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송효정 활동가. 사진 현다혜 
송효정 활동가. 사진 현다혜 

- 시설 밖 세상을 위한 새로운 일

2013년 1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을 그만두고 1년간 활동을 쉬었어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NGO대학원을 다녔어요. 그러던 중 김기룡(부모연대 사무총장)이 전국장애인부모연대(아래 부모연대) 활동을 제안했어요. 부모연대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 중심으로 장애인교육권 투쟁을 했던 장애인교육권연대를 전신으로 하는 조직인데, 기룡은 이 투쟁에서 2007년에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아래 특수교육법)’이 제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활동가 선배였어요. 부모연대는 교육권 투쟁 이후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2014년 5월에 마침내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성공했어요. 내가 부모연대 활동을 제안받은 시점은 법률 제정 직전으로, 투쟁이 한창이었어요.

나는 발바닥행동에서 시설조사 활동을 주로 했으니까 내 활동에는 항상 발달장애인들이 가까이 있었죠. 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응할 때 발달장애인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제도가 미비해서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탈시설운동에 부모운동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왔고,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구체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싶었어요. 음…, 사실은 쉬고 있을 때 함께 일하자고 유일하게 연락을 준 사람이 기룡이어서, 부모연대에 간 거예요(웃음).

2014년 2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어요. 발달장애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소, 지원방식, 인력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기룡을 선두에 두고 중앙사무처에서는 아주 많은 시범사업이 진행됐어요. 가족지원, 교육, 자립, 주거, 노동 등 주제도 다양했고요. 이런 사업을 전국의 지부들과 함께 지역사회에 작동이 가능한지 적용해보는 게 주요 활동 내용이었어요.

그전에는 시설에 살거나 탈시설한 발달장애인만 눈에 보였다면, 가족과 함께 사는 재가발달장애인의 어려움과 삶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발바닥행동에서 활동할 때는 시설 밖의 제도를 잘 살피지 못했던 것 같은데, 발달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지역사회 모습을 사업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재밌었고요. 다만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내가 발바닥행동에서 이만큼 일했으면 미신고시설 하나는 없앨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 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는데, 새로운 제도나 공간을 만들어내며 성취감도 느꼈어요.

2017년 9월 5일, 서울탑산초등학교에서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에 관한 주민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은 사람들 주변으로 취재진이 가득하다. 사진 강혜민  
2017년 9월 5일, 서울탑산초등학교에서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에 관한 주민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은 사람들 주변으로 취재진이 가득하다. 사진 강혜민  

그러다가 2017년에 강서구 특수학교 사건이 일어났어요. 지역주민들이 특수학교가 혐오시설이라며 설립에 반대한 거예요. 그때 주민토론회에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특수학교 지어달라고 무릎을 꿇고 울었어요. 그 사진이 각종 언론이랑 SNS를 뒤덮으면서 이슈가 됐죠.

특수교육법이 제정됐지만, 실제로 통합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학교 안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부모님들은 정말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했어요. 학교 내 장애인에 대한 인식, 제도의 허구 속에서 매일이 전쟁터 같았을 그 부모님들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특수학교 설립을 외치는 부모들에게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주민들과 오열하며 무릎 꿇은 어머님들 모습을 보며 정말 참담했어요. 그러나 자식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몸을 낮게 낮추는 건 부모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부모‘운동’은 운동의 위치에서 더 원칙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연대 서울시지부가 그 사건에 함께했는데… 저는 그 모습이 이 조직의 시작을 부정하는 것 같았어요. 부모연대의 전신이었던 교육권연대는 통합교육을 이야기했던 조직이에요. 오랜 투쟁 끝에 만든 특수교육법 목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교육받는 통합교육 환경을 만들자는 거였죠. 그런데 특수학교를 짓자는 건 다시 그 전으로, 분리교육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였어요. 명백한 후퇴였죠.

모든 조직은 의견 차이와 갈등이 있잖아요. 그런데 조직의 일원으로서 내 의견을 부모연대 안에서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 조금 힘들었어요.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너희가 뭘 아냐’라는 부모님들의 경계 어린 눈빛을 종종 마주해야 했거든요. 장애인운동에 참여하는 비장애인은 어디서나 ‘비당사자’로서 고민과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잖아요. 부모운동에서도 나는 ‘비당사자’였고 그래서 때로 운동의 바깥에 있는 것 같았어요.

한편으로는 부모님들의 어려움도 이해하게 됐어요. 보통 비발달장애인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반해, 발달장애인 자녀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부모는 나이 들어가는데 성인의 몸을 가진 자녀는 여전히 돌봄이 필요하고, 학령기가 끝나면 사회적 지원은 더욱 열악해져요. 그 막막함과 괴로움을 부모 당사자가 아니고서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어요. 부모연대에서의 시간이 아니었다면, 부모운동의 가치를 알기 어려웠을 거예요.

송효정 활동가의 뒷모습. 피플센터가 있는 건물 옥상에서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현다혜
송효정 활동가의 뒷모습. 피플센터가 있는 건물 옥상에서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현다혜

- 살아있는 자식을 위한 싸움

부모연대에서 일하며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어요. 2015년 자람이가 태어나며 나도 엄마가 되었죠. 자람이를 낳고서 나는 엄청난 도약을 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활동가가 된 이후까지 나를 따라다닌 열등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자람이가 나를 그 안에서 끌어올렸어요. 자람이를 기르며 한 인간이 나를 이토록 오롯이 바라봐 준다는 게 신기했고, 커다란 충족감을 느꼈어요. 부모연대 활동에서도 훨씬 안정감을 느꼈죠.

