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자녀로 한국서 50년 산 왕 씨
남편과 이혼 후 원가정 탈출해 거리노숙
현재 이주여성쉼터서 생활 중
건보료 480만 원 체납돼 강제 추방될 위기
외국인청은 장애 있단 이유로 귀화 심사 거절
대만 국적의 지적장애여성 왕 씨. 그는 한국에서 50년을 살았고, 한국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한국어 외 다른 나라 말은 할 줄 모른다.
그러나 왕 씨는 앞으로 한국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귀화 신청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지적장애가 있어 귀화 심사를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왕 씨는 다음 해 5월에 강제추방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대만에서 살아야 한다.
이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 시민사회단체는 28일 오후 1시, 수원출입국외국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왕 씨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그가 한국에서 장애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 부과된 줄도 몰랐던 건보료 480만 원, 왕 씨는 쫓겨날 위기
왕 씨는 1973년, 충청남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태어난 어머니와 부산에서 태어난 아버지 모두 대만 국적을 가진 화교다. 따라서 왕 씨도 자연스레 대만 국적을 갖게 됐다.
28살이던 2000년, 왕 씨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이듬해 8월, 딸을 낳았으나 이후 이혼하고 본가로 돌아갔다. 2018년에는 집을 나와 거리노숙을 하다 폭력을 당했다. 이주여성보호시설 몇 곳을 전전하다 2020년 8월부터 현재까지 오산이주여성쉼터에서 지낸다.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전 남편과 딸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중증지적장애인인 왕 씨는 현재 강제추방 위기에 처했다. 건강보험료 36개월분, 총 480만 원이 체납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7월 14일부터 ‘한국 체류 외국인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 의무화’를 시행했다. 이 정책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왕 씨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매월 왕 씨에게 보험료 13만 원을 부과했다. 이는 전체 건강보험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증지적장애가 있는 왕 씨는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웠다. 돈을 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체납고지서에 적힌 480만 원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왕 씨는 쉼터 동료들의 지원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 오산지사에 찾아가 결손처분을 신청했다. 결손처분은 ‘일정한 사유 때문에 조세를 징수할 수 없다고 인정될 경우 납세의무를 없애는 일’을 뜻한다. 즉, 왕 씨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체납된 건강보험료를 감액하거나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오산지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사망 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결손처분이 불가능하며 건강보험료 감액 적용도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이대로라면 왕 씨는 낯선 나라인 대만으로 추방돼야 한다. 왕 씨와 시민사회단체는 이에 관해 지난달 27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다.
- 장애 있어서 귀화 심사받을 수 없다?
왕 씨와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7월, 수원출입국외국인청에 간이귀화를 신청했다. 한국인으로 인정되면 체납된 건강보험료에 대해 결손처분을 받을 수도 있고 장애등록을 한 후 여러 지원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거절당했다. 수원출입국외국인청은 왕 씨의 장애를 이유로 꼽았다. 왕 씨가 중증지적장애인이라 종합평가와 면접심사를 통과할 수 없고 생계유지능력을 증명할 서류도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십 평생을 한국에서 산 왕 씨는 한국인으로 심사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간이귀화는 한국에서 특별한 혈연적·지연적 결합관계에 있는 사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할 때, 귀화 요건을 완화해 주는 것을 뜻한다. 간이귀화 요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대한민국에 3년 이상 계속하여 주소가 있는 사람 (2)대한민국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부 또는 모가 대한민국에서 출생한 사람 (3)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 사람 (4)종합평가에서 100점 만점 중 60점 이상을 득점하고 면접심사에서 적합평가를 받은 사람 등이다.
권영실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왕 씨가 국적법에 따라 종합평가·면접심사 면제 대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국적법 시행령 4조의2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 장관이 인정하는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종합평가·면접심사를 면제할 수 있다. ‘특별한 사유’는 법무부가 마련한 국적업무처리지침에 설명돼 있다. 해당 지침 6조에는 ‘장애 등 청장 등이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종합평가를 면제받을 수 있다.
즉, 수원출입국외국인청장이 왕 씨를 ‘장애 등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면 법무부 장관은 이를 ‘특별한 사유’로 고려해 왕 씨의 종합평가는 물론 면접심사까지 폭넓게 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계유지능력 입증서류의 경우에도 국적업무처리지침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왕 씨처럼 장애인등록을 할 수 없는 상태면 종합병원에서 발급한 장애정도심사용 진단서, 소견서 등 증빙자료로 대체해 완화된 요건으로 서류를 제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권영실 변호사는 “관련 법령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국적업무처리지침을 확대 적용하지 않는다면 왕 씨는 끝까지 귀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경제활동이 어려운 장애인에게 비장애인 기준의 경제력 입증을 요구하는 건 장애인에 대한 심각한 차별행위”라고 규탄했다.
한국에서 살겠다는 왕 씨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왕 씨를 지원하는 오영미 오산이주여성쉼터 원장은 “왕 씨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다. 왕 씨의 정체감은 영락없는 한국인이다”라고 말했다.
왕 씨와 시민사회단체는 기자회견 이후 수원출입국외국인청과 법무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