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장애여성공감 사무실에서 이진희 활동가. 벽에는 ‘정상성에 도전하는, 소수자와 연대하는 장애여성’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장애여성공감 사무실에서 이진희 활동가. 벽에는 ‘정상성에 도전하는, 소수자와 연대하는 장애여성’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 아무렇지 않게 책상 의자를 집어넣는 몸

활동지원제도는 당연히 필요하고 사회와 국가의 의무죠. 다만 활동지원제도가 없던 시절 우리가 서로의 몸을 배우고 그 안에서 친밀감과 텐션(긴장)을 주고받던 경험이 지금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이 과정이 장애여성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장애여성공감(아래 공감)에서는 “몸이 먼저 가네”가 최고의 칭찬이에요. 주고받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들어지는 거죠. 청각장애인 분이 계시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노트북을 가지고 타이핑을 하는 몸이 되는 거예요.

2002년 공감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기억나요. 그때는 정말 좁은 사무실을 썼어요. 당시 공감에 온 비장애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책상 의자를 넣고 다녀라”였어요. 휠체어가 지나다녀야 하니까요. 대학에서 월경 페스티벌을 기획하던, 섬세하게 정치적으로 각성한 이 활동가들이 좁은 사무실에서 책상 의자를 넣는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거죠.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노들에서 활동했지만 야학 교사들의 업무 공간에는 장애인이 없었거든요. 자기 언어를 더 갖고 싶고 그 언어로서 사회운동, 동료들을 일구고 싶은 이 멋진 20대 중후반의 비장애인 활동가들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몸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기는 쉽지 않았던 거죠.

동시에 이 비장애인 활동가들의 몸과 언어가 없었다면 지금의 공감도 있지 않았겠죠. 공감 초기부터 활동가로서 공감을 지키면서 공감의 운동이 재생산권, 성소수자 운동과 교차하도록 이어준 타리, 공감의 문화 운동에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고, 춤허리의 도전을 함께 지켜준 니마, 공감다운 운동이 무엇일지 나에게 언제나 질문해준 진경 등 함께 한 이들이 정말 많았어요.

이진희 활동가가 화분을 들고 있다. 이 화분은 공감 10주년이었던 2008년에 선물 받은 화분이다. 올해 공감은 24주년을 맞이했으니, 이진희 활동가와 동고동락한 사이. 사진 현다혜
이진희 활동가가 화분을 들고 있다. 이 화분은 공감 10주년이었던 2008년에 선물 받은 화분이다. 올해 공감은 24주년을 맞이했으니, 이진희 활동가와 동고동락한 사이. 사진 현다혜

이렇게 다양한 몸들이 모인 공감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말을 어디까지 어떤 위치에서 꺼낼 것인가 늘 고민해요. 장애여성은 자기 경험을 어디까지 의미화할 것인가. 그것이 자신의 운동과 얼마나 접합이 되는가. 그냥 말뿐인 것은 아닌가. 비장애여성은 어느 위치에서 어떤 관점으로 말할 것인가. 그래서 공감 활동가들은 글 쓰는 일을 어려워해요.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글로 남기려 하지만, 특출난 한 두 사람이 글을 써가는 것은 지양해요. 말하기도 마찬가지죠. 쓰고 말하기를 최대한 모두가 다양하고 평등하게 경험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탁월한 1인의 독점이 이루어지는 건 위험하다는 감각이 있어요. 공감에는 여러 사람이 흘러들고 또 흘러가지만, 우리는 저수지가 되고자 해요. 장애여성을 포함해 누구든 리더가 될 수 있는 속도를 유지하며, 서로의 실패에 기꺼이 연대하면서.

물론 지금 여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고, 때로는 너무 달라서 짜증이 나요. 어쩔 수 없이 갈등을 겪는 거지. 공감에서는 이러한 관계들을 끝까지 밀어 붙여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요.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고 표현해요. ‘서로 어디까지 직면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역량일 것이다.’

