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와 질문-1
건강권운동-보건의료운동의 건강 증진이라는 목표에 대한 질문

[편집자 주] 본 연재는 질병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과 연결 지어 살펴본다. 질병과 아픈 몸은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질문하는 동시에,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과 변혁적 사회운동의 불/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 ‘더 나은 운동’은 무엇일까?

“이제 운동은 접은 거야?”

1990년대 긴 학생운동을 마치고, 2001년 여성운동을 하기 위해 여성단체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단체에서 여성 노동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운동권 선배’들은 저런 질문을 했다. 여성운동은 ‘운동’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질문이었다. 그들에게 여성 우선 해고, 직장 내 성희롱, 성평등한 일터 같은 건 운동으로 삼기엔 너무 사소한 이슈였다.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은 다양한 의제를 내건 시민사회 운동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성장한 시기다. 그리고 때로 소위 중심 운동과 부문 운동을 구분하며, 위계화하고 특정 운동을 폄하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정부에 동조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여성운동은 운동이 아니라는 식으로 대놓고 말하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러운 시대적 변화가 아니라 여성운동의 결과다.

2001년 이후에도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거나, 운동이라 하기엔 너무 작고 사소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을 이따금 만났다. 주어는 계속 바뀌었다. 2004년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현장 연대 활동을 다녀왔을 때는 ‘한국에도 이슈가 많은데 무슨 팔레스타인이냐, 그런 건 사치스러운 운동이다’라거나, 2005년 다큐인에서 영상 활동가로 장애인권 다큐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투쟁은 안 하고 영상을 만드냐’라는 식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신뢰 관계에 있는 ‘동지’들이었고 악의는 없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활동을 한다는 아쉬움이었고, 더 중요하고 더 나은 운동을 했으면 하는 애정 어린 바람이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한 번씩 들었던 말은 ‘질병권 운동으로 무슨 제도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냐’는 얘기였다. 그 또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운동’은 무엇일까?

- ‘아픈 몸’에 대한 운동적 접근의 부재 속에서

30대 초반 건강이 손상되고 긴 투병 생활을 한 후 바라본 세상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바뀐 것보다는 내가 변해서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픈 몸이 된 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늘 이렇게 설명해 왔다.

“아픈 몸은 건강과 효율이 정의(justice)가 된 사회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 몸’, 혹은 ‘몸 둘 바가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몸 둘 바 없는 존재들은 언어가 없어서 몸 둘 곳을 갖지 못하지만, 몸 둘 곳이 없어서 언어가 없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건강 중심 사회에서 실패한 몸, 질병 난민으로 살고 있다.”1)

내 몸은 정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제작: 조짱, 제공: 다른몸들
내 몸은 정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제작: 조짱, 제공: 다른몸들

아프기 전 나에게 주요하게 감각되는 것이 남성 중심 사회나 비장애인 중심 사회 같은 것들이었다면, 아픈 몸이 되자 건강 중심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픈 몸들은 노동현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부당한 현실을 겪지만, 대부분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불편한 느낌은 있지만 그것을 뭐라 표현해야 하는지, 차별이라고 규정은 하지만 어떤 말로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이 질병 차별인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된 적이 없고, 그렇다 보니 질병을 둘러싼 차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 자체가 남루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질병과 관련한 차별이라고 하면 HIV나 간염처럼 특수하다고 여겨지는 일부 질병을 떠올리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2020년 코로나19 초기 확진자를 향했던 폭력적 낙인과 혐오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감염성 질환에만 차별과 낙인이 붙는 것도 아니다. 여성질환, 암, 만성질환 등 거의 모든 질병에 형형색색의 이유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 차별을 보는 사람과 못 보거나 안 보는 사람이 있을 뿐.2)

물론 질병 및 건강 관련 운동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보건의료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여러 단체와 산별노조가 출범했고, 이후 글리벡 투쟁3) 등을 거치면서 보건의료인 단체가 아닌 시민과 환자가 중심이 되는 시민운동을 기조로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출범하기도 했다.

