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 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나의 쓸모 _ 이규식④
《 나의 쓸모 》
①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② 싸우는 법을 배우다
③ 기어서 노들섬까지
④ 나의 쓸모
- 시설과 지역사회, 단절된 세계를 잇다
우리는 ‘탈시설 네트워크 이음’이라는 모임을 조직했어요. 탈시설을 희망하는 사람과 이미 탈시설 해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만나 교류하는 거예요. 먼저 탈시설한 선배가 후배들이 지역사회에 잘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고 지지해주는 거죠. 시설에 사는 사람들이 2박 3일 정도 바깥에 나와 지역사회를 체험하는 ‘이음여행’도 만들었어요. 장애인, 활동지원사, 활동가 80~100명 정도가 모여 강의도 듣고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바다도 보고 캠프파이어도 하면서 두렵지만 설렘을 느끼며 탈시설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얘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요. 제가 책임자가 되어 준비했어요. 그런 실무적인 일을 맡아본 경험이 없어서 근심도 컸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음여행은 탈시설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해 함께 회의하면서 행사의 방향도 정하고 장소 답사, 강사 섭외, 프로그램 기획 등을 했어요. 그 행사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준비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통 이음여행 생각뿐이었죠. 가장 애를 먹었던 건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을 섭외하는 거였어요. 그들은 사회에 두려움이 많아 선뜻 나오려고 하지 않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열과 성을 다해 우리가 준비한 것들을 이야기했어요. 비장애인이 하는 것보다 속도는 느렸겠지만 열정은 훨씬 더 컸을 거라고 자부해요.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에게 며칠간 소풍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당신도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걸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행사 당일엔 혹시나 사고라도 생길까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위축되어 있던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권리를 알아가고 탈시설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서 나도 자신감을 얻었어요.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활동가로서 내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죠.
탈시설한 장애인들의 모임은 커졌고 우리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머물면서 활동을 이어갈 독립적인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소장을 하라고 했어요. 나는 싸움밖에 할 줄 모르고 배우지도 못해서 더하기 빼기도 잘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대표를 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료들이 함께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설득했어요. 해외의 자립생활센터들을 보고 온 경험 때문에 한창 고무되어 있을 때였어요. 새로운 도전을 하면 무엇이든 배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용기를 냈어요. 2011년 발바닥행동 사무실 한 켠에 책상 네 개를 놓고 비장애인 활동가 둘과 함께 시작했어요.
다른 장애인 자립생활센터들은 주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사업을 탈시설에 초점을 맞췄어요. ‘시설에서 지역사회로’라는 뚜렷한 방향을 갖고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지역사회의 삶을 체험하게 하고 싶었죠. 직접 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당신도 자립할 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절대로 믿지 않거든요. 그러려면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자립을 경험하고 준비할 수 있는 주택이 필요한데 그걸 체험홈이라고 불러요. 탈시설 투쟁의 성과로 서울시가 체험홈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거든요. 1년 동안 분기별로 영등포구청에 찾아가 체험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달라고 요구했어요. 내가 열심히 찾아가니까 구청에서도 예산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구청에서 요구한 요건도 다 갖췄어요.
그런데 약속한 시기가 되니까 구청은 돈이 없다면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영등포구는 재정 자립도도 높은데 시설 장애인들이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디딤돌조차 안 만들겠다니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구청으로 시너를 들고 찾아갔어요. 평소 알고 지냈던 서울시경 정보과 형사한테 나 좀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갔어요. 확 불 지르고 나도 죽을 생각으로 시너를 몸에 뿌리려는 순간 구청 공무원이 통을 낚아채 버렸어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웃음) 구청장한테 왜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안 주냐고 막 따졌어요. 형사가 중재하는 척하면서 나를 도와줬어요. 그랬더니 구청장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체험홈 사업을 처음 시작했어요.
영등포구에 속해 있는 장애인거주시설이 네 개 있었는데 한 달에 두 번씩 찾아가서 거주인들에게 인권교육도 하고 간담회도 했어요. 조금이라도 탈시설에 관심을 보이면 멘토를 연결해서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며 지역사회 체험도 하고 이음여행도 오시게 했어요. 우리의 활동을 시설 측에서는 엄청나게 싫어했지만 2011년 개정된 사회복지사업법에서 시설 내 인권교육이 의무화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 같은 중증장애인이 나타나 당신도 자립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믿을 리가 없죠. 나 같아도 안 믿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달렸기 때문에 그 과정은 아주 세심해야 해요.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나도 그 사람을 알아야 하죠. 저 사람은 어떤 지원이 필요하고 어떤 프로그램을 연결해야 하는지 계획도 있어야 하고요. 문서로 쓰는 그런 계획 말고 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시설에서 나와도 지역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시설로 돌아가는 일도 생겨요.
어린아이일 때 시설에 들어가 30년 넘게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바깥으로 나오면 당연히 적응하기 어렵죠. 시설 안에서는 직원들이 도와줬는데 바깥엔 그런 사람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기댈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 제일 커요. 활동지원사와의 관계도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 달라, 사소한 것도 다 요청하고 조율해야 하는데 장애인들은 그런 식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뇌병변장애가 있고 중증의 언어장애가 있는 20대 남자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자립하면 죽는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3년째가 되니까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서 2년 후엔 우리 센터 체험홈으로 자립하셨고 3년 만에 서울시에서 보증금을 지원받아 자기 집을 마련해 나가셨죠. 그렇게 함께 노력해서 자립하는 과정을 보면 참 좋았어요.
