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생활운동사 20년… 기념식 열려
올해 슬로건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전국 활동가 350여 명, 탈시설 결의 다져
센터 운영 및 자립생활운동 조사결과 발표

한자협 20주년 기념식 단체사진. 사진 하민지
한자협 20주년 기념식 단체사진. 사진 하민지

2003년 10월 20일 ‘한국장애인IL단체협의회’로 출범한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아래 한자협)가 올해로 출범 20주년을 맞았다.

한자협은 20일 오후 4시, 서울시 마포구 서강대학교에서 2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올해 창립 기념 슬로건은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이다. 이는 ‘전대협 진군가’를 개사한 ‘한자협 진군가’의 한 소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 기념식에는 전국에서 자립생활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3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탈시설·자립생활 운동의 결의를 다졌다.

특별히 이번 기념식에서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센터) 운영과 자립생활운동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한자협은 해당 조사결과를 토대로 자립생활운동의 새로운 10년을 전망하기 위한 기반을 닦겠다고 다짐했다.

왼쪽부터 양영희 한자협 전 회장, 최용기 한자협 현 회장,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부대표, 박해철 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
왼쪽부터 양영희 한자협 전 회장, 최용기 한자협 현 회장,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부대표, 박해철 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센터 예산 지원 턱없이 부족… 17%는 지원 0원

조사는 센터 소장과 직원을 포함한 상근자를 대상으로 지난 8월 14일부터 10월 4일까지 약 두 달간 진행됐다. 온라인 설문지를 활용한 비대면 조사로 응답을 수집했다.

한자협 산하 92개 센터 중 88개 센터 상근자 666명이 조사에 참여했다. 이 중 소장은 88명, 직원은 578명이었다. 소장 중에선 수도권에 거주하는 50대 지체장애인 남성이 가장 많이 참여했다. 직원의 경우 수도권에 거주하는 40대 비장애인 여성의 참여율이 높았다.

우선 소장을 대상으로 센터 현황에 관해 조사했다. 상근 직원 중 장애인 직원의 비율부터 살펴보면, 전체 상근 직원의 25~50%가 장애인인 센터가 전체 센터의 37개소로 42%를 차지했다. 상근 직원 수가 증가할수록 장애인 직원의 비율은 대체로 감소하는 추세였다.

예산의 경우 전체 센터의 50% 이상(47개소)이 광역 시·도비 예산을 지원받고 있었다. 국비를 지원받는 센터는 29.5%(26개소)에 그쳤다. 예산을 전혀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센터는 17%에 달했다.

왼쪽부터 이현정 수어통역사와 이정한 한자협 활동가가 기념식 사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왼쪽부터 이현정 수어통역사와 이정한 한자협 활동가가 기념식 사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지원받은 예산은 주로 인건비로 쓰였다. 인건비 재원 중 센터가 지원받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38.2%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활동지원 사업(27.9%), 주거지원 사업(13.8%),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12.7%)순이었다.

국비 및 지방비 예산은 센터가 어떤 사업을 운영하는지 결정지었다. 예산을 지원받는 센터는 그렇지 않은 센터보다 활동지원 사업, 자립생활주택 사업 운영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예산을 지원받지 않는 센터는 권익옹호활동, 자조모임운영 사업 비율이 높았다.

소장들은 센터 운영이 어려운 원인으로 ‘국가 및 지자체의 지원 부족’, ‘장애인 상근자 채용 및 양성’, ‘급여가 너무 낮음’ 등을 주로 꼽았다. 센터 규모별로 살펴보면 5명 미만의 센터는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 부족’, ‘국가 및 지자체의 지원 부족’이라고 주로 응답했다. 10명 미만이거나 10명 이상의 센터의 경우 ‘장애인 상근자 채용 및 양성’, ‘급여가 너무 낮음’이라고 응답한 소장이 많았다.

발표를 맡은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는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는 센터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상근 인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재원 구조 확보 또한 필요하다. 장애인 직원 채용을 위한 노력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한자협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포토존에는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한자협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포토존에는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응답자 75% “센터 내 장애인 역할 중요”

‘장애인 당사자 활동에 대한 인식’은 전체 응답자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대부분이 센터 내 장애인 당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인식(75%)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장과 직원의 인식 차이가 있었다. 소장의 경우 센터 규모가 작을수록 장애인 당사자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낮았다. 직원은 센터 규모가 작을수록, 연령대가 높을수록, 근무 기간이 길수록 장애인 당사자 역할에 대한 인식 수준이 소장보다 높았다.

또한 장애인 당사자가 중요한 역할로 평가받는 이유로 소장과 직원 모두 ‘권익옹호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라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반면 ‘주요 직책을 장애인이 맡고 있기 때문에’, ‘동료상담가 사업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등의 응답은 낮은 편이었다.

