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와 질문-2
[편집자 주] 본 연재는 질병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과 연결 지어 살펴본다. 질병과 아픈 몸은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질문하는 동시에,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병’과 변혁적 사회운동의 불/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환자권리 운동이 참 어려우시죠?”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제법 침묵이 흐른 뒤에야,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걸 알았다.
“저는 환자권리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굳이 이야기하면 질병권 운동이죠.”
“알고 있어요. 환자들을 위해 애쓰시잖아요. 그게 환자권리 운동이죠.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그에게 질병권 운동은 환자권리 운동의 하위 범주로 이해됐던 모양이다. 사회단체 ‘다른몸들’의 아픈 몸들의 공동체인 ‘질병과 함께 춤을’은 다양한 질병을 가진 이들이 함께한다. 환우회냐고 물었을 때 특정 질병을 중심으로 모인 게 아니라고 하면, 일종의 환자연합회 같은 것이냐고 되묻는다. 특정 질병 중심으로 모여서 질병 관련 정보를 나누고 자조(自助)하는 것이 아니며, 질병을 둘러싼 구조와 문제에 대해 사유하고 변혁을 도모한다고 설명하면, 진보적 환자 모임이라고 요약된다.
- 질병권 운동은 환자권리 운동이 아니다
우리는 ‘환자’라는 단어는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주로 ‘아픈 몸’이라는 단어를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환자는 ‘병들거나 다쳐서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사실 사전을 찾을 것도 없이 환자라는 단어는 병원에서 쓰이며 의료적 개입을 전제한다. 환자라는 범주는 의료 권력을 통해 규정된다. 이를테면 일터에서 병가를 내기 위해서는 병명이 표기된 진단서가 필요하고, 아프다는 것을 인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아프기 때문에 겪는 온갖 차별에서도, 건강이 회복되면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치료 담론에서도 환자라는 말은 필수다.
한편 일부 아픈 몸의 경우 현재의 의학으로는 병명이 특정되지 않고, 이로 인해 ‘환자’라는 지위를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다시 의료적·사회적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병명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고 발명되고 변화되어 왔으며, 다양한 이해관계 혹은 정치를 통해 병명과 정상성 범주가 재구성되어 왔다. 요컨대 질병권 운동에서는 ‘환자’라는 범주를 규정하는 권력에 대해 재사유하면서 ‘아픈 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 책과 칼럼, 강연과 워크샵, 현장 활동에서 ‘아픈 몸’이라는 단어를 부지런히 써왔다. 대중들의 반응도 적극적이었고 환자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함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다. 환자라고 했을 때 늘 병명을 먼저 묻고 진단받은 병명이 없을 경우, 혹은 진단받은 병명과 불일치하는 증세에 대해서는 존중받지 못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은 아파서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토로했을 때, 모든 것이 치료 또는 의료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한계였다. 어쨌거나 자세한 맥락을 이해하든 아니든 간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아픈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운동은 환자권리 운동이 아니며 환자라는 말은 제한적으로만 사용한다고 길고 긴 설명을 해도, 끝내 우리를 환자로 호명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몸들의 동료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환자가 그저 익숙한 언어적 습관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환자가 아닌 아픈 몸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도 나왔다. 아픈 몸이라는 단어가 그저 낯선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런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욕망.
일각에서는 환자가 아닌 아픈 몸들이 질병이나 건강에 대해 말하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 어색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환자가 아닌 아픈 몸은 이상하다고 말한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환자가 아니라, 의료와 의료권력, 건강과 건강 중심 사회 자체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하며 변혁을 도모하는 ‘환자’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 환자인 동시에 환자이길 거부하는 아픈 몸들
다른몸들에서는 아픈 몸으로 사는 시민들과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와 단행본 『질병과 함께 춤을』도 언론을 통해 모집한 시민들과 함께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사실 질병이 개인화된 사회에서 아픈 몸은 열등감과 패배감을 강요받고, 공개적으로 질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낙인을 거부하고 수치심 없이 자신의 질병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또한 이를 넘어 아픈 몸으로서 겪는 차별, 배제, 혐오, 고통을 사회 구조와 연결해서 재해석하며 의료와 사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저항적 질병 서사로 만들어 냈다. 이러한 저항적 질병 서사 운동은 몸에 대한 해석을 의료에 의해 독점당하면서, 의료인과 정책 전문가들에 의해 호명되고 관리되고 대리되는 식민지에 살던 아픈 몸들이 몸의 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는 결국 저항하는 주체로 변모해 가는 과정이 되었고, 변혁의 주체가 되는 힘을 보여주었다.