건강권운동-보건의료운동은 문송면 수은중독 사건, 원진레이온 사건, 한미 FTA와 의료민영화, 의약품 접근권(글리벡, 푸제온), 암부터 무상의료, 의료수급권자 차별, 홈리스 의료지원 제도,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등의 다양한 이슈에 대응하거나 법과 제도를 만들어 갔다. 이를 통해 건강 불평등의 현실을 역동적으로 진전시켰다. 덕분에 의료공공성을 비롯한 질병과 건강권 운동이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질병과 건강의 문제가 의료 중심으로 계속 환원되거나 전문가 중심주의의 한계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의료화된 사회나 질병과 몸의 위계화 등에 대한 보다 다층적이고 근원적인 접근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였다.

따라서 질병을 둘러싼 차별과 인권 담론 등이 여전히 이토록 제한적인 현실은 기존 운동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아픈 몸’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 운동적으로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 건강한 몸과 불건강한 몸을 나누는 권력 체계

사실 위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것은 여러 해 동안 헤맨 이후였다. 이를테면 아픈 몸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근원적 변혁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색하던 초기에는 ‘건강한 몸과 불건강한 몸을 나누는 권력 체계’에 대한 ‘운동적 전선’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찾아 헤맸다. 그리고 당연히 실패했다. 아픈 몸을 둘러싼 권력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운동의 전선 자체가 형성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몇 년 뒤 조심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건강권 운동 등에서도 정상적인 최고의 건강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아쉬웠다. 인류가 도달해야 할 정상적인 최고의 건강이 단일하게 존재하며, 거기에 도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빈곤, 실업, 성차별 등을 완화해서 모두가 그러한 최고의 건강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목적 중 하나로 설정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최고의 건강’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그런 표준의 몸을 최고의 몸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올바른지, 빈곤이나 성차별 등을 제거해 나가면 누구나 실제로 그런 몸에 접근 가능한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그런 이상적인 건강상을 단일하게 구성해 놓은 것 자체가 몸을 서열화하고, 누군가는 계속 열등한 몸으로 규정되도록 기여하는 것은 아닌지 함께 토론해 보고 싶다”4)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기획단에서 제작한 손피켓. 사진 제공: 다른몸들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기획단에서 제작한 손피켓. 사진 제공: 다른몸들

그리고 여러 자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강권운동-보건의료운동이 ‘건강 증진’을 목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도 던져왔다. 시민의 건강 보호와 증진을 위한 알마아타 선언이 채택된 게 1978년이다. 그리고 여전히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로부터의 안전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건강’이라는 단어로 많은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건강조차 스펙으로 만들었고, 과거 빈곤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은 불운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실패한 사람(loser)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질병의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은 아픈 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강화하고, 아픈 몸들을 자기관리에 실패한 몸으로 만들었다. 생산과 효율이 강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높은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아픈 몸은 나쁜 몸이 되었고, 교정되지 못하는 몸은 쓸모없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건강권운동-보건의료운동이 건강 중심 사회에 대한 충분한 비판 없이 ‘건강 증진’을 목표로 설정하는 게 여전히 유효한 운동 전략일지 토론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 환자 권리가 아닌 건강 중심 사회에 맞서기

다른몸들의 질병공동체 ‘질병과 함께 춤을’ 구성원들이 쓴 단행본 『질병과 함께 춤을』5)에서 다리아는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주지하다시피 난임은 임신을 원하는 이에게는 ‘질병’일지 몰라도 임신을 원하지 않는 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리아는 임신을 원하지 않고 난소질환이 있는 상태로 적당히 관리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치료를 통해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정상적인 몸’으로 만들라는 요구 앞에서 그의 몸은 끊임없이 비정상적이고 문제적인 몸으로 미끄러진다.

