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차곡차곡 쌓여가는 힘
피플퍼스트는 미국에서 시작한 발달장애인들의 권리운동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대 이후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자조모임이 결성되고, 2013년과 2015년 일본에서 열린 피플퍼스트대회에 당사자 활동가들이 참여하면서 발달장애인 당사자 운동이 조직되고 있었어요. 2013년 전국발달장애인자조단체대회(아래 자조단체대회)가 열렸고, 2015년 한국피플퍼스트대회(아래 피플대회)가 대구에서 처음 개최되었죠.
2016년 2월 자람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보낸 뒤 전국장애인부모연대(아래 부모연대)로 복귀했어요. 그리고 맡은 업무 중 하나가 그해 경남 창원에서 개최될 예정인 피플대회 준비였어요. 한국 피플대회는 2013년 1회로 시작한 자조단체대회를 계승해서 2016년 열린 피플대회가 4회차였어요. 나는 실무자로서 이 행사를 준비하는 전국 워크숍에 참여했죠.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매번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열정과 그들을 지원하는 비장애인 조력자들의 노력에 감동했어요. 2016년 6월 전주에서 진행한 워크숍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회의 장소가 오래된 호텔이었어요. 촌스러운 천을 씌운 원탁이 가운데 있는 조금 낡은 회의실이었죠. 회의는 3시간 반 동안이나 진행되었고 참가자들은 지쳐갔어요. 그런데도 동료가 발언을 하다 막히면 기꺼이 그 시간을 기다렸고, 발언이 끝나면 박수와 환호를 보냈어요.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저녁 식사와 함께 뒤풀이 시간이 되자 모두가 불같이 타올랐어요. 다들 맥주를 한 잔씩 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흥에 겨워 춤추고 노래했죠. 참석한 사람들의 나이도, 사는 곳도 모두 다양했어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어요. 즐거운 에너지를 가득 품고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촌스러운 원탁과 회의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그 장면이 신기하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어요. 여운이 길게 남았죠.
2016년 8월 한국피플퍼스트가 공식출범을 선언했어요. 한국피플퍼스트를 지원하는 장애인단체들이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고, 부모연대가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어요. 사무국의 역할을 할 피플퍼스트서울센터(아래 피플센터)가 그렇게 부모연대의 위탁사업으로 탄생했죠. 피플센터는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센터로 2017년 출발했어요.
2016년 피플대회 준비위원장이자 경남에서 활동하던 발달장애인 당사자 김정훈이 센터장을 맡고, 서울지역 리더로 피플대회 준비 워크숍에 참여했던 김대범이 센터 실무자로 합류했어요. 나는 사무국장을 맡았고요. 피플센터가 문을 연 후 진행한 첫 번째 기자회견 날이 기억나요.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주제로 한 자리여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진행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보다 경찰이 더 많았어요. 언론사는 비마이너랑 웰페어뉴스만 왔고요(웃음). 황량한 시작이었어요. 그래도 그곳에 모인 우리는 정말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흔들었어요. 운동의 당사자들은 힘이 넘치고 에너지가 가득했지만, 아직 이들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던 시기였죠.
- 당사자의 말
대범을 처음 만난 건 2016년 피플대회 준비를 위한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예요. 그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어요. 아버님이 국회에서 보좌관으로 오래 일하시기도 했고, 대범 본인이 근현대사를 줄줄 꿸 만큼 정치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어릴 때부터 관심도 지식도 많은 사람이죠. 그래서 대범은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피플센터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는 대범의 패션을 보고 놀랐어요. 그가 신은 양말이나 셔츠가 센스 넘쳤죠. 그는 일반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사회에서 계속 산 사람이었어요. 내가 그동안 많이 만났던, 주로 시설에서 거주하는 발달장애인의 모습과 대범을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대범은 20대의 센스있는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죠.
그렇지만 대범 역시 발달장애가 있기에 어떤 종류의 속도와 말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많고, 그래서 많이 좌절하고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경험을 한 사람이에요. 활동가로서 정보를 수집하고 기사 스크랩하는 일을 하던 어느 날 대범이 이렇게 투덜거렸어요. “생각하기 어려워서 발달장애인인데 자꾸 생각하라고 하니 힘들다!” 대범은 때로 허를 찌르는 말을 하고, 그래서 운동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운동에 대해서, 발달장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요.
2017년 센터가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예요. 시설 내 인권침해 상황과 자립지원에 대해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던 때라 대범이 경기도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당사자로서 발언을 요청받았어요. 대범이 발언할 내용을 센터에서 함께 작성했어요. 발달장애인이 시설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왜 문제인지 그런 것을 강조했죠. 수원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대범은 원고를 읽으며 몇 번이고 연습을 했어요. 기차에서 내려 경기도청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대범이 말했어요.
