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유형 무관하게 투표보조 받게 됐지만…
발달장애인 조력자에게 대리 서명하라는 투표사무원
휠체어 이용자는 못 들어가는 작은 기표소
“장애인 참정권 보장하라는 기자회견 좀 그만하고 싶다”

피플퍼스트서울센터 김동호 활동가와 박현철 소장은 가오나시 분장을 하고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의 유권자이다!’, ‘공직선거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피플퍼스트서울센터 김동호 활동가와 박현철 소장은 가오나시 분장을 하고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의 유권자이다!’, ‘공직선거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지난달 10일, 선거인의 장애유형과 무관하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법원 결정이 나왔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지난 2년간 끈질기게 문제제기 한 끝에 얻어낸 결과다.

4일 오전 6시부터 진행된 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는 법원 결정이 나온 후 첫 투표다. 발달장애인이 투표소에서 조력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니 투표사무원은 서명, 본인확인 등을 조력자하고만 하려 했다. 장애인이 아닌데 왜 기표소에 두 명이 함께 들어가냐고 따지는 사무원도 있었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아래 참정권대응팀)은 4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시 종로구 청운효자동사전투표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참정권이 아직도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현실을 규탄했다.

투표하는 가오나시들. ①가오나시가 ‘공직선거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투표소로 가고 있다. ②투표소에 도착해서는 손 소독을 했다. ③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④투표사무원에게서 투표용지를 받고 있다. ⑤기표 도중 ‘장애인이 아닌데 왜 둘이서 기표소에 들어가나’라는 문제제기를 받았다. ⑥투표함에 기표한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사진 하민지
투표하는 가오나시들. ①가오나시가 ‘공직선거법 개정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투표소로 가고 있다. ②투표소에 도착해서는 손 소독을 했다. ③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④투표사무원에게서 투표용지를 받고 있다. ⑤기표 도중 ‘장애인이 아닌데 왜 둘이서 기표소에 들어가나’라는 문제제기를 받았다. ⑥투표함에 기표한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사진 하민지

- 2년 만에 되찾은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받을 권리’… 차별 여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는 지난 2020년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거사무지침에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에 관한 내용을 돌연 삭제했다. 공직선거법에 시각·신체(지체)장애인만 보조받을 수 있다고 나와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난달 10일, 법원의 판결로 발달장애인도 다시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됐다.

4일 오전, 청운효자동사전투표소에는 두 명의 가오나시가 등장했다. 가오나시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요괴다. 몸이 반투명 상태라 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플퍼스트서울센터의 박현철 소장과 김동호 활동가가 가오나시 분장을 했다. 이들은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다. 공직선거법에 명시조차 되지 않아 유권자임에도 유령 취급 받는 발달장애인의 현실을 가오나시 분장으로 표현했다.

두 사람은 가오나시 분장을 한 채로 투표소에 입장했다. 이들은 투표사무원에게 조력자와 함께 기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투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박 소장이 신분 확인을 하기 위해 가오나시 분장을 벗었다. 박 소장은 스스로 신분 확인을 할 수 있었고 기표할 때만 조력자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투표사무원은 박 소장이 발달장애인인 것을 확인하고선 그의 조력자인 김수원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하고만 소통하려 했다. 사무원이 김수원 활동가에게 “발달장애인 ‘대리인’이시죠? 정자로 서명해 주세요”라고 요청하자 김수원 활동가는 “본인(박 소장)이 하실 수 있는데요?”라고 설명했다.

김동호 활동가는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과 함께 투표소에 입장했다. 그러나 투표사무원은 김 활동가에게 “장애인 아니신데 왜 기표소에 둘이 들어가세요?”라고 따졌다. 김성연 사무국장은 사무원에게 법원 결정 내용을 설명해야 했다.

투표하고 나온 박 소장은 “발달장애인 동료 중엔 글자를 못 읽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기표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림 투표용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 투표용지를 도입하라고 오래 요구해 왔는데 언제 도입되는지…”라고 말했다. 김동호 활동가는 “투표용지를 접는 게 항상 어려웠는데 이번에 지원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김성연 사무국장은 “개선돼야 할 게 너무 많다. 투표사무원은 발달장애인 조력자의 이름, 그와의 관계를 묻더니 서류에 기록했다. 법원 결정엔 없는 내용이다. 개인정보 제공에 응하지 않을 권리도 있지 않냐고 물었지만 사무원은 규정이라 어쩔 수 없다고만 답했다. 문제제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수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나는 스스로 기표할 수 있지만 기표소 테이블이 너무 높아 팔이 닿지 않았다. 내 휠체어가 큰 편인데, 휠체어가 기표소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너무 불편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현장. ‘우리가 투표를 못하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다! 장애인의 완전한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있다. 사진 하민지
기자회견 현장. ‘우리가 투표를 못하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다! 장애인의 완전한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있다. 사진 하민지

- 민주적 선거제도 역사 70년, 발달장애인은 유령이었다

“나는 언제쯤 제대로 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선거 날만 되면 괴롭습니다. 2월 14일에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국민의당에 찾아가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선거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지만 국민의당은 연락이 안 됐고 국민의힘은 만들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정당들은 발달장애인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문윤경 한국피플퍼스트 대표)

김성연 사무국장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의 옆에 그림 투표용지를 표현한 피켓이 있다. 사진 하민지
김성연 사무국장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의 옆에 그림 투표용지를 표현한 피켓이 있다. 사진 하민지

기자회견에서는 발달장애인이 유권자로서 인정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김성연 사무국장은 “1948년 5월 10일, 민주적 선거제도가 도입돼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가 시행됐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났지만 발달장애인은 유권자로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공직선거법에는 발달장애인이 명시조차 되지 않았다. 발달장애인을 투표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인가? 국가는 발달장애인을 유령 취급하지 말고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하라. 이 같은 기자회견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투표보조 관련 소송 대리인인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중앙선관위는 ‘공직선거법에 시각·신체(지체)장애인만 투표보조 받을 수 있게 돼 있다’는 말만 하지 말고 질문을 바꿔야 한다. 발달장애인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묻고 이를 준비해야 한다”며 “이번 소송으로 선거사무지침은 바뀌었지만 법은 그대로다”라고 강조했다.

소송 대리인 이수연 법조공익모임 나우 변호사는 “그림 투표용지를 도입해 달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 27조는 공직선거 후보자와 정당이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29조에 따라 한국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라며 “한국 헌법과 법률, 국제협약에 따라 발달장애인 선거권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명백한 불평등이고 차별”이라고 성토했다.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적힌 피켓. 사진 하민지

참정권대응팀은 주요 정당, 국회, 국가를 향해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한 투표소 선정 △선거 전 과정에서의 수어통역과 자막제공 의무화 △정당 및 후보자 토론 시 토론자 일대일 수어통역서비스 제공 △시각장애인 점자공보 안내물, 비장애인과 동등한 제공 의무화 △선거사무원 모두에게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충분한 교육 추진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의 참정권 공정성 보장 제도 마련 △발달장애인 등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 선거 정보제공 △지역별 선거 설명회 및 모의투표 사전 개최 △투표보조 시 공적 조력인 배치 △그림 투표용지 도입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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