그런데 2016년 9월, 자람이가 태어난 지 614일 되던 날 내 곁을 떠났어요. 건강한 아이였고 잘 자라는 아이였는데, 장폐색이었어요. 원래는 그 상태가 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데 자람이는 울지 않았어요. 남편과 밤새 자람이의 상태를 보았고, 아침이 되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에 가기 위해 아이를 안아 올렸는데, 갑자기 아이 몸이 툭, 떨어졌어요. 아침 7시 50분이었어요. 119에 신고하고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지시에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이불을 깔고 눕힌 채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숨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숨이 돌아오지 않아요. 병원으로 이동할 때는 이미 호흡을 멈춘 상태였어요.

원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 밖에는. 경찰이 조사를 했고, 부검을 했어요. 장이 너무 많이 꼬여 있었어요. 밤에 그렇게 아팠는데 왜 자람이는 울지 않았을까. 나 자신에게 너무너무 화가 났고, 무서웠어요.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나는 분노를 품었어요. 장애인 부모들이 주체인 그 운동 안에서, 나는 가끔 부모님들이 고통을 말하며 내가 생각하는 운동의 원칙과 다른 주장을 해도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자람이를 보낸 후에는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래도 당신들은 살아있는 자식들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잖아”라는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자람이를 보내고 나서 부모연대에서 1년 넘게 더 일했어요. 퇴근이 어려울 만큼 일을 많이 했어요. 아이가 있다가 없으니 오히려 시간이 많더라고요. 일을 하며 조금 덜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일해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운동의 외부자로만 여겨지는 내 위치에 많이 지쳤어요. 어느 순간에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식들’을 위한 일부 부모들의 욕망을 위해 ‘자람이를 잃은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마음이 거기까지 가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죠. 2017년 12월 결국 부모연대를 떠났어요.

2015년 자람이와 함께한 가족여행. 사진 제공 송효정 
2015년 자람이와 함께한 가족여행. 사진 제공 송효정 

- 신처럼 다가오는 사람들

일반적인 직장에 다녔다면 그 시간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활동했던 공간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서로 이해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이곳이라고 모두 그럴 수는 없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이토록 많은 이들이 나타나서 나를 위로하고 같이 슬퍼해 주는 거지? 나한테 왜 그러지? 나는 그렇게 잘 살지 않았는데?’라는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돌아가며 우리 집에 와서 잤어요. 원망과 슬픔, 정리되지 않은 내 마음을 계속 들어주었어요. 자람이 생일이 되면, 기일이 되면 연락을 주고, 내가 울 때 같이 울어주고, 때로는 같이 웃어주었어요. 웃는 것이 죄책감으로 느껴지던 때예요. 자람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주기도 하고요. 이들이 위로하는 방식은 너무나 내게 적절했어요. 때로는 무심하게, 예의 바르게, 적정한 거리에서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을 때, 그들이 나를 끄집어내서 누군가의 말을 듣고 기록하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도왔어요. 화상사고 생존자분들의 구술기록을 담는 인터뷰에 참여했어요. 괴로운 마음이 가득할 때 고통받았던 이들의 삶과 말을 빌려 내가 나의 고통을 말할 수 있었던 건 너무나 큰 위로였어요. 구술기록을 함께 한 구술팀 언니들 덕분이죠. 누군가의 불행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이상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도 진심이에요. 그들에 비해 나는 많은 자원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요. 때로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불행이 누군가한테 위로가 되었겠죠.

자람이를 보내고 한 달 정도 지나서 제주도를 간 날을 기억해요. 자람이와 제주에서 보름 정도 지냈기에 그곳을 다시 밟고 싶었거든요. 자람이를 기억할 무엇인가를 제주에서 몸에 새기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해서 한 장소를 찾아갔죠. 그곳 주인께서, 눈치도 없이 아이는 어쩌고 왜 부부끼리만 왔냐 이런 말을 해요.

자람이 이야기를 꺼냈어요. 오른쪽 팔목에 생일을 새기고 싶다고 했죠. 아이를 잊지 말아야지, 그 기억이 가려지지 않게 스스로에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하고 싶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의 아이도 희소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고, 출산 후 충격에 빠진 아내를 대신해 자신이 6개월간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았다고 해요. 그리고 아이가 떠나갔대요. 이후에 두 번째, 세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들을 지금도 둘째와 셋째라고 부른대요. 떠난 아이는 지금도 이 가족의 큰 아이인 거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첫째 아이에 대해서 질문을 할 테고 그때마다 아이의 사연을 설명해야 하지만, 첫째 아이를 기억하고자 그 아픔은 감수하는 거예요. 보통 30분 정도면 끝나는 타투를 두 시간 동안 했어요. 자람이의 생일을 내 몸에 새겨주며 그가 먼저 떠나보낸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준 시간이었어요.

송효정 활동가의 오른쪽 팔목에는 별 하나와 ‘자람 150121’이라는 타투가 새겨져 있다. 사진 현다혜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위로를 해준 사람들이 이렇게 곳곳에 있었어요. 사람들이 마치 신처럼 내게 다가왔어요.

이 말은 모순이겠지만, 나는 자람이가 없었으면 자람이가 떠난 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토록 큰 상실을 이겨내는 힘이 없는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1년쯤 지난 후, 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나는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견뎌내는 것이 자람이 엄마로서의 나의 역할이라고요. 자람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던 그 힘으로, 자람이 없는 그 시간을 견뎠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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