다. 잠실운동장과 올림픽 공원, 선수·기자촌 아파트가 들어서며 잠실은 송파구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지어진 아파트들이 2000년대에 접어들어 “경축 안전진단 D등급”과 같은 현수막을 내걸고 재건축을 기다리는 흥망성쇠를 거친 반면, 높은 건물에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역사는 다르다. 바르게 난 경계를 따라 주거단지와 상업 단지가 투명한 유리문을 끼고 건설되면서 잠실 곳곳에 있던 노점상들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올림픽선수촌, 석촌호수, 교통회관, 신천, 새마을시장, 가락시장1) 등지에 있던 노점상들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동안 장사를 접어야 했다. 단속반과 구청에 갈취를 당하거나 단속으로 장사를 못하는 일들이 이어지던 노점상들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스스로의 조직을 결성한다. 1987년 도시노점상연합회, 그리고 1988년 결성된 전국노점상연합회다.
물론 나에게 1988년 전국노점상연합회 결성 같은 사실은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알 수도,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이전까지 잠실이란 오로지 롯데월드였다. 놀이동산을 싫어하는 어린이는 별로 없겠지만 유난히 놀이기구를 좋아하던 나에게 롯데월드는 천국이었다. 어른이 되면 꼭 연간회원권을 끊어 퇴근 후 매일 롯데월드에 가야지, 왜 어른들은 놀이동산을 안 좋아하는 걸까, 그런 걸 결심하고 궁금해하던 시절이었다.
조금 자라자 롯데월드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곳이 보였다. 롯데월드 앞 포장마차촌이었다. 주황색 천막, 노란 불빛, 음식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시원하게 땀 흘리는 소주병 같은 운치 있는 풍경에 나도 일원이 되고 싶었다. 막상 성인이 되고 난 뒤 잠실은 내 생활반경에서 쏙 빠진 동네가 되어버려서 가보지 못했지만, 잠실 포장마차에서 곱창볶음이나 고갈비에 소주를 마셔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잠실역 1번 출구 앞 포장마차를 그리워한다. 1989년부터 2010년까지 21년간 자리를 지킨 잠실포차의 자리에 지금은 123층의 롯데월드타워가 서 있다.
- 노점상 철거에 맞선 저항, 잠실포차의 뿌리가 되다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노점상 마차 보관소를 폐쇄해 노점상을 일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분노한 노점상들은 1988년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광장에 모여 ‘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6월 16일까지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거리에서 싸웠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마차 보관소 폐쇄 방침을 유보한다. 뭉쳐서 싸우면 노점상도 이길 수 있다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다시 노점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국 노점상을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에는 특히 포장마차에 대한 공격이 가장 거셌다. 일부 기업형 노점상을 부각하고, 조직폭력배와의 연계설 등을 확대해 선전하며 노점상에 대한 공안정국을 확고히 했다. 당시 석촌호수 인근에는 214개의 큰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정부는 이들 포장마차를 철거하기 위해 경찰 2400명, 철거반과 소방서 직원, 청소원 등 4000명2)을 투입했다.
중장비가 동원된 철거 현장은 티브이로 송출됐다. 강경한 법 집행을 선전하던 티브이 속 스펙터클은 전국에 흩어져있는 노점상들에겐 당면한 생존의 위협으로 돌아왔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철거에 노점상들은 매일같이 저항을 시도했다. 철거 반대와 대책 마련을 호소하던 노점상들에게 명동성당이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지만, 먹고 살고자 노점상이라도 된 사람들의 사정이 더 급했다.
“아무리 미관상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규제만 하면 우리들은 어디 가서 어떻게 먹고살라는 얘깁니까. 눈에 보기 좋고 보행하기가 좀 편리한 것이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까.”
“말로만 서민정책 서민정책하지 나는 항상 피해만 입어왔어. 얼마 전에는 사는 집이 무허가라고 내쫓더니 이제는 살길마저 끊어. 에그, 돈 없는 게 죄지.”3)
노점상들은 1989년 7월 20일, 명동성당에 모여 농성에 돌입했다. 당시 잠실에서 장사하던 31세 노점상 김영진도 명동성당에 갔다.
“결정적인 건 전국에 포장마차를 다 없애겠다는 거였지. 그래가지고 안 모일 수가 없었던 거잖아. 각개격파식으로 해봤자 승산도 없고, 그러면 전국 싸움으로 만들자, 해서 (농성을) 한 거지.”