‘질병과 함께 춤을’ 구성원이 몸 워크샵에서 아픈 몸에 대한 말을 쓰고 있다. 사진: 혜영
‘질병과 함께 춤을’ 구성원이 몸 워크샵에서 아픈 몸에 대한 말을 쓰고 있다. 사진: 혜영

‘질병과 함께 춤을’의 또 다른 구성원인 목우는 위의 책에서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두려워서 질병이 자신의 삶에 분명히 있지만 없는 것처럼 숨기고 사느라 세상과 고립”되어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러다가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을 만나게 됐고, ‘우리는 아플 권리가 있고 질병은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에 20년 차 조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후 그는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6) 무대에서 말한다.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을 거야. 망상은 소외된 꿈들이 짓는 몹시도 뜨거운 희망.” 아픈 몸에 대한 해석,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해석은 의료권력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우는 환청을 병리적 증세가 아닌 특별한 경험으로 전복시키고, 무대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의료권력에 저항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또 다른 시민 배우 나드는 반복되는 턱관절 수술과 여러 질병 앞에서 치료에 매진하는 삶을 20년 넘게 살면서, 완치 이후로 삶의 계획을 끊임없이 유예해 왔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 비로소 “완치가 아닌 완치로부터 자유를 원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아프기 이전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 이외의 것들은 모두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질병에 점유됐던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아픈 몸으로 현재를 살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무대 사진. 사진 제공: 다른몸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무대 사진. 사진 제공: 다른몸들

이 책과 연극은 모두 다른몸들에서 질병권 운동의 일환으로, 아픈 몸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을 모집해서 만들어 간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낯선 타인이던 아픈 몸 시민들이 서로에게 질병 경험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를 묻고 토론하며 재해석해 갔다. 그리고 아픈 몸이 어떤 차별과 배제와 혐오 속에서 살고 있는지 가시화하고, 우리의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질병 세계의 언어를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 속에서 글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아픈 몸들은 지면과 무대 위에서 건강이 무엇인지, 정상적인 표준의 몸이 무엇인지, 우리의 아픈 몸은 실패한 몸인지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환자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아픈 몸이라는 ‘현장’을 토대로 정상성의 폭력을 폭로하고 건강 중심 사회를 비판하며 맞선 것이다.

- 비정상의 저항과 혁명을 기대하라

그리고 2022년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을 열었다. 이 광장은 건강 중심성과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해 온 다른몸들, 신경다양성 운동을 하고 있는 신경다양성지지모임 세바다, ‘페미는 정신병’이라는 이중의 멸칭에 문제의식을 지닌 한국여성민우회가 함께 만들었다. 행사 슬로건은 “비정상의 저항과 혁명을 기대하라!”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참여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 다른몸들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참여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 다른몸들

나는 약자생존 본무대의 여는 발언을 이런 말로 시작했다. “약자생존은 질병, 장애, 성별,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비정상’이라고 밀쳐지고 배제되는 모든 존재들을 위한 광장입니다. 우리도 정상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자체를 질문하고 횡단하는 것입니다. 차별받는 소수자들에게 쓸모를 입증하라고 한다면, 우리의 쓸모는 저항입니다.”

청계 광장 잔디밭에 알록달록한 빈백을 놓았고, 각자 몸의 조건에 따라 눕거나 앉거나 서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했다. 그리고 무대에는 자신을 신경다양인, 지체장애인, 청소년, 여성, 논바이너리, 성노동자, 페미니스트인 정신질환자 등으로 규정하는 약하고 미치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나와서 발언하고 행진했다. 발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저는 전형적이지 않은 몸을 가진 뇌성마비인입니다. 전형적이지 않은 몸으로 이 사회에 맞춰 살아오는 과정에서 얻은 만성질환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몸은 고강도의 노동에 쉽게 지치고, 저의 마음은 미세한 차별도 감지할 만큼 섬세합니다. 그런 제가 전형적인 신체에 맞춰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아남은 과정이 혹시라도 대단해 보인다면, 그건 저의 강인함의 증거가 아니라 사회의 무감각과 무책임의 증거라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박은영_다른몸들)

