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아무것도 건설되지 않은 땅의 말들
내가 없는 지난 3년간 박주희, 경민선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춤추는허리(아래 춤허리) 활동을 계속해 나갔어요. 춤허리는 토론연극을 했고, 방송회관에서 아주 큰 규모의 공연을 올리기도 했어요. 2006년 합류한 나는 조용히, 열심히 따라갔죠. 장애여성공감(아래 공감)의 조직 규모가 커지고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이전에는 잘 만나지 못했던 장애여성회원들이 많이 늘었어요. 장애가 더 중하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유형의 장애여성이 많았죠. 이들은 조미경이나 배복주와는 다른 장애여성들인 거예요. 정치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연극을 좋아하기에 춤허리 활동을 하는 분들, 자신이 겪는 경험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그것을 운동의 언어로 전환하지는 않은 사람들이 여럿이었어요. 내가 알던 공감의 언니들은 말을 격조 있게 했단 말이죠(웃음). 그런데 이 20대 후반의 장애여성들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을 썼어요.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마구 솟아나는 말들. 우리는 그걸 ‘나대지’(건물 등이 없이 비어 있는 땅)라고 표현했죠. 우리는 나대지다. 저잣거리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여기는 민중의 삶이다. 춤허리 연습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울지 말자. 화내지 말자. 소리 지르지 말자. 그리고 밥을 빨리 먹자.”
밥을 빨리 먹자니? 장애로 인해 늦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2시간 동안 먹는 건 좀 심하지 않냐…
공주처럼 꾸민, 예쁘장한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이 있었어요. 연애를 잘하는 거 같고, 애인을 춤허리에 데려오기도 했는데, ‘아, 여기서도 연애가 문제란 말인가…’, ‘쟤는 애인을 왜 여기 데려오나…’ 그렇게 생각했죠. 춤허리에서 같이 활동하며 서로 점점 잘 맞아 갔는데 갑자기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그러더니 다시 돌아와서 말해.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네요. 중증이” 중증장애여성을 오라고 하는 데가 없다는 거야. 이 나대지의 언어. 너무 좋지 않나요? 그 사람의 그 쨍한 말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래, 그럼 잘해보자”라고 했어요. 지금 춤허리의 연출이자 배우, 서지원이었죠.
서지원은 내가 처음으로 막말을 한 장애여성이예요. 어느 날 “쓰레기 같다”고 말해버렸죠. 지원 역시 나를 함부로 대하죠. 배복주와 서지원은 내가 유일하게 비웃을 수 있는 장애여성 리스트에 올라있는 이름이에요. 그건 우리가 서로의 낙담과 실패를 목격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일 거예요. 2010년 춤허리는 사회적 기업이 되기를 시도하며 배우들과 비장애인 스텝이 새로이 합류했어요. 단체 규모와 활동 범위가 커지는 과정에서 서지원과 내가 춤허리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했는데 우리가 잘 해내지 못했어요. 춤허리는 요란하기만 할 뿐 결과물 없이 예산만 소모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나갔죠. 돈이 바닥나는 가운데서 서지원과 나는 교육연극을 만들었고 서울시교육청에서 오전 10시에 하는 장애이해교육을 연 40회씩 진행했어요. 우리가 춤허리 붕괴의 마지막 저지선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 시간 동안 갈등도 겪고 실패를 공유했죠. 서지원 한 사람이 끝까지 남아 있었기에 춤허리를 춤허리로서 계속 이어올 수 있었어요.
나대지 위에서 만들어간 춤허리의 시간에서 또 한 명 중요한 동료를 꼽는다면 조화영이에요. 2010년부터 공감에는 발달장애여성들의 자조모임을 통한 참여가 크게 늘었어요. 그 이전까지 공감은 주로 성폭력 사건 지원현장에서 발달장애여성들을 만났지만, 이제는 공감의 회원으로서 이분들과 관계를 맺게 된 거죠. 발달장애여성들이 공감 회원의 절반을 넘으면서 공감은 다시 한번 갱신되어야 했어요.
화영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잘 대해주셨던 선생님과 내가 닮았다는 이유로 내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요. 2015년 화영이 춤허리 공연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춤허리는 발달장애여성 배우와 활동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죠.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으니 답을 찾지 못한 채로 화영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의 경험을 몸과 말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사람이었어요. 발달장애여성의 에피소드를 배우로서 연기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화영은 대본을 손으로 필사하면서 외웠고, 캐릭터와 상황에 대한 분석 능력은 타고났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감각적이었죠.
서지원과 나는 춤허리가 2010년부터 시작한 공연 ‘거북이라디오’ 시리즈에 발달장애여성의 이야기를 넣었어요.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장애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억압을 풀어놓는 이 시리즈에서 조화영은 물음은 던지죠. “왜 다들 내 보호자가 되려고 하나요?” 거북이라디오3편(2015), 불만폭주 라디오(2017~2018)는 화영의 이야기와 몸을 만나 더 확장되었고 팬들도 많이 생겼어요. 이 과정에는 긴 시간 화영 곁에서 배우 화영과 춤허리가 만날 수 있는 면적을 넓혀준 춤허리의 배우 김미진 님이 있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어요.
“왜 언니들은 맨날 싸우고, 울고, 삐져요?”
화영이 어느 날 내게 물었어요.
“화영 님이 저보다 더 자주 만나는 사이니까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왜 그럴까요?”
“의견이 달라서 그러겠죠. 사실은 일곱빛깔무지개(공감의 발달장애여성 합창단)도 맨날 싸워요. 흐흐흐.”
