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편집자 주] 9월 25일에 출간 예정인 신간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장애, 상호교차성, 삶과 정의에 관한 최전선의 이야기들》(앨리스 웡 엮음, 박우진 번역, 가망서사)은 미국의 장애인권 활동가이자 작가인 앨리스 웡이 미국 장애인법(ADA) 제정 30주년에 출간한 장애 당사자 에세이 선집이다. 몇몇 역사적 인물의 영웅담 대신 평범한 장애인의 진짜 삶을 담겠다는 취지로 엄선한 다채로운 경험과 사유는 당사자들이 연결되고 주도해 장애인권을 법제화하고 차별을 철폐해온 운동의 역사와 맞물리며 장애서사의 가능성을 넓게 펼쳐 보인다.
장애서사의 의의는 장애인의 현실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점하고 있는 ‘변방의 시좌’(김도현, 《장애학의 도전》)에서 구조적 부정의의 구체적 양상을 그려내며, 배제와 혐오에 저항해 연립과 정의를 실천한 과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장애인의 지혜야말로 생태 재난과 정치적 불안정 등 비장애중심적 세계가 자초한 총체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 나누고 배워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를 관통한다.
비마이너와 가망서사는 책 출간에 맞춰 이들 에세이 중 한국에서도 첨예한 주제인 ‘장애 정의’, ‘재생산 권리’, ‘이동권’, ‘장애문학’과 관련된 네 편을 골라, 국내 필자의 글과 교차해 싣는 연재를 시작한다. 이 글들을 통해 가장 취약한 자리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지어온 장애인의 삶의 가치를 담은 장애서사의 힘을 전하고 앞으로의 장애 재현과 서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자 한다.
* 이 글은 레아 락시미 피에프즈나-사마라시냐의 ‘아직도 야생의 꿈, 세상의 끝에서 장애 정의를 꿈꾸다’에 대한 한국 필자의 응답이자,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추천사로 쓰였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눈치 보지 않고 시설에서 나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동권이고 살아갈 권리입니다.
_ 한국피플퍼스트가 드리는 시민호소문 중에서
이것은 지난 8월 아침 국회의사당역 장애인권리예산 농성장에서 발달장애인당사자단체 한국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읽은 시민호소문 중 일부이다. 이 농성은 시작된 지 어느덧 2년 반이 넘었다. 2021년 12월 3일부터 매일 아침 8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연대단체들과 장애인인권문제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모여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고 요구하며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에 나타나자, 새삼 언론은 장애인 이동권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온갖 혐오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여당 유명 정치인은 장애인과 시민을 갈라치기 하며 장애인을 사회적 폭력집단으로 매도하고 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더욱 조장했다. 하지만 장애인과 함께 살지 않았던 것이 이상한 사회임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는 큰 성과였다. 우리는 이렇게 20년 넘도록 투쟁해왔다. 그동안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시민들의 출퇴근 일상에 들어가서 시민들의 연대를 바라는 호소를 하자, 드디어 우리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연은 벌금과 연행 등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계속 아침 8시 국회의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저녁 6시 혜화역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며 투쟁하고 있다.
나는 운동을 하기 전에는 장애여성을 만년 소녀로 이미지화하는 주변 시선에 의해 ‘천사 같은’ 장애여성으로 살았지만, 장애여성운동과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의 목소리는 언제나 허공에 흩어졌다. 비장애중심, 정상성중심의 벽을 부수어내기 위해서는 나부터 투쟁해야 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 권리가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야 했고 그 일부터 해내야 했다. 내가 이 사회 일원이라면 법으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 안 되어 있었고, 나는 ‘법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법 밖에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동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제정 투쟁을 하였다. 그런데 법을 제정하기 위해 우리는 불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우리가 지하철과 버스를 타려고 하면 비장애인 시민을 불편하게 한다고 못 타게 막았다. 왜 우리만 막느냐고 항의하면, 공무집행방해죄가 되었고, 불법집회로 집시법 위반이 되면서 나는 불법자가 되었다. 이후 장애인활동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또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또 여러 장애인 관련법을 제정하기 위해 나는 불법자가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으며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장애인이 20년이 넘도록 이렇게 투쟁하였기 때문에 지금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도로에 저상버스도 다닌다. 우리는 하루도 멈춤 없이 투쟁해왔다. 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장애인 차별의 거대한 벽에 금을 내고 결국 하나씩 깨부수어내며 쉼 없는 투쟁을 한다. 투쟁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존재가 되었다.
미국의 장애인법(ADA) 제정 30주년에 출간된 장애인인권활동가 앨리스 윙이 기획한 여러 장애와 직업과 정체성을 가진 장애인 당사자들의 에세이 모음집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를 읽었다. 이 에세이는 영웅적이거나 대단한 활동을 중심에 두지 않았음에도 나는 오히려 장애인의 삶은 매 순간 일상이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직업과 정체성을 갖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다 해도 장애가 있다는 것은 순간순간 촉수를 세우고 바짝 긴장하고 두리번거려야 할 것만 같은 상태….
한국도 올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15주년이 되었다. 여전히 일상적으로 장애인은 차별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 삶은 늘 당황스럽고 긴장의 연속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고, 시설에서 몇십 년을 갇혀 살아야 하고, 교육 현장에서 또 노동 현장에서 거부당하거나 쫓겨나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우리가 가진 연약한 무기다. 우리는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고발하고 진정하고 소송하면서 오늘도 투쟁하고 있다.
우리는 투쟁을 멈출 수 없다. 장애인의 삶은 멈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조용하거나 침묵하지 않는다. 조용히 있기보다 움직일 것이며, 침묵이 아닌 불화를 만들 것이다. 차별에 저항하며 존재해 갈 것이다.
《급진적으로 존재하기》에서 미국 장애인의 삶과 여기 한국 장애인의 삶이 연결되는 질기고 강한 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