목소리도 크고 말을 잘한다고 사회도 곧잘 맡았다. 노점상도 합법화해주겠다던 대통령4)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겠다더니 노점상만 때려잡고 있지 않던가. 그해 명동성당 앞에서 김영진이 자주 외친 구호는 ‘애태우고 속태우는 노태우를 불태우자’였다.
이때 37일간의 명동성당 농성5)을 통해 노점상들은 3천여 개의 ‘가로가판대’라는 합법적 경로를 얻게 되었다. 허가된 가로가판대는 전체 노점상 규모를 생각할 때 턱없이 부족했고, 노점 단속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노점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일 뿐이었다. 나름의 성과가 있었지만 진짜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작은 결과만을 얻은 셈이다.
그래도 얻은 바가 있었다. 그해 여름은 비가 참 많이 왔다. 내리는 비에 자꾸만 눈물을 섞어 뚝뚝 흘리던 동료가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손에 유인물을 쥐여줄 때도, 구호를 외칠 때도,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부를 때도 비가 내렸다. 농성을 마칠 때쯤 그의 별명은 비만 오면 우는 ‘울내미’가 되었다. 김영진 곁엔 함께 싸운 동료들이 남았다.
- 뭉쳐야 산다
울내미와 김영진을 비롯한 송파지역 노점상들은 농성을 통해 배운 바가 있었다. 각자 떨어져 장사하며 각개격파 당하느니 한자리에 모여서 싸우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단속반에 뇌물 바치고, 구청 직원과 양아치에게 뒷돈 주면서도 시시때때로 쫓겨나고 전전긍긍 살 바에 차라리 함께 싸워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처음 뭉치는 자리로 정한 곳은 잠실역 1번 출구부터 송파구청까지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건너편 교통회관 뒤쪽에서 물을 뜨고 마차를 준비해 다같이 8차선 도로를 일제히 건너 한순간에 마차를 펴는 식이었다.
“명성투쟁(명동성당 농성) 끝나고 내려오면서 그때 우리가 결의했던 게 현장사수고 현장투쟁이었거든. 잠실역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야지 싸움이 되잖아. 교통회관 뒤에 골목에서, 전철하고 교통회관 사이에서. 거기서 물을 길어다가 준비를 해서 다섯 시 되면 요이 땡 해가지구 그 넓은 도로를 건너서 롯데 주차장으로 갔지. (왜 같이 이동하셨어요?) 따로따로 가면 단속에 걸리니까 무리 지어 다녀야지, 여하튼간에 뭉쳐야 산다는 거지 뭐. 준비도 같이하고 영업도 같이하고 요이 땡 하면서”
수 대의 마차가 우르르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모습은 제법 장관이기도, 우습기도 했다. 매일 철거를 당해도 다시 매일 장사를 시작하자는 각오로 싸움을 시작했다. 지친 몇몇은 그만두기도 했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느니, 당신만 천만 원을 챙겨주겠다느니 회유도 있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10월이 되자 송파구청에서는 당시 롯데 직원 주차장, 현재 롯데월드타워 자리 한켠에서 장사하면 단속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단, 가판을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손수레에 간단한 안주를 담아 술도 막걸리와 소주를 잔술로 파는 노점을 시작했다. 손님들도 앉을 자리가 없이 서서 먹던 장면이 잠실포차의 첫 모습이었다.
- 내가 만든 삶의 자리
송파구청의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한두 해가 지나자 노점을 철거하려는 압력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가. 잠실 곳곳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명동성당 농성을 거쳐 만들어낸 자리였다. 떠밀려 온 것이 아니라 싸워서 만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쉽게 잃을 수 없었다. 대개 노점상이 인도와 같은 공유지를 점유하는 것과 달리 사유지인 롯데 땅 위에 서있는 잠실포차는 더욱 잦은 철거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잠실포차는) 고립무원이잖아 사실은. 밖에서 입구를 막아버리게 되면은 딱 갇히게 되는 거야. 그러면 안에서 어떻게 되겠어. 알려야 되니까 폐타이어라도 (불을) 지르고 해야 밖에서 보일 거 아니야. 우리도 처음에는 몰랐어. 폐타이어 딱 한 장만 질렀는데 낮인데도 시커먼 연기가 확 오르니까 이런 게 위력이구나 싶었지.”