“세상은 목소리를 둘로 나눕니다.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로요. 저는 목소리를 골라본 적이 많습니다. 상대와 상황을 보고, 제 목소리의 성별을 고릅니다. 친구가 아는 제 목소리와 부모가 아는 제 목소리가 다릅니다. 일터에서의 목소리와 마트에서의 목소리가 다릅니다. 어떤 때는 불충분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항상 긴장한 채 입을 뗍니다.” (쟁뉴_논바이너리 활동가)

“우리는 ‘정상성’을 거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는 ‘정상성’을 가진 ‘표준적인’ 몸에 맞춰 흘러가는 ‘표준 시간대’를 거부하고 교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행진 루트는 ‘표준적인 몸’으로 2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1시간에 걸쳐 걸어갈 것입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하는 세상의 질서를 지연시키고 균열을 낼 것입니다. ‘돌아버린’ 우리가 이 세상을 평등한 세상으로 돌릴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함께 ‘느릿느릿’ ‘돌아버립시다’” (리얼리즘_신경다양성지지모임 세바다)

우리는 행진하며 이런 구호를 외쳤다.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나의 저항을 기대하라!”, “아픈 몸이 세상의 기본 값이다”, “잘 아플 권리를 보장하라!”, “정상의 세계는 이미 부서지기 시작했다!”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참여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 다른몸들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참여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사진 제공: 다른몸들

- 운동의 전선을 새롭게 긋기

‘운동이란 무엇인지, 더 나은 운동은 무엇인지에 대해 후일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는 말로 손쉽게 말하고 싶을 때가 많다. 소수자의 삶도 너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새로운 운동도 늘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언어들이 세상에 잘 닿지 않고 허공에 흩어져 버릴 때가 많아 지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매번 정신없이 터지는 이슈에 대응하는 운동을 넘어, 지금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질서, 양식, 구조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토론과 운동이 절실하다고 말하려 한다.

그 안에서 파편화된 운동이 아니라 경합과 연결과 연대의 운동 생태계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관성화된 운동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된 사회를 면밀히 분석하며, 막연한 당위나 올바른 말잔치를 넘어서, 구체적 대중과 호흡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운동을 새롭게 조직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에서 ‘전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전략이나 전술뿐만 아니라 운동의 성격 자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관점 위에서 질병권(잘 아플 권리)을 주장하며, 질병과 건강, 질병과 장애, 정상과 비정상, 표준의 몸과 배제된 몸, 의존하고 취약한 몸과 돌봄 등에 대한 새로운 전선을 계속 그어 보고 있다. (다음 글에 계속)

 

1) 조한진희, 「건강 중심 세계의 질병 난민」, 『비마이너』, 2020. 4. 1.

2) 질병 차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2019) 1장의 ‘질병에 대한 낙인’과 ‘차별의 말들’ 참조.

3) ‘기적의 백혈병 치료제’라 불리는 글리벡이 개발되어 2001년 한국에서 판매되었지만, 비싼 가격으로 인해 많은 환자들은 복용이 어려웠다. 이에 ‘글리벡 문제해결과 의약품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가 꾸려져 투쟁을 전개했다.

4)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382쪽.

5) 다른몸들의 질병공동체 ‘질병과 함께 춤을’은 2018년부터 저항적 질병 서사 쓰기를 진행했고, 『비마이너』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연재한 원고를 바탕으로 단행본 『질병과 함께 춤을』(다리아 외, 푸른숲, 2020)을 출간했다.

6) 다른몸들에서는 2020년 언론을 통해 아픈 몸과 살고 있는 시민을 공개 모집해서 3개월간의 워크샵을 진행했고, 2020년 7월 대학로에서 무대에 공연을 올렸다. 이 연극은 온·오프라인을 통해 2만여 명의 관객이 함께했고, 202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필자 소개

조한진희(반다) ‘다른몸들’에서 활동하고 있다(facebook.com/damom.action). ‘다큐인’에서 「나는 장애인이다!」, 「장차법, 이제 다시 시작이다」 등을 연출했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공저), 『돌봄이 돌보는 세계』(공저) 등을 썼다. iingmod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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