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아,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돼.”
서울 영등포의 한 건물 6층에 위치한 피플퍼스트서울센터(아래 피플센터) 회의실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발달장애인 당사자 활동가 박경인의 말이다. 11월 말 피플센터의 주간 회의를 참관한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회의시간은 휴식도 없이 3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회의 안건은 ‘분리수거 시 빨대를 3등분으로 잘라 버리면 충분한가, 5등분으로 자를 필요가 있는가’부터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의사소통지원 조항이 왜 선거관리위원회의 쉬운 선거공보 제공의무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가까지 방대했다. 박현철 센터장과 송효정 사무국장은 커다란 모니터를 뒤에 두고 앉아 회의자료를 공유하면서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고 실시간 적어넣었다.
이날 중요한 주제 중 다른 하나는 탈시설장애인연대의 공동대표로 위촉된 경인이 전주의 간담회에 다녀온 소감과 그곳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경인은 간담회에서 자신처럼 탈시설을 한 다른 발달장애인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 발달장애인은 없었다. 휠체어 탄 지체장애인만 있는 자리에서 경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조금 위축됐다. 경인은 이날 회의시간 내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는 거침이 없었지만,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발언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계단 위 단상에 앉은 비장애인들이 이야기를 하는 토론회에서 나 혼자 단상 아래 휠체어용 책상에 앉아 의견을 말하는 경험과 유사할까? 나는 내 입장에 비춰서 경인의 상황을 상상하다가, 한편으로 휠체어가 일정한 권력 불균형의 상징으로서 이야기되는 이 현실이 조금 이상하고 새로웠다.
피플센터에는 7명의 발달장애인 활동가와 6명의 비장애인 활동가, 3명의 근로지원인이 함께 일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활동가 7명 모두 각각의 개성과 관심 분야가 분명하다. 피플센터는 최근 발달장애인 참정권 이슈, 발달장애인 탈시설 등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발달장애인 운동단체이자 장애인자립생활센터다. 송효정은 2017년 피플센터 설립부터 함께 한 비장애인 활동가로, 그전에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서, 탈시설운동 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에서 활동했다.
나와 송효정은 2004년 만났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에서 ‘직장체험’이라는 이름이 붙은 일종의 인턴십을 같이 했다. 효정은 늘 자기 일을 열심히 했고, 내게는 일을 대충 한다며 ‘방만(하다)’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막걸리를 마시고 커피를 같이 먹었다. 둘 다 집회 현장을 무서워했는데, 무서운 일에 마음 쓰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나와 달리 효정은 겨우 2년쯤 지나자 이순신 동상에 올라가 시설문제 해결을 외치며 전단지를 뿌리는 활동가로 거듭난다.
피플센터 회의가 끝나고 효정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렇게 ‘능력 있는’ 활동가들이 발달장애인운동의 주체로 나선다는 점이 참 좋으면서도, 결국 이 운동에서도 우리는 ‘능력’에 주목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된다는 취지의 말을 꺼냈다. 효정은 이 말을 조금은 인정하면서도, 피플센터가 3시간 넘는 회의시간 동안 당사자를 포함해 다양한 구성원들이 의견을 내며 여러 주제를 두고 토론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이날에 앞서 진행한 여러 번의 인터뷰에 이어) 다시 강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말을 정확히 활동가 송효정에게 되돌린다. 피플센터라는 이 공간에서 지금의 동료들과 오늘날과 같은 활동을 하기까지, 송효정을 이끈 것은 탁월한 능력이나 엄청난 용기, 영웅적인 신념, 탄탄한 사회적 배경 따위가 아니었다. 효정의 이야기는 우선 꽃동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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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보며 살고 싶은 아이