지난 8월 18일~9월 8일,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은 유럽으로 해외연수를 떠났다. 8월 18일, 인천공항에서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이 ‘탈시설 그리고 성과 재생산권리 연구’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김다정, 김난슬, 조경미, 그 앞에는 김미진, 이진희, 진성선, 유진아 활동가가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8월 18일~9월 8일,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은 유럽으로 해외연수를 떠났다. 8월 18일, 인천공항에서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이 ‘탈시설 그리고 성과 재생산권리 연구’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김다정, 김난슬, 조경미, 그 앞에는 김미진, 이진희, 진성선, 유진아 활동가가 있다. 사진 현다혜

- 코미디언이 될 거예요

2017년, 나는 사무국장으로서 공감 내부 활동에 집중하던 10년의 시간을 지나 외부 연대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아래 차제연)에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참여했어요. 공감은 2018년 20주년을 맞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선언문을 냈어요. 운동이 운동답기 위해서 불구의 존재들과의 연대, 끝없는 불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기예요. 차제연 동료들과 전국을 순회하는 평등버스를 타고 하루에 2~3개 지역에 들러 활동가들을 만나고 지역의 의제를 배웠죠.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해야 할 일이 많았어요. 나는 이런 일을 두려워하고 잘 못하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조금은 익숙해졌어요. 매 순간 밀려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어떻게 서로에게 잘 의존하며 돌파할 것인가는 공감에서 우리가 해온 일이죠. 차제연 활동을 하면서도 이 ‘실패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2020년 당시 공감의 배복주 대표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미경 언니와 내가 공감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어요. 미경 언니는 숨센터 소장이었는데 정말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는 동안 본래 가지고 있던 장애(뼈가 쉽게 부러지는 골격계 질환) 이외에 다른 장애들이 더 생겼지만, 미경 언니는 자신의 몸이 얻은 장애를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새로운 몸의 시각으로 활동을 이어갔어요. 그런데 공감의 공동대표가 된 후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미경 언니가 당장 공감에서 활동하지는 못하는 지금 어느덧 내가 공감의 중심에 있어요. 이것은 참 모순이기도 하죠. 활동가의 자기모순이랄까요. 나는 특정한 힘이 독점하는 것에 늘 반감을 가지고 운동을 해왔어요. 거쳐왔던 모든 공간에서 그랬죠. 문화예술 활동도 다르지 않아요. 특정 예술계나 장르, 영역으로 대표되고 그것이 점유하는 힘에 반대하는 예술을 춤허리와 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공감의 대표로서 나에게 권한과 책임이 집중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거죠.

장애여성공감 사무실에서 이진희 활동가와 진은선 활동가. 사진 현다혜
장애여성공감 사무실에서 이진희 활동가와 진은선 활동가. 사진 현다혜

그래도 공감은 갈등과 충돌, 긴장을 중요시하는 조직이고 언제든 그것을 끝까지 대면하려는 문화가 있기에, 논의체계, 업무추진 방식, 역할과 책임 배분의 균형, 소통과 갈등 해소를 위해 조직 전체가 늘 노력해요. 물론 나 개인이 해야 할 몫도 있죠. 늘 곁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려주는 친구들이 다행히 있어요. 특히 장애여성 친구와 토론이 가능한 관계를 늘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그렇지만 나의 이 활동 역시 결국은 갱신되어야 할 것이겠죠. 조미경, 이진희 때와는 다른 방식의 내용을 또 이곳의 사람들이 만들지 않겠어요? 공감의 젊은 활동가 진은선(현 숨센터 소장)의 언어로 듣는 공감의 활동은 또 다르겠죠. 나는 미련이 없어요. 조직 안에서 많은 기회를 얻었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했어요. 내가 이보다 더 잘할 순 없다고 생각하기에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아요. 여기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줄도 몰랐어요. 그냥 여러 장애여성과 관계가 이어지면서 활동도 이어진 것 같아요. 활동을 하면서 관계가 이어졌다기보다는, 그 관계가 이어지며 활동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던 거예요. 항상 그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티키타카가 잘 됐던 거죠. 배복주랑 있을 때 그 느낌, 조미경과 있을 때의 느낌, 김상희, 서지원, 조화영, 진은선과 있을 때의 느낌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며칠을 밤새도 정말 에너지가 계속 나올 만큼. 그런 동료와의 관계들이 나를 이끌었어요.

