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 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나의 쓸모 _ 이규식⑤
《 나의 쓸모 》
① 산속 외딴곳에 홀로 남겨지다
② 싸우는 법을 배우다
③ 기어서 노들섬까지
④ 나의 쓸모
⑤ 이야기를 가질 권리
처음 노들야학 교사가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이상하고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 같았던 그 세계에선 매월 꼬박꼬박 소식지를 냈다. 내가 처음 이 낯선 행성에 도착했던 2001년 8월의 소식지 표지 모델이 바로 규식이었다. 야학 인권 수업에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란 걸 알게 되고, 선진국의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처럼 학교도 다니고 외출도 한다는 사실에 천지개벽하는 충격을 받은 규식이 ‘나도 자립생활을 할 수 있다!’ 선언하며 야산의 버려진 판잣집을 개조해 혼자 살기에 도전한다는 소식이었다. 야학 교사들은 “규식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치켜세웠지만 그의 대단함을 알아볼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나로선 그저 ‘저 사람은 가족과 관계가 나쁜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22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소식지를 펼쳐 2023년의 내가 2001년의 규식을 물끄러미 본다. 폐건축자재들이 혼란스럽게 쌓여 있는 폐허 속에 판잣집이 한 채 있고 그 앞에 스쿠터를 탄 규식이 있다. 자립생활의 꿈에 부푼 규식은 이렇게 썼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하고 혼자서 할 수 없는 건 지원 받을 수 있도록 내 권리를 주장하겠다.” 2023년의 나는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무모할 수 있지?’
사진 속 세계엔 규식을 보호해줄 아무런 법과 제도가 없다. 그는 지하철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죽을 뻔했고, 늦은 밤 똥이 급할 때면 지하철 역무원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해야 했다. 역무원들은 마지못해 도와주면서도 왜 여기 와서 똥을 누느냐고 화를 냈다. 온갖 위험과 모욕에도 규식은 집과 시설에만 머물도록 강요되는 삶을 거부하고 자립생활을 감행했다. 생을 건 도전이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콜럼버스보다 더 용감한 탐험가들과 이번 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규식은 15년 전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용기를 내어 자서전 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규식이 말을 뱉기 위해선 온몸에 힘을 짜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온전히 듣기 위해선 긴 시간과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어떤 사람은 스무 번 넘게 만나 그의 이야기를 기록해주었다. 규식의 제안이 부담스러워서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갔지만 규식은 꿋꿋이 요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규식의 생애는 조금씩 채워지고 선명해졌다. 기록활동가로서 나의 중요한 임무는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북돋우는 것인데 규식에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대신 나는 규식을 좀 놀려 먹고 싶어서 이렇게 물었다.
“자기 인생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높은 자신감은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규식은 집과 시설에서만 살았던 자기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기록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다섯 번에 걸친 규식의 인터뷰를 마친 건 2022년 2월이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1년이 훌쩍 지난 2023년 3월이다. 놀랍게도 규식은 그사이 자서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를 완성해 출간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2022년은 규식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가득 찬 해였다. 지하철 시위가 계속되었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관심도 그렇게 무시무시한 비난도 난생처음 받아보았다. 전장연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름, 규식은 목뼈에 금이 가 제주에서 요양 중이었다. 숙소엔 안식년을 맞아 제주 한달살이를 하러 온 인권활동가 배경내도 있었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어느 날 경찰 출석요구서를 받고 화가 난 규식이 경내에게 자기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함께 글을 써서 규식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이야기한 규식의 글은 이렇게 끝났다.
