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1일 갑작스레 세상 떠난 김동호 활동가
남겨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발달장애인 활동가’ 김동호
흐리고 비가 오고 김동호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왜 이토록 슬픈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동료이자 동지였고 누구보다 다정한 친구였던 김동호가 사라졌다. 그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로서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싸운 활동가였다. 김동호는 발목을 다쳐 병원에서 치료받던 지난 7월 21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만 27세였다.
이틀 뒤인 23일, 부천중앙공원에서 고 김동호 피플퍼스트서울센터(아래 피플서울센터) 활동가의 추모식이 열렸다. 그의 사진 앞에 바칠 국화는 모자랐고, 흐느끼는 소리는 흘러넘쳤다. 투쟁 현장에서 알록달록한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던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은 검은 옷을 맞춰 입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오는 7일이면 김동호의 49재다. 그의 부재로 그의 존재를 확인해야 했던 49일이었다. “늘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고, 누군가 힘들어하면 꼭 그날 괜찮냐고 말을 걸”었던 그의 따뜻함을, 피플서울센터 조력자 김혜미는 “사랑”이라 이름 붙였다.
-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되다
지적장애가 있는 김동호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까지 일반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중·고등과정을 마쳤다. 이후 그는 발달장애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꿈더하기지원센터에 들어갔다. 영등포구 장애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푸드뱅크에서 식품을 진열하는 일도 하게 됐다. 그랬던 그의 삶은 2018년 피플퍼스트를 처음 알게 되며 송두리째 바뀐다.
피플퍼스트(People First)는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주축이 되는 권리옹호운동이다. 1974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열린 발달장애인자기권리주장대회에 참가한 당사자가 자신을 정신지체(mentally retarded)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나는 우선 사람으로 알려지길 원한다(I wanna be known to as a people first)”라고 말한 것에서 따왔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한국피플퍼스트가 생기고, 이듬해 피플서울센터가 문을 열었다. 피플서울센터는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조력자가 함께 활동한다.
우연한 기회로 피플서울센터 자조모임에 참여한 김동호는 피플퍼스트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는 그날 만난 발달장애인 활동가 김대범의 모습에 반해버렸고, 그들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김동호는 자신도 김대범처럼 활동하고 싶었다. ‘발달장애인 활동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발달장애인의 언어로 이 세상에 말하고 싶었다. 그는 피플서울센터 자조모임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매일같이 사무실을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동호 씨가 퇴근하면 맨날 사무실로 무조건 와서는 뒤에 서있는 거예요. 앉아있지도 않아요. 그러고는 저희 일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다고 했어요.” (조력자 이현주)
사람을 잘 챙기는 김동호의 성격은 이때부터 눈에 띄었다. 자조모임에 참여한 발달장애인은 각자 걷는 속도가 다르기 마련인데,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려주는 일은 항상 김동호의 몫이었다.
“계단을 내려가거나 할 때, 제가 앞사람들을 챙기느라 뒤를 잘 못 보곤 했거든요. 그럴 때면 동호 씨가 항상 뒷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피플퍼스트에서 같이 활동하면 좋겠다 싶어서 동호 씨한테 연락했고, 동호 씨도 너무 좋다고 해서 같이 일하게 됐죠.” (이현주)
2019년 7월, 김동호는 꿈에 그리던 피플서울센터 활동가가 됐다.
- 나의 문제에서 우리의 문제로
김동호가 들어온 2019년 7월은 피플서울센터가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던 때였다. 이 과정에서 김동호의 역할은 돋보였다. ‘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한다는데, 동료지원가가 무슨 일을 하는 거야?’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던 시절, 김동호는 정보를 모아 동료지원이 무엇인지 정의해줬다.
김동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문제로 보고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2018년, 애견카페에 간 그를 발달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장이 입구에서 가로막았다. 김동호는 장애인단체에 피해 사실을 말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당사자로서 겪은 숱한 차별에 공적으로 대응한 첫 투쟁이었다.
이후에도 김동호는 활동가답게 차별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지난해 그는 용산에 있는 LG유플러스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이렇게 소리쳤다.
“지난 6월 핸드폰을 사기 위해 LG유플러스에 갔습니다. 직원은 대뜸 같이 간 직장동료에게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고 발달장애인은 가족과 함께 오지 않으면 휴대폰을 새로 만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화가 나고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성인이고 돈도 있어서 제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달장애인이라고 해서 핸드폰을 살 때 그런 지침을 만든 것이 어이가 없습니다.”
김동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아본 적은 없었지만, 많은 발달장애인이 평생 시설에서 사는 현실에 분노했다. 지난해 7월 27일, 김동호는 시설 이용자 부모들이 탈시설에 반대하며 ‘시설퇴소는 사형선고’라 외치는 기사를 스크랩하고 활동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발달장애인들도 속도에 맞쳐주면(맞춰주면) 할 수 있고 밖으로 나와야 그동안 못 했던 것도 할 수 있고 인권도 지킬 수 있고… 발달장애인 때문에 사형선고 같다는 이야기를 한 게 너무 화가 났다.”