애초에 주차장 펜스에 갇혀있던 잠실포차의 상황 자체가 모든 면에서 배수의 진이었다. 그래서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더욱 강하게 지켰다. 송파구청과 롯데의 간섭이나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철거에 맞서 싸우는 것만큼 내부의 규율도 강했다. 각 노점은 일정 크기 이하의 규격대로만 만들어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8자를 쓰듯 마차를 한 칸씩 옮겼다. 주로 입구 가까운 자리에 손님이 모이기 때문에 자리를 바꿔 서로 시기나 욕심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쪽 방향으로 자리를 돌리지 않고 8자로 돌리면 바로 옆자리 노점상도 매번 바뀌니 모든 상인이 합을 맞춰 일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관계를 쇄신하는 잠실포차 노점상들은 같은 시간에 장사하고 같은 시간에 불을 껐다. 철거당하는 이웃 노점상이 있으면 장사 중간에도 지부장의 “불 꺼!” 소리에 맞춰 장사를 접고 달려갔다. 그야말로 철의 규율을 갖춘 장사공동체였다. 책잡히는 일 없도록 전구 하나 켤 때도 롯데의 전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투쟁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협책도 있었다. 육십 대가 넘는 롯데백화점 셔틀버스를 관리해주고, 롯데물산 옷을 입은 주차장 관리요원의 월급을 주는 일도 잠실포차가 맡았다. 롯데의 땅이기는 하지만 이 땅의 실제 사용자는 포장마차들이었다. 이곳은 재산권이라는 현실의 법과 점유자의 사용권이라는 이상이 충돌하는 작은 영토였다.
“법적으로 따지면 하나 유리할 게 없어. (법은) 실질적으로 힘의 관계를 투영하는 거거든. 사유지니까 명분이 굉장히 약했지. 하지만 생존권은 천부적 권리잖아. 어떤 법률보다도 강한 헌법적 개념이고, 당연히 상위 개념이고.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는 거지.”
늘 위태로운 상황에서 장사했던 만큼 긴장감이 높았지만, 규율만큼 단합도 강했다. 단속에 맞서 싸우고, 막아내면 얼마간 장사하다가 다시 단속이 있는 식의 고비를 몇 번이나 함께 넘었던가.
“건들고 건들수록 커졌지. 처음에는 서서 먹겠다고 이동형으로 두었는데 쫓아내려 해서 그러면 우리는 이동도 않겠다, 해서 눌러앉은 거고. 우리를 또 쫓아내려고 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했느냐, 테이블 없이 의자만 몇 개. 대신에 천막을 친다든지 그런 건 없기로 하고 (협상을 했지).”
* * *
1) 〈송파노련 30년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2017.
2) 〈석촌호수 노점상철거〉, 손관승, MBC뉴스데스크, 1989.7.10.
3) 〈[기자노트] 노점상인과 명동성당〉, 허남, 가톨릭신문, 1989.07.16.
4) 노점상 이순녀(54) 씨는 올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기만 하다. 지난해 8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져누운 남편(61)을 대신해 영등포역 부근에서 손톱깎기, 빗 등 잡화 노점을 벌여 제대한 아들(21) 등 세 식구가 6만 원짜리 단칸 사글세방에 살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온 이 씨는 연일 계속되는 노점상 단속에 쫓겨 일터를 잃고 살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들마저 지난달 25일 “아버지 약값을 구해오겠다”며 집을 나간 뒤 일주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가뜩이나 방세독촉에 시달리는 이 씨의 가슴은 미어질 것만 같다.
이 씨는 “지난 87년 대통령선거때 성남에 유세하러 온 노태우 후보가 “꿈도 아픔도 국민과 함께 나누고 노점상을 허용해주겠다”고 말해 노태우 씨가 대통령이 되면 단속반에 쫓기는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큰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올겨울엔 마구잡이 철거를 하고 있다”면서 당시 노태우 후보와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내보였다, 〈“노점상 소탕… 끼니조차 벅차요”〉, 이상수, 한겨레신문, 1991.2.3.
5) 《가난의 도시》, 최인기, 나름북스, 2022, 56쪽.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그런데 그런 언론괸 권력의 유대는 현재도 진행중이고 여전히 그 힘은 대통령을 만들어 낼 만큼 대단하네요. 결국 시민 개개인의 힘이 커져안 겠죠. 우리 손으로 저런 바보같은 대통령을 선출한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