“효정, 저는 시설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말을 못하겠어요.”
그는 발달장애인 당사자로서 탈시설에 관한 의견을 말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준비한 말들이 온전히 자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발언 장소에 다 왔는데 큰일이다 싶었죠. 그 순간 대범이 덧붙였어요.
“나는 시설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시설에서 살다 나온 누나를 알고 있어요. 그 누나를 처음 만났을 때 얼굴이 마르고, 까맣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는 누나의 얼굴이 점점 “뽀얗게 변했고 살도 조금씩 찌는 것을 보았다”고 했어요. 경기도청으로 가는 큰길 한 편에 우리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대범이 발언할 내용을 다시 썼어요.
활동을 하다 보면 장애인 활동가는 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경험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돼요. 발달장애인도 비록 살아온 경험에 차이가 있더라도, 발달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차별이나 억압이 있으니까 다른 발달장애인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발달장애인들은, 다른 장애인의 상황을 자신의 상황을 통해 짐작하고 상상해서 말하는 걸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해요. 그러니 우리 사회가 당사자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삶을 살아온 여러 당사자가 모여야 하고, 서로의 말들을 연결하고 합해야 해요. 발달장애인 운동에서 이 과정이 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대범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어요.
- 평등하게 일하고 활동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2017년 12월 전국장애인부모연대(아래 부모연대)를 떠나면서 피플센터 업무도 그만뒀어요. 그리고 이듬해 부모연대가 피플센터 사업을 서울시로부터 위탁 취소당했어요. 적은 인원이 여러 사업을 수행하는데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던 거죠. 피플센터에서 일하던 비장애인들은 다행히 고용승계가 되어서 부모연대 등으로 옮겨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발달장애인들은 달랐어요. 센터장이었던 정훈은 경남으로 돌아갔고, 대범은 일할 곳을 잃고 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죠.
자람이를 보내고 사람들의 위로 속에서 힘을 얻으면서, 나는 피플퍼스트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대범과 같은 발달장애인 활동가들과 다시 일할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이 운동이 가진 특유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좋았어요.
2019년 다시 피플센터를 꾸렸어요. 이전에 피플센터는 위탁법인인 부모연대와 같은 공간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더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분리된 공간을 얻기로 했죠. 부모연대가 피플운동에 어떤 역할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피플운동이 부모운동과 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독립된 당사자 운동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우리는 영등포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어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상근활동가 자리와 부모연대가 수행하던 동료지원가 사업을 가져오면서, 발달장애인 6명과 비장애인 3명으로 구성된 피플센터가 완성되었어요.
어렵게 다시 시작했지만 재원이 크게 부족했죠. 후원을 받고, 개인적으로 조금 대출을 받아서 사무실 보증금과 컴퓨터 같은 물품비용에 보탰어요. 서울시 센터 평가 기준에 맞춰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행정업무나 회계구조가 촘촘해야 했어요. 그래서 2017년보다 역할을 적극적으로 나눴어요. 회의를 두 개로 쪼갰죠. 하나는 발달장애인 센터장과 행정업무하는 비장애인들이 참여하는 실무회의, 또 다른 하나는 발달장애인 당사자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전체회의를 운영했어요.
2019년도에 결합한 발달장애인들은 이런 활동이 대부분 처음이었어요.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다른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집회에 참여하고 기사스크랩을 하면서 당사자 활동가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보내고 있었어요. 이때 진짜 어려웠던 건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는 과정’이었어요. 평등한 동료가 되기 위해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몰라서 오래 헤맸어요. 사실 이건 2017년 처음 피플센터를 운영할 때부터 부딪혔던 문제인데, 2019년에 또다시 겪게 된 거예요.