3년간 잠수를 타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공감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어요. 그럼에도 떠나지 못한 이유는 우선 조직이 부여한 내 몫의 역할과 책임이 있어서지만, 무엇보다 조미경, 배복주보다 먼저 활동을 정리하고 싶진 않아서였어요. 장애여성운동 선배들이 항상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걸 봐와서, 나는 선배들이 활동을 잘 마무리하고 떠날 수 있게, 같이 정리하고 배웅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그리고 공감에 많은 이들이 오가는 동안, 장애여성운동의 이 역사를 이어가는 이음새가 되고 싶었어요.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한 이유들이 존재하는 한, 어렵고 재미있는 이 장애여성운동을 계속해보고 싶어요.

장애여성의 경험과 위치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며 정상성을 강요받는 다른 몸들과 만난다. 그리고 불구의 존재들과 함께 폭력적인 운명을 거부한다. (공감 20주년 기념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2018)

수상소감 이야기하듯이 고생한 사람들을 다 읊고 싶은데 그건 오버겠죠. 그건 나중에 코미디에서 해야겠어요. 앞으로의 꿈이 코미디언이거든요. 나는 스탠딩 코미디언이 될 거예요.

유럽으로 해외연수를 떠나는 인천공항에서 이진희 활동가. 사진 현다혜

*                    *                    *

이진희는 한국 장애인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팽창기에 20대를 보냈고, 그의 시간은 곧 한국 장애여성운동의 시간이기도 했다. 혼란과 격변의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조직, 생각과 이념 사이에 갈등과 혼란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훨씬 더 민감한 몸을 지녔기에 이 균열의 조짐을 온몸으로 먼저 겪는다. 내가 보기에 이진희는 바로 그런 몸이다. 사회구조의 변혁이라는 과제와 개인의 몸 경험이 종종 직면하는 미묘한 대립. 젠더와 언어, 장애유형과 학식을 기준으로 눈에 띄지 않게 이뤄지는 권력의 분배. 진희는 각 단계에서 이 균열을 감지했지만 이를 해소하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때로 조직을 떠나고 잠수를 탔다.

그러나 그 시간을 모두 통과하고, 자신이 있는 공간의 ‘저지선’이 되기를 끝까지 실천하면서, 진희는 진희만이 가능한 몸과 언어를 얻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스탠딩 코미디언이라는 진희의 꿈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한다. 코미디야말로 우리의 일상부터 문화, 정치의 영역까지 온갖 곳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갈등과 긴장, 균열 사이를 가로지르다가, 마침내 그 자리의 모두를 웃게 만드는 가장 기묘한 예술이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진희가 ‘커뮤니티 밖’ 사람들에게 웃기지 않으면 어쩌냐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프로덕션 기획안은 다음과 같다. 진희의 공연을 보고 싶은 관객들은 필수적으로 ‘억압된 관객에서 자유로운 코미디언으로!’라는 2박 3일 캠프를 가야 한다. 관객은 다 같이 해변에서 물놀이를 한다. ‘혁명의 예행연습’으로서 토론연극에 참여한다. 이 시간 동안 관객은 모두, 장애가 있든 없든 서로를 위해 활동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하자. 2박 3일 압축적으로 보낸 후 관객은 마지막 시간 진희의 스탠딩 코미디를 관람한다.

물론 캠프 따위 없어도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타자’로 여겨지는 상대를 통해 자신의 몸 전체를 갱신해본 사람, 기꺼이 세상과 불화하며 ‘불구의’ 몸으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 이런 관객이라면 아무 조건 없이 쇼에 입장해도 충분하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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