“네, 화영 님 춤허리는 의견이 달라서 맨날 싸우는 곳이에요. 계속 그럴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으으음, 조금 힘들지만 배우가 꿈이니 괜찮아요. 의견 다르면 싸울 수 있죠.”
화영을 계기로 발달장애인-비발달장애인 간의 공동작업 경험이 공감 전체에 쌓여갔어요. 쉬운 말로 말하기, 그저 친절하기, 이해하기가 아니라 상황을 조력하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토론시간을 확보하기. 우리는 동료가 되었어요.
- 시설사회
2005년 공감은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아래 숨센터)을 개소했어요. 가정과 장애인시설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장애인들은 1990년대 말부터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 IL)운동을 전개했죠.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지향하지만, 공감은 장애여성에 대한 이해와 젠더 관점이 부족하면 자립생활운동 안에서도 장애여성의 독립을 이야기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공감은 이러한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면서 그 이름을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로 칭했고, 젠더와 자립생활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의제들에 관심을 가졌어요. 장애인거주시설에는 왜 장애남성이 훨씬 더 많을까? 만약 장애여성이 시설에 덜 간다면, 이는 또 다른 공간에서 그들의 노동과 섹슈얼리티가 착취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까? 장애여성의 독립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나와 선택권을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상의 관점과 물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탈시설 투쟁을 만들어 낸 장애인분들이 시설을 나와 마로니에 공원에서 농성을 했어요. 공감도 결합했죠. 일주일에 한 번씩 농성장에 나갔어요. 숨센터가 장애인 활동지원사업을 시작하면서는 시설을 나온 장애인들의 삶을 지원하는 일에도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죠. 2011년에는 영화 ‘도가니’가 개봉하면서 광주인화학교에 있었던 성폭력 사건이 조명을 받았어요. 공감은 2001년부터 장애여성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했고 이를 통해 장애인거주시설 내에서, 탈시설-독립생활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에 대응해왔어요. 도가니 사건으로 장애인 성폭력 문제가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정부가 후속대책으로 장애인을 위한 성교육을 제도화했고, 공감은 훨씬 더 큰 역할을 해낼 수밖에 없었죠. 2012년 공감은 열과 성을 다해서 발달장애인 성교육과 성폭력 예방을 위한 상담원 교육을 시행했어요. 교육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발달장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권교육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사람이 부족했기에 저도 상담원 양성과정과 학교 성교육 현장에 열심히 나갔어요.
탈시설과 IL(장애인자립/독립생활) 그리고 젠더에 관해 공감이 숨센터 설립 당시부터 고민했던 주제들은 2010년대에 들어서 구체적인 사건과 현장의 문제로 제기되었고, 이 주제들은 서로 교차했어요. 공감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IL과 젠더’라는 키워드에 주목했죠. 공감 초기 함께 활동했던 진경, 노들야학에서 만났고 공감에서 다시 모이게 된 조미경, 김상희, 그리고 내가 주도하여 2017년 그간의 고민과 연구를 토대로 ‘IL과 젠더포럼’을 열었어요. 우리는 탈시설운동에서 ‘시설’과 ‘지역사회’라는 이분법의 한계에 주목했어요. “소위 가족과 함께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장애, 성별 정체성, 나이 등을 이유로 자기결정권과 삶의 주도권이 박탈”되는 존재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탈시설운동이 단지 ‘시설’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할 때, 여성과 소수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겪는 시설화의 문제는 장애인운동 안에서 의제화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나영정, 「누구와 함께 시설사회에 맞설 것인가」, 『시설사회』, 공감 엮음, 와온, 2020, 20쪽).
다른 한편으로 공감은 성과 재생산이라는 화두에도 주목했어요. 2013년과 2014년에는 강동구보건소의 장애인 건강지원사업을 계기로 장애인의 성과 재생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공감은 장애여성의 중요한 권리로서 모성권에 관한 논의를 장애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전반으로, 특히 발달장애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의제로 확대했어요. 2015년과 2016년 이 작업은 ‘성과 재생산 포럼’으로 발전했죠. 성과 재생산을 단지 여성의 임신, 출산에 대한 선택권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지금의 체제 안에서 어떤 생명이 태어나고, 어떠한 미래가 보장되며, 누가 무슨 이유로 성과 재생산 권리를 박탈당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고민”으로 나아가려 노력했어요(나영정, 위의 글, 21쪽). 이 작업은 결국 탈시설-IL운동과 만났어요. 우리는 가족 안에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도시와 각종 보호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주체들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억압을 탈시설운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죠.
공감이 IL과 젠더, 성과 재생산권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2010년대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결국 포착한 것은, 섹슈얼리티를 시설화하는 ‘시설사회’라는 구조였어요.
탈시설을 하여도 장애인을 배제하는, 지역사회라는 또 다른 시설에 갇혀 지내지 않기 위해 탈시설을 이야기할 때 ‘무엇으로부터 탈(脫)할 것인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시설화는 지배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보호/관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사회와 분리하여 권리와 자원을 차단함으로써 ‘불능화/무력화’된 존재로 만들며,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제한하여 주체성을 상실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전제로 할 때, 탈시설 운동의 목적과 의미는 시설화를 유지하는 지배권력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여 상실한 삶의 주체성과 권리를 되찾고, 나아가 시설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상성중심의 사회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 하겠다. (조미경, 「장애인 탈시설운동에서 이뤄질 ‘불구의 정치’간 연대를 기대하며」, 『시설사회』, 공감 엮음, 와온, 2020, 285쪽)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