발달장애인이 직접 운영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달장애인과 비발달장애인 간 동등한 관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나는 동등하게 함께 일하는 관계란 ‘역할이 동등하게 나뉘는 것’이라 믿었어요. 그래서 2017년엔 모든 일을 n분의 1로 다 나눴죠. 회계업무도 한 사람씩 직접 해보고, 행정서류도 나눠서 작성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나 힘들더라고요.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일하는 시간엔 당사자의 업무를 지원하고 당사자가 퇴근한 후부터 비장애인들은 본인의 업무를 처리해야 했어요. 표면적으로는 역할 ‘분담’이지만 당사자의 업무량이 늘어나면 그를 지원하는 비장애인의 업무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행정업무 외에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도 계속 고려해야 했죠. 날씨, 인간관계 등 외부환경에 당사자는 많은 영향을 받아요. 어떤 날은 온종일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눠야 하기도 해요. 이건 발달장애인과 함께 일하기 위해 필요한, 아주 중요한 부분들이에요. 센터 지도점검을 앞두고 종일 산책하다 들어와 밤샘을 해야 할 때, 느린 속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더 빨라야 한다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대체 어떻게 일하는 게 평등한 걸까요. 잘 모르는 시간을 길게 보냈어요. 정보를 똑같이 나누고 모든 일을 n분의 1로 나누는 게 평등한 건 아닌 거 같았어요. 그래서 2019년엔 비장애인들의 실무회의와 발달장애인 당사자 활동을 중심으로 한 전체회의를 별도로 운영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당사자 활동가들의 성장을 고려하지 못한 거예요. 정보 비대칭이 점차 심해졌고, 조직운영을 위해 급하게 결정을 내릴 때 발달장애인 동료들을 제대로 설득하거나 그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늘었어요. 비장애인들만 알고 발달장애인은 모르는 내용들이 생겼어요.
게다가 2020년 초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외부활동이 위축됐어요. 사업을 위해서는 실적을 내야 하고, 외부활동이 있어야 당사자들이 ‘활동할 거리’가 생기는데,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죠. 14명의 구성원이 좁은 사무실에 모여 기사스크랩 정도만 할 수 있었어요. 자조모임에 참여하던 발달장애인들도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뒤 갈 곳이 없어 피플센터로 모여들었어요.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하루를 잃는 거구나 알게 됐죠. 당사자들의 사회적 고립을 막기 위해 코로나 기간 동안 센터는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어요.
대신 상상하지 못했던 갈등을 거쳐야 했어요. 코로나로 인한 고립의 스트레스가 매일 매일 다른 어려움을 가져왔어요. 구성원 대부분에게 정신적 질병이 일어나고, 그중 어떤 사람은 정신병원 입원을 반복했어요. 일상을 유지하는 데 조직의 모든 에너지가 사용됐어요. 피플의 활동 같은 건 고민할 수 없었죠. 그 시간이 길어지니 이대로 피플센터는 망하는 건가, 한국의 발달장애인운동은 성공하지 못하는 걸까……. 이런 마음이 잔뜩 드는 시기를 보냈어요. 그렇게 피플센터 모두가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2022년이 되었죠.
- 폭발하는 언어, 역할, 책임
2022년 초 전체워크숍에서 구성원들의 문제제기가 있었어요. 어떤 배경인지 정확히 공유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외부 활동이 진행될 때 동원되는 느낌을 받는다고요. 우리 조직은 평등을 지향하기에 중요하고 시급한 정세 판단을 할 때, 연차가 높은 활동가들을 무작정 따라가는 상황을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해 나 스스로 무척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잘 되고 있지 않았던 거예요. 구성원 간 정보 비대칭 문제에 대해 우려는 했지만, 막상 문제가 제기되니 당황스러웠어요.
이날이 계기가 되어서 회의를 통합했어요. 2017년 처음 센터를 만든 후 다 같이 회의를 할 때는 50분 회의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발달장애인 구성원들은 이 시간도 견디기 어려워했고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서 지루해했죠.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통합된 첫 회의에서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 거예요. 모두가 집중했어요. 모두가 모인 주간 회의는 어떤 날 2시간에서 3시간, 때로 4시간을 넘어가는데, 여전히 이탈자가 없어요. 회의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얘기하고, 궁금해하고, 다시 질문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죠.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가능해지자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던 센터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는 문서작업을 자신도 같이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어요. 자신이 한 활동을 자신이 문서로 정리해보고 싶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발달장애인 동료들이 작업하기 편리하도록 문서 형식을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다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활동으로 자조모임을 기획하겠다고 나서는 동료가 나타났어요. 그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 활동을 사업으로 만들면서 장애인, 비장애인 구성원에게 역할들이 나누어졌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이렇게 될 수 있는데 지난 몇 년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였구나 반성했어요. 다 함께 긴 시간이 걸려도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순간, 모두에게 분명한 역할이 생긴 거죠. 그러자 자연스럽게 센터 운영에 대한 책임감도 높아졌어요. 우리 센터장 박현철에게 일정이 많고 피곤한 시기, 급하게 당사자 교육 의뢰가 온 적이 있어요. 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서 물었더니 현철이 이렇게 말했어요. “할 수 있어요. 센터에 돈이 없으니까 돈 벌어와야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