“우리가 버스를 막고 지하철을 점거한 게 죄라면 그동안 장애인이 지하철도 버스도 못 타도록 만든 국가에겐 왜 죄를 묻지 않습니까. 이동권을 보장하겠다고 법을 만들어놓고 그걸 지키지 않는 공무원들은 왜 잡아가지 않습니까. 장애가 있는 아이를 죽인 부모에겐 죄를 묻지 않으면서 우리는 누굴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우리한테만 죄를 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공유했고 한 출판사에서 규식의 생애사를 펴내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간 써둔 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규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가장 잘 듣고 옮겨줄 사람들로 필진을 꾸렸다. 9년 동안 일상을 함께한 활동지원사,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 그리고 구술 기록 경험이 풍부한, 이 놀라운 기회를 함께 만든 배경내 등이었다. 그들은 규식과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글을 써나갔다. 2023년 1월 자서전이 완성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7개월 만에 썼지? 15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책을 받아보고선 더 놀랐다. 너무나 이상하고 재밌고 슬프고 기괴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었다. 한국사회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장애인의 생애사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나 역시 규식을 인터뷰하며 짧게나마 생애 기록을 쓰는 중이었으므로 그들의 글쓰기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존경스러웠고, 그래서 몹시 부끄러웠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인터뷰 작업에서 규식을 두 번쯤 밀어내려고 했다. 첫 번째는 구술자를 선정하던 2020년 봄이었다. 규식을 구술자로 제안한 것은 이 작업을 기획한 비마이너였다. 기록자인 나는 규식의 언어장애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규식이 써놓은 자서전에 서른 살 이전의 기록이 제법 잘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규식을 포함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럼에도 규식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2021년 여름부터 나는 마감에 쫓기기 시작했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규식을 가장 마지막 순서로 미뤄두었다. 그해에 여섯 명의 기록을 마치는 게 계획이었지만 다섯 명의 이야기를 쓰고 나니 해가 끝나 있었다. 규식은 다음 해로 넘겨졌다. 그러나 2022년은 또 그해의 인터뷰 계획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규식은 또다시 다음 해로 미뤄졌다. 그때마다 규식에게 ‘나중에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2023년이 되었고 이 책의 출간 시기가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이 있는 4월로 정해졌다.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두 가지 부담에 짓눌렸다. 하나는 규식의 원고를 쓰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나머지 다섯 명의 원고를 줄여 규식이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완성된 원고만으로도 한 권 분량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글쓰기 노동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어떻게든 일을 줄이고 싶었다. 규식을 뺄 수 있다면 이미 완성된 원고를 수정해야 하는 이중 노동도 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구원처럼 규식의 자서전이 완성되었단 소식을 들은 것이다.
‘어차피 단독 자서전이 나온다면 이 책에선 규식을 빼도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생각이 무척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고심 끝에 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한 뒤 책이 제때 나오려면 미안하지만 당신을 빼는 게 좋겠다고 한껏 정중하게 말했다. 잠자코 듣던 규식이 평소처럼 느리고 짧게 대답했다.
“그, 그, 그래…? 알았어…”
그때 규식의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이야기할 기회가 미뤄지고 미뤄지길 반복하다가 결국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규식은 실망과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매우 순순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차별에 저항하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겠다면서, 나는 장애를 이유로 규식을 차별하고 있었다.
‘규식은 사는 내내 이런 식으로 배제되었겠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이 이야기할 기회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규식은 그토록 집요하게 자서전을 쓰려고 했구나……’
그의 생애가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언어장애가 있다는 건 단지 남들보다 느리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규식이 입을 열면 노인들은 혀를 끌끌 찼고 식당 주인들은 밥을 주지 않고 쫓아냈다. 온갖 투쟁을 이끌어온 대표적 활동가였음에도 그에게 마이크를 잡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규식은 생애 내내 이야기를 억압당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뼈저리게 알았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고 우정을 나누는 일이며 그들로부터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라고, 규식이 말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발바닥행동 동료들에 대해 했던 말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걔네들은 내 말을 잘 들어줬어. 나 혼자만 장애인이었는데,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여줬어. 마치 조직의 중심이 나인 것처럼.”
규식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자기 이야기를 소중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이다. 돌이켜 보면 처음 구술자를 정할 때 내가 규식을 주저했던 이유는 단지 속도가 느려서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기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규식이 빠진 다섯 명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규식이 포함된 이야기를 완성한 다음에야 규식이 빠졌다면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잃었을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야기가 없는 존재는 없고, 환경이 갖춰진다면 중증 뇌병변장애인도 말하고 쓸 수 있으며 자기 이야기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규식이 멋지게 보여주었다. 규식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 글은 비마이너가 기획한 책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글 홍은전,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에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