1982년 김제에서 태어나서 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넘겼죠. 10살 때 팔을 다쳤는데 다친 부위 조직이 떨어져 나가며 폐혈관을 막은 거예요. 양쪽 폐가 거의 기능을 못했어요. 지금과 달리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어요. 중환자실에서 3개월 정도 살면서 임상실험에 참가했는데, 참가자 중에 살아남은 아이가 나밖에 없다고 해요. 정말 극적으로 나았죠. 수술받은 왼쪽 팔은 다 안 펴져요. 약간 크기도 다르고.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거쳤어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체력장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었죠. 뛰면 숨이 차니까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모아둔 돈을 병원비로 모두 쓰고 내가 태어날 때 살았던 전북 김제의 시골로 돌아갔어요. 중학교 때부터 김제에서 전주로 통학하는 생활을 했는데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성적을 받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죠. 아빠의 가정폭력이 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너무 힘들게 산다는 걸 인식했어요. 엄마와 남동생을 돌보는 일이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충북 음성 꽃동네에 있는 장애아동 시설에서 일주일 정도 봉사를 했어요. ‘천사의 집’이라는 이름이었죠. 정말 작은 영유아들이 있었어요. 아이들을 돌보면서 강한 충족감을 느꼈던 거 같아요. 이 사람들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신생아들 가운데는 장애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가 모두 있었는데, 입양을 가지 않은 조금 큰 아이 중엔 장애아들이 많았어요. 꽃동네가 운영하는 대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에 진학하면 아이들을 계속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학교는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한다고 했어요. 돈이 들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삶을 기대했어요.
2001년 꽃동네대학에 진학해 청주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 무렵 엄마는 아빠와 연락을 끊고 수원에 거처를 얻어 생활했고, 나도 대학기숙사에서 주로 지내면서 엄마가 얻은 수원의 원룸을 오가며 함께 살았어요. 나중에는 고교생인 동생까지 그 원룸에서 8년 정도를 같이 살았죠. 엄마는 혼자 힘으로 아빠가 진 채무까지 갚으면서 일을 했기에 나도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어 엄마를 도왔어요.
전공이 사회복지니까 청주에서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할 겸 이런저런 활동을 조금씩 경험했어요. 2004년 연구소에서 일하던 대학 선배가 연구소에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으니 와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역시 경험을 쌓아보자는 생각으로 인턴을 시작했어요. 서울에서 주로 생활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죠.
3개월 동안 연구소 안에 있는 문화센터에서 일했는데, 장애인 문화권을 주제로 하는 여러 사업에 참여했어요. 여가 활동에 관련되는 편의시설 현황, 영상 속에서 장애인이 그려지는 현실 등을 모니터링했죠. 임소연(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정책위원)이 당시 나의 슈퍼바이져였거든요. 그때 임소연은 어려웠죠. 가끔은 좀 무섭기도 했어요. 내가 월간 『좋은생각』을 읽고 있으면 임소연이 지나가면서 말해요. “왜 좋은 생각만 해야 해?” 아니 나는 그냥 읽은 건데…(웃음).
당시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꽃동네라는 공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수준이었죠. 연구소에 와서 처음으로 다양한 삶을 사는 장애인들을 여럿 만난 거예요. 이 일을 하면서 발달장애인분들도 만나고, 연구소 시민강좌로 연 ‘장애우대학’에서는 박경석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의 강의를 들었죠.
김정하(발바닥행동 활동가)도 연구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김정하는 인권팀장으로 일할 때여서, 연구소 안에서는 그에 대해 잘 몰랐어요. 이후 탈시설운동을 하며 김정하와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죠. 임소연이 내게 스승 같다면 김정하는 친구 같은 존재였어요. 연구소 인턴을 한 계기는 정말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만나기 시작한 세상은 너무나 컸죠.
- 질문의 방향을 바꿔 내가 있던 세계를 바라보다
2005년 박옥순, 김정하, 임소연, 여준민, 박숙경이 모두 연구소를 나와 발바닥행동을 만들었어요. 연구소에서 장애인거주시설의 인권침해 사건을 다뤘던 활동가들이 시설문제에 집중해서 활동하는 단체를 만든 거였죠. 나는 연구소 인턴 이후에도 방학이 되면 연구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인연을 이어갔어요. 2005년 발바닥행동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용역으로 수행한 ‘장애인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조사원으로 참여하는 걸 시작으로 2006년까지 몇 차례의 실태조사에 함께했죠. 이 과정에서 수십 곳의 장애인거주시설들을 방문했어요.
