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5일 317일 차 혜화역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비마이너 기자님 어디 계시나요.”
오전 8시 10분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이 비마이너 기자를 찾는다. “어제 저희 지부장님이 오셨는데, 기사에 성함이 잘못 나와서 속상해하셨다는 소문이 있어요(웃음).”
서울지부 조합원들은 매달 문화행사를 열고 책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달에는 영화 ‘다음 소희’를 봤다며, 다음 달에는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읽어보겠다고 한다.
한 조합원이 말한다. “오늘 선전전 처음 왔는데, 처음 온 사람은 박경석 대표가 발언을 시킨다고 하셔서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다 까먹었습니다. 다음 동지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세 사람이 한 명씩 마이크를 건네받는다.
오늘의 진행자는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다. 지난달 자서전을 출간한 이후 이규식은 선전전 참여자이면서 북토크 연사가 되었다. 8시 17분께 이규식이 김유미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를 옆으로 불러낸다.
김유미가 말한다. “이규식 대표님을 처음 본 게 2005년입니다. 사진으로 본 건 2003년이에요. 처음 대표님을 만났을 땐 제도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어요. 그때 당시 중증장애인분들이 엄청나게 투쟁한 결과, 활동지원서비스같은 제도가 만들어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초석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때마침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열차가 무정차 통과할 수 있다는 방송이 나온다. 한쪽에서는 차별에 저항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바꾸어낸 세상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공권력에 대한 저항을 제압해야 할 난동 정도로 비난한다. 혜화역 승강장에서 오가는 말들은 이곳이 얼마나 정치적인 장소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김유미가 이어서 말한다. “노들야학이 올해 30주년이에요. 백일장을 해볼까 싶어요. 명사 특강도 진행하려 하는데, 강사로 나와주실 수 있나요.” 이규식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김유미의 말처럼 “섭외 완료”다.
8시 25분부터 이규식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불러낸다. 노들야학 교사를 부르고, 비마이너 기자를 부르고, 전장연 사무처 활동가를 부르고, 세종대 영상예술학과 학생을 부른다. 연대의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였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나서려니 저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송나현 노들야학 신입 교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노들야학 교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규식의 옆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동안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킨 건 서재현 전장연 활동가다. 8시 35분께 그는 저자 옆에서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낭독한다. 소제목은 ‘나 홀로 제주 여행’이다.
“배를 타야 하는데 나는 휠체어를 한 손으로밖에 못 미니 몇 미터 움직이는 데도 몇 분이 걸렸다. 배 타는 곳이 어딘지도 찾기 힘들었다. 간신히 배 타는 곳까진 갔는데 승선하는 입구가 또 계단으로 되어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내 휠체어도 밀어주고, 승무원과 함께 나를 배에 올려주었다.
20대 청년이었는데, 내가 갑판에 나가거나 할 때도 계속 도움을 주었다. 청년은 제주도에 놀러 가는 길인데 돈이 없어서 하루는 놀고 하루는 일하면서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거다!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돈을 댈 테니 3박4일 동안 같이 여행합시다.””
이규식은 그렇게 우연히 만난 20대 청년과 제주도 여행을 함께했다. 서재현이 묻는다. “그 청년은 어떻게 됐어요?”
이규식이 답한다. “몰라.”
서재현이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말한다. “스무 살의 이규식한테 활동지원을 해주신 분을 찾습니다. 혹시 유튜브 라이브 보고 계시면 혜화역을 찾아주시면 됩니다. 이규식 대표는 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과거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가 생각나는 풍경이다.
8시 45분, 이예진 노들야학 신입 교사가 마이크를 잡는다. “작년에는 선전전에 나오지 않았어요. 지하철을 많이 타기도 해서 무섭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투사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있었는데, 야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선전전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9시가 다 되어가자 박경석이 마무리 발언을 한다. “모레(7일) 김상한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을 만납니다. 그날 협의 결과에 따라 혜화역 선전전을 시청역으로 옮길 수도 있고, 소통이 잘 되면 계속 혜화역에서 전전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투쟁할 날이 없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서울시와 진심을 다해 협의하려 합니다.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이 어떻게 구성되고 확대되었는지는 대한민국에서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2006년에는 15억 원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정부 예산만 놓고 보더라도 1조 9,000억 원이에요. 그런데 서울시와 정부는 장애인을 막상 지역에서 살게 하려고 하니, 돈이 많이 드는 거예요. 1인당 1억 5,000억 원이 든대요. 김상한 실장의 말이에요. 1,000만 원도 아까운데 1억 5,000만 원이나 세금으로 나간다니, 시설에서는 6,000만 원이면 충분한데 일대일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준다니, 이런 식이에요.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습니다.
2006년 활동지원서비스를 통해 장애인의 존엄한 권리를 보장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시설에 남아있는 사람을 모두 데리고 나와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를 같이 만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예요. 물론 지금도 많이 불편하고, 차별은 여전히 존재해요. 2006년에 이어 한 번 더 장애인이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협상과 투쟁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서울시 도봉구의 한 샤브샤브집에서 최근 중증장애인이 이용을 거부당하는 일이 발생했다며 박경석이 새로운 일정을 하나 내놓는다. “내일 지하철을 타고 도봉역에 가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줄 서서 밥 먹는 투쟁을 하면 어떨까요. 비건 샤브샤브도 있다고 하니 제가 다 사겠습니다. 전동휠체어 100대가 돌아가면서 장애인 인식 개선이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사람들이 선전전을 마치고 “회식이다 회식”이라고 말하며 꺄르르 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