김동호는 지금은 문을 닫은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집으로 다크투어를 다녀온 뒤, 탈시설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됐다. 그는 피플서울센터가 만든 영상에서 “한 방에서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지낸다고 하고, 화장실도 문도 다 안 닫고 열려 있고, (건물 밖으로) 못 나가게 문을 막았다고 해서, 거기 안에 있는 친구들이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김동호는 발달장애인들이 시설을 나와 같이 놀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더 열심히 활동했다.
- “상대방이 얼마나 주든, 자기가 다 주던 사람”
피플서울센터에는 아프리카 만딩고 춤을 배우는 자조모임이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서로 알아가며 춤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김동호는 거기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도록 춤을 췄다.
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로 교육을 나갈 때면, 김동호는 늘 신나고 즐거운 일을 꾸미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력자 송효정에 따르면, 그 시간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교육을 나가서 막상 동호가 기획한 걸 하면, 당사자들이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 거예요. 같이 춤을 추기로 했으면, 막 소리도 지르면서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잖아요. 근데 동호는 거기서 가만히 손뼉 치면서 혼자 웃고만 있는 식이었어요. 결국에는 조력자들이 중간에 들어가서 막 춤추고 어떻게든 끝내야 하는 그런…. (한숨)”
“속 터지는” 김동호 때문에 피플서울센터 안에선 다툼도 많았다. 그러나 김동호 특유의 낙관적인 성격은 당사자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동료지원가로서는 장점이 됐다. 그는 일자리를 갖고 싶은 발달장애인을 상담하고 교육하는 동료지원가로서, 장애 정도와 상관없이 누구와도 친하게 지냈다. 송효정은 “김동호는 상대방이 나한테 얼마나 주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다 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라고 표현했다.
발목이 부러졌던 그날에도 김동호는 동료지원을 하며 만난 친구와 함께 대천으로 기차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김동호의 어머니 김이숙 씨는 “동호가 그 친구한테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봤나 봐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기차 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동호랑 같이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대요. 여행 가는 날 아침에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평소와 다른 길로 가다가, 계단을 미처 못 보고 고꾸라졌던 거였어요”라고 전했다.
- 동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동호는 대천행 기차를 타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는 발목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던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추모식을 찾은 사람들은 허탈해하며 저마다의 이야기로 그를 기억했다.
김하은 활동가는 지난해 8월 피플퍼스트성북센터로 옮기기 전까지 김동호의 근로지원인으로 일했다. 김동호에게 ‘김하은’ 대신 ‘도라에몽’이라 불렸던 그는, 추모식에서 연신 울먹이며 추억을 더듬었다.
“동호의 근로지원인으로 반년 정도 있으면서 어찌나 에피소드가 많은지. 같이 발언문 쓰고서 목소리 크게 해야 한다고 센터 앞 당산공원 나가서 같이 함성 지르고 발언문 다섯 번씩 읽고 연습했던 거, 회의할 때마다 춤모임 얘기해서 지적받으니까 먼 하늘 쳐다보면서 눈물 한줄기 주룩 흘렸던 거, 언론 스크랩하면 동호는 늘 똑같은 철자법을 틀리니까, ‘-했섰서’라고 쓰니까 고치라고 맨날 얘기하고… 국회에서 건강주치의 제도 발표할 때, 서울시의회 앞에서 구호 우렁차게 외치면서 발언할 때, 동호가 진짜 잘해서, 티는 못 냈지만, 엄청 뿌듯했었어.”
김동호와 가장 친했던 김대범은 친구가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김동호는 만화영화 ‘쾌걸 근육맨 2세’ 주제가인 ‘질풍가도’의 가사를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직접 바꿨었다. 희망찬 음악이 흐르는 내내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김대범은 꿋꿋이 노래를 이어갔다. 김동호가 죽은 다음 날에도 ‘동호도 살아있었으면 같이 참여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참정권 기자회견을 다녀온 그였다. 노래를 마친 김대범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네 몫까지 열심히 싸워줄게! 잘 가라!”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누구 한 명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이현주는 김동호의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지난 7월 1일 김동호와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전국장애인부모연대가 주최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T4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서울역에서 하룻밤 자는 1박 2일 일정이 너무 힘들어서 다음 날엔 다들 먼저 갔어요. 그런데 동호는 안 가는 거예요. 그날 진짜 더웠거든요. 그런데 꿋꿋이 우산을 들고 자리에 앉아있어요. 제가 ‘동호, 왜 안 가?’ 물어보니 동호가 뭐라 했는지 알아요? ‘여기는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장례식이니까 내가 꼭 있어야 할 것 같아.’”
폭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김동호처럼, 그의 친구들도 폭우 속에 끝까지 그를 지켰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