들여다본 시설들 가운데는, 정말 사람이 살만한 장소가 아닌 곳이 많았어요. 규모가 꽤 크고 법인이 운영하는 시설조차 침대는 군부대처럼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가벽을 세워 호실을 분리해뒀어요. 방 한쪽 면은 통유리라서 외부에서 계속 관찰이 가능했죠. 정신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는데, 거주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자 자신이 왜 그곳에 들어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시설조사를 하면 할수록 건물이 좋은가 나쁜가, 거주환경이 얼마나 열악한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설조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당시 거주하는 환경과 상관없이 반복되는 서사가 있었어요. 대전지역 정신요양원에 갔을 때 만난 한 여성분은 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잠깐 보육원 원장의 집안일을 해주는 업무로 ‘취업’을 한 뒤, 곧 정신장애가 발병했다는 이유로 정신요양원에 입소한 상태였어요. 마흔 전후였던 당시까지 그는 평생을 시설에서 보낸 거죠. 그는 아주 발랄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었어요. 김정하와 내가 같이 인터뷰했는데, 인터뷰가 끝나자 “나는 보호자가 없어서 찾아올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와주면 안 돼?”라며 자신을 꼭 찾아와 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적극적인 사람조차 시설 밖에서의 삶을 선택지로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늘 집단으로 수용된 시설에 살면서 그 밖의 삶을 상상할 여지가 없는 삶. 이것이 시설의 규모나 환경의 열악함 정도와 무관하게 공통되는 이야기였죠.
진짜 문제는 집단으로 수용된 삶의 조건 자체라는 생각에 이르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꽃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잖아요. 사람들을 교육하는 연수원에서 꽃동네의 삶을 홍보하고 가치를 전하는 일이었어요. 이런 곳이야말로 공동체의 삶이고, 이 삶의 방식이 왜 필요하고 정당한지 사람들한테 이야기하면서 돈을 벌었던 거예요. 그렇게 번 돈으로 힘든 상황에 놓인 엄마를 도왔고요. 시설조사 활동을 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꽂동네에 대해 마음이 복잡했어요. 꽃동네를 운영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깊은 편이었으니까, 그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되짚어 보니, 정작 꽃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내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거예요. 내 질문의 방향이 운영하는 사람이 아닌 거주하는 사람을 향하자,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지 없는 삶을 볼 수 있었어요.
대전의 정신요양원에서 만난 그 언니를 김정하랑 같이 10년간 매년 두 번 정도씩 방문했어요. 간식 사서 가고, 같이 외출도 하고. 시설이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무척 힘든 위치에 있는데 나는 운전을 못할 때니 김정하가 매번 혼자 운전을 했죠. 김정하는 잠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는데, 일이 많으니 늘 밤을 새우며 일을 해야 했어요. 아침 일찍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거의 잠에 취해있었어요.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면서 휴게소에서 쉬어가던 모습이 생각나요. 그때 시설에서는 우리가 인권위 직원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면회와 외출을 아주 잘 허락해줬어요(웃음).
김정하도 나도, 2006년부터 언니를 만나 매년 찾아가면서도 언니의 자립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어요. 장애인의 탈시설을 지향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의 자립을 위해 필요한 자원이나 방식을, 그때는 우리도 떠올리기 어려웠던 거죠. 언니는 엄청나게 밝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안에서 정말 빨리 쇠약해지고 노화했어요. 2014년엔 언니가 옥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로 전원됐어요. 언니는 그때 40대 후반이었어요. 그 노인요양시설에서 온몸이 결박된 상태로 누워있었어요. 발바닥행동의 지원으로 국립공주정신병원으로 옮겼고, 몇 년 뒤 언니는 서울의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통해 자립을 할 수 있었어요.