- 아버지의 사과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나날이 커졌어요. 처음엔 직원이 두 명이었는데 나중엔 열세 명까지 늘어났고 사업도 공간도 확장됐어요. 10년간 센터 소장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배움이라면 뼈아프게도 센터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대표란 사람이 조직 운영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었어요. 대표는 내가 이전에 해본 일과 차원이 달랐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책임지고 신경 써야 했죠. 회계도 알아야 했고 사업 기획도 해야 했어요. 나는 중증장애인의 삶은 잘 알지 몰라도 많은 사람과 역할을 나누고 조율하는 건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사회 경험을 두텁게 쌓으며 사람을 다양하게 겪어봤다면 필요한 순간마다 대표로서 적절하게 대처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요. 신입 활동가들이 들어오면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언어장애가 있으니 그것도 부담스럽고 실무에 능한 것도 아니니 활동가들이 뭔가 물어볼 때 그때그때 알려줄 수도 없었죠. 내가 잘 모르니까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맡겨야 할 때가 많은데 관계가 좋을 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답이 없더라고요. 마지막 2년은 운동을 괜히 했다고 생각할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냈어요. 나 같은 장애인이 대표로서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기도 해요.
2021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됐어요. 다시 투쟁판에 돌아와서 좋아요. 싸우는 판은 내가 주도할 수 있으니까요. 시설에 찾아가서 장애인을 만나고 상담하는 것도 의미 있고 해외에 가서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나는 역시 투쟁하는 게 제일 재밌어요. 어떻게 하면 경찰을 뚫고 도로 점거를 성공시키나 궁리하는 게 신나요. 나에겐 그림이 딱 보여요. 사자들이 먹잇감을 찍으면 아무리 날쌘 동물도 잡아채는 것처럼 나는 싸우는 감각이 있어요. 2021년과 2022년은 대단한 해였어요. 이동권 투쟁 20주년을 맞이해 버스 점거, 지하철 연착 시위를 벌이며 맹렬하게 싸웠어요. 2021년 12월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을 요구하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시작했어요. 계단식 버스가 노후화되어 교체할 때 저상버스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으려는 것이었죠. 아침 여덟 시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을 타며 연착시키는 시위가 큰 반향을 일으켜 연말에 법 개정이 이뤄졌어요. 싸우면 변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우리는 2022년 내내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계속했어요. 단순히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싸움이 아니라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등 장애인 권리를 보장하는 예산을 요구했어요. 장기간 매일 이런 방식의 직접행동을 계속한다는 게 이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정말 욕을 많이 먹었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도 부담이 크지만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어느 날 한 시민이 유별나게 쌍욕을 퍼부으면서 우리한테 왜 길을 막느냐고 화를 냈어요. 나는 매일 아침 지하철 행동에 나가요. 아침 여덟 시까지 도착하려면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야 해요. 어딜 가든 30분 미리 도착한다는 원칙이 있어요.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자주 고장 나 있거든요. 그러면 한두 정거장을 더 가서 돌아와야 하니까 항상 대비하는 거예요. 우린 그렇게 사는 데 익숙해요. 엘리베이터가 왜 그렇게 자주 고장 나냐면 사람들이 많이 타서 그래요. 엘리베이터 앞에 줄 선 사람들 보면 전부 비장애인이고 노인이에요.
그 엘리베이터가 우리가 이렇게 욕을 먹어가면서 만든 건 줄도 모르고 우리한테 병신이 집에 있지 왜 아침부터 나와서 남의 출근길을 막느냐고, 자기들 늦은 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요. 저는 요즘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요. 사회복지법제론 같은 과목들은 이름만 들어도 무슨 소린지 머리가 아팠는데 듣다 보니 어디선가 다 들어본 내용이에요.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등의특수교육법,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조례…… 전부 우리가 싸워서 만든 법과 제도들인데 그게 대학의 사회복지학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게 신기했어요. 내가 한 일이 참 멋지게 느껴졌죠. 우리가 그 욕을 먹으면서 이런 걸 만들었다고요.
나는 장애인운동을 통해 세상을 배웠어요. 정식 학교에 다녔더라면 차별받은 내가 세상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배우지는 못했겠죠.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나를 보면서 혀를 찼어요. 쯧쯧, 불쌍한 것, 쓸모없는 것. 그런데 박경석을 만나 나의 쓸모를 알게 됐어요. 40대에 방송중학교, 방송고등학교를 6년 동안 다녀서 졸업장을 받았어요. 그 졸업장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다른 자식들에겐 공부하라고 성화였지만 나한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요. 졸업장을 보더니 아버지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입을 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너를 사람 취급 안 했다. 그래서 공부시킬 생각은 아예 안 했다. 그저 살아 있기만, 먹고살기만 잘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졸업장을 보니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너도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뜻밖의 말씀을 하더라고요. “규식아, 미안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좋았어요.
어릴 때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좋아했어요. 거기에 2022년이 아주 먼 미래처럼 나왔어요. 열 살이었던 나는 그걸 보면서 내가 저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아마 죽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나는 살아 있어요. 내가 싸워서 바꾼 2022년의 세상을 살고 있죠.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크게 사고 안 치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후배 장애인들도 많고 몸도 힘들어서 더 오래 활동하고 싶어 하면 욕심이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박경석이 아직 싸울 힘이 있을 때 힘을 보태서 더 싸워보자고 다짐하기도 해요. 은퇴하면 여행을 가고 싶어요. 그리고 자서전을 쓰고 싶어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써서 나같이 못 배운 중증장애인들도 할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이 글은 비마이너가 기획한 책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글 홍은전,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에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