김 교수는 “장애인 당사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의 역할 확대와 권한 강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기룡 교수가 발표 중이다. 사진 하민지
김기룡 교수가 발표 중이다. 사진 하민지

- 연령대 낮을수록 ‘나는 활동가이기보다 직원’

현재 담당 업무가 뭐냐는 물음에는 근무 기간이 짧을수록 일자리 사업, 행정 및 회계, 자립생활주택 등 현장 대응이나 사무 업무 담당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대표, 사무국장 등을 주로 맡고 있었다.

업무 만족도는 근무 기간과 연령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5년 이상 오래 근무한 사람이거나 연령대가 높을수록 ‘업무에 만족하며 오래 일하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다. 2년 미만으로 짧게 근무한 사람이거나 연령대가 낮을수록 ‘급여가 낮아서 힘들다’는 비율이 높았다.

근속 희망 정도는 근무 기간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정년퇴임까지 있고 싶다’는 응답이 43.9%로 가장 많았다. 반면 2년 이상 근무자의 경우 ‘일정 정도 일하다가 다른 직장으로의 이동도 고민하고 있다’는 응답이 42%였다. 2년 미만 근무한 사람은 ‘한 센터 내에서 다른 직무를 두루 경험하며 오래 활동하고 싶다’를 가장 많이 꼽았다(40.9%).

‘나는 활동가인가, 직원인가?’라는 물음에 20대의 41.9%가 ‘활동가이기보다 직원이다’라고 응답했다. 20대는 ‘모두가 활동가로 근무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답변도 36.2%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활동가가 뭔지 모르지만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답변도 20대가 가장 많이 응답했다(15.2%).

반면 50대 이상은 70%가 ‘모두가 활동가로 근무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활동가이기보다 직원이다’라고 응답한 비율도 50대가 제일 낮았다. 김 교수는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활동가로서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기 시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활동가로서의 역할을 지속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근무 여건을 조성하고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역량강화 교육, 다양한 경험 기회 제공 등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기념식 무대 위에서 사람들이 발언하고 있다. 이형숙 한자협 부회장의 손주 임조운 군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다. 사진 하민지
기념식 무대 위에서 사람들이 발언하고 있다. 이형숙 한자협 부회장의 손주 임조운 군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전장연 지하철 행동 매우 필요하다’ 54.7%

센터의 집회 조직에 대한 인식도 근무 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집회 참여가 ‘권리옹호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필요하지만 너무 자주 하는 건 싫다’는 응답은 근무 기간이 짧을수록 높았다. 2년 이상 5년 미만 근무자 중에는 ‘집회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24.6%).

자립생활주택, 활동지원 등 현장 지원이나 사무 업무가 많은 사람일수록 집회 참여를 부담스러워했다. 반면 소장, 사무국장, 권익옹호, 동료상담 등의 담당자는 집회 참여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행동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며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54.7%로 가장 높았다. 소장, 사무국장, 대표 등 실무총괄을 담당하는 사람은 지하철 행동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사무 업무가 많은 사람일수록 ‘동의하지만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면 좋겠다’는 인식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깨꿈밴드가 공연 중이다. 사진 하민지
어깨꿈밴드가 공연 중이다. 사진 하민지

- 센터 민주적 운영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센터에서 비중을 두는 역할로는 ‘장애인 당사자에게 필요한 정책과 제도 구축’이라는 응답이 전반적으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직원은 ‘최중증장애인의 탈시설 및 지역사회 서비스 지원’을 가장 많이 꼽은 반면 소장은 해당 답변을 가장 적게 선택했다.

센터 역할 중 잘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분야로는 소장과 직원 모두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의 서비스 기관’을 가장 높게 응답했다. ‘장애인 자립생활 이념 교육’의 경우 소장은 56.8%가 응답한 반면 직원은 36%가 응답해 많은 차이를 보였다.

센터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상근자의 권한 행사’, ‘총회를 통한 의사결정 구조 확립’을 가장 선호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결과를 반영함과 동시에 직원들이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용기 한자협 회장이 발언 중이다. 그는 자신의 상의에 “나는 한자협이다, 고로 나는 자랑스럽다”라고 적은 종이를 붙였다. 사진 하민지
최용기 한자협 회장이 발언 중이다. 그는 자신의 상의에 “나는 한자협이다, 고로 나는 자랑스럽다”라고 적은 종이를 붙였다. 사진 하민지

- 시퍼렇게 날 세워 “탈시설 대전환”

이날 기념식에서 최용기 한자협 회장은 “20년 전 광화문에서 출범식을 했다. ‘자립’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우리는 ‘한국적 자립생활’을 표방하며 출범했다. 그날의 선언은 지독하게 차별적인 대한민국을 겨냥한 선전포고였다”며 “당시 광화문을 점거하느냐, 마느냐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결국 점거하지 않았다. 그랬다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최 회장은 “대한민국 장애정책의 변곡점마다 새겨진 우리의 투쟁은 20년의 역사가 옳았다는 걸 증명한다. 우리는 시퍼렇게 저항하면서 오늘까지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왔다”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한다. 10년 뒤인 2033년에는 ‘탈시설로의 대전환’을 함께 이뤄내자”고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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