- 이순신 동상에 오른 초보활동가
나는 발바닥행동의 시설조사에 참여하면서 장애인운동 주위를 맴돌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2006년 7월, S재단 사건이 터지면서 종로구청 앞에 농성장이 차려졌어요. S재단은 13개 산하기관이 있는 거대한 규모의 시설이었고 국가보조금은 한 해 100억 원을 넘게 받는 곳이었어요. 그곳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생활을 했고, 폭력과 강제노동, 의문사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벌어졌죠. S재단의 노동조합이 김정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장애인단체들이 결합하면서 S재단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종로구청 앞에 농성장을 차리게 된 거예요.
그 실무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했어요. 당시 나는 졸업을 한 학기 앞둔 학생이었는데 그 농성에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을 동경했으니 제안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여졌어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당시 발바닥행동 활동가의 월급이 45만 원이었으니, 힘든 생활을 하는 엄마 모습이 눈에 밟혔죠.
그래도 나는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되고 싶었어요. 활동가로서 경험도 경력도 없을 때이니, 그냥 나가서 농성장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농성장에 지붕을 얹겠다, 얹을 수 없다 따위의 문제로 종로구청 관계자들과 싸운 기억만 나요.
싸움은 쉽지 않았어요. 농성이 길어지며 사건을 크게 알릴 계기가 필요했어요. 농성 100일이 됐을 때,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에 올라가 이 문제를 알리는 투쟁이 기획됐어요. 누가 올라갈지 회의를 하는데, 잡혀가더라도 빨리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올라가기로 했죠. 김정하는 올라가면 구속될 위험이 높았고, 다른 상징적이고 책임 있는 인물들은 휠체어를 탔어요(웃음). 다른 활동가 한 분이 먼저 동상에 올라가겠다고 결의했어요. 나는 이번에도 계속 망설였어요. 고소공포증이 있거든요. 그 높은데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서웠죠. 그러면서도 다들 너무 힘들게 투쟁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 나도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어요. 결국 올라가기로 결심했는데, 동상에 오르기로 한 전날 밤 내가 이순신 동상 아래에 있는 거북선 가시에 찔려 죽는 꿈을 꿨어요. 아침에 출근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죠.
다른 활동가분이 사다리를 펼쳐 먼저 올라갔고, 내가 뒤따라 올라가는 데 앞에 사람이 올라가니 사다리가 출렁거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토할 것 같았어요. 바들바들 떨며 올라갔어요. 전단지를 뿌리려고 몸을 일으켜보니 생각보다 너무 높았고 바람도 세게 불었어요.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그래도 준비해 간 건 해야 하니깐, 현수막 내리고 구호 외치고 같이 올라간 선배 활동가에게 기대어서 허공에다 전단지를 뿌렸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경찰이 소방 차량 타고 올라오면서 내려가게 됐어요. 위에서 한 30~40분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좀 더 빨리 내려가고 싶었는데, 박경석 대표가 전화해서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했을 때는 진짜 야속했어요(웃음). 나중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냈죠.
그렇게 나는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되었어요. 두렵고 망설이면서도 어느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거죠. 엄마는 그때 슬펐을 거 같아요. 얼른 자리를 잡고 돈을 벌어서 엄마를 돕기를 바랐을 테니까요. 투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S재단 농성장에 엄마가 찾아왔어요. 연락이 잘 안되니 학교에 가서 나를 찾았는데, 한 학생에게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요. 그리고는 어찌어찌 종로의 농성장으로 찾아온 거죠. 비닐천막 아래서 지내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크게 화를 냈어요. 우리는 싸웠어요. 한 달 정도 말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얼마 뒤 S재단 농성 후원주점이 열렸는데, 김정하가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며칠 만에 풀려난 날이었어요. 엄마가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곳에 찾아왔어요. 김정하에게 꽃을 건넨 뒤, 주점 한켠에 앉아 어색하게 웃더라고요. 나는 모르게 후원금도 놓고 갔어요. 우리 엄마 멋있는 사람이구나. 정말 고마웠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