다른몸들의 아픈 몸들의 공동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는 지난 몇 년 간의 활동을 토대로 2020년 「아픈 몸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시대마다 차별과 배제 아래 놓인 이들은 선언문을 썼고, 선언문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언어다. 「아픈 몸 선언문」은 질병과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와 아픈 몸이 겪는 차별, 배제, 낙인의 구조적 원인에 대해 몇 년간 삶을 나누며 토론한 결과로 만들어졌다.
질병은 생명체에게 필연이고, 과거 인류에게 생로병사는 삶의 일부였으나 자본주의와 의료 권력은 생·로·병·사를 특수이자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과 의료가 결합하면서 건강의 기준은 더욱 높아지고, 아픈 몸은 의료시장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더 많은 의료 소비를 낳았다. 자본은 강도 높은 노동이 가능한 몸만을 ‘좋은 몸’, ‘표준의 몸’으로 설정했다.
아픈 몸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아픈 몸을 “살”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할 과도기적인 단계로 보는 한 “죽게 내버려”지는 삶들을 구제할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자본의 소모품으로 “살”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죽게 내버려두는” 시스템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연대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아픈 몸들의 연대는 우리 사회 곳곳을 가로지르는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이다. - 「아픈 몸 선언문」 中1)
우리는 질병을 의료의 영역으로만 환원하는 태도가 생의학적 치료와 회복으로 우리의 문제를 축소하고 질병을 탈정치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질병권 운동은 질병과 건강을 탈정치화하는 구조에 맞서는 것이며, 치료와 완치로 수렴되는 질병과 건강 문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질병권 운동이 환자권리 운동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환자권리 운동은 여러 성과를 만들어왔다. 최근에도 다양한 환자단체들에서 환자권리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의료소비자 운동 형태로 진행되는 한계도 존재한다. 물론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소비자라는 정체성을 활용해서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의료소비자 운동으로는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불평등 구조나 자본주의라는 문제적 체제를 바꾸기 어렵다.
또 한편 영악한 자본은 환자권리를 주장하는 환우회 같은 단체를 파고들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의료자본이 취약한 환자의 특성을 이용해서 후원금이나 약물 지원을 명목으로 환자단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간 사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환자단체에서는 해당 질병을 가진 환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전체 사회의 공익과는 다소 상반되는 선택을 하거나 제약회사의 홍보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의료인들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온갖 명목의 후원금을 받으며 제약회사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의료자본과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와 제대로 경계를 긋지 못한 채 환자권리를 근본적으로 지켜내기는 어렵다.
- 관성화된 비판을 넘어, 대중운동을 새롭게 질문하기
지난겨울 한국에서 환자 및 시민과 함께하는 건강권 운동을 표방하며 출범한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주년을 맞이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1987년 이후 조직적으로 진행된 건강권 운동과 보건의료 운동의 기반 위에서 기존의 전문가 중심 운동을 탈피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대중적 운동을 만들겠다는 기치를 걸고 활동을 펼쳐왔다. 그리고 수많은 성과를 만들며 한국의 건강권과 보건의료 운동에서 독보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20주년을 맞이해 향후 20년을 전망하는 토론회를 열었고, 이 토론회의 패널로 초대받았다. 나는 애정과 연대의 마음을 담아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일부를 옮겨 본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대중운동을 지향하며 출범했고, 한국의 건강권 운동에서 고유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선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상정하는 대중이 누구인지 한 번씩 궁금합니다. 누구를 대중으로 설정하고 운동을 조직해 왔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두 번째로 한국의 시민사회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부터 법제도를 바꾸는 것에 초점을 둔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고, 건강세상네트워크 또한 다양한 제도나 법을 만들거나 바꾸는 활동을 통해 여러 성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이런 운동 방식은 정부나 국가를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의도했든 아니든 지금의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발언은 일종의 사회운동 방법(론) 측면에서 질문을 제기한 것이었고, 사실 이는 건강세상네트워크뿐만 아니라 건강권 및 보건의료 운동 전반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우선 그간 건강권 운동이나 보건의료 운동에서는 전문가주의나 전문가 중심의 운동에 대한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대중을 주체로 세우고 함께하는 실천은 다소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면 기존과는 다른 대중운동을 만들어 가겠다는 기치를 걸고 출범한 건강세상네트워크는 20년이 지난 현재, 누구를 대중으로 상정하며 어떻게 대중을 조직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또한 ‘캠페인의 대상이나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시민’을 넘어,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운동의 구체적 전개 방식에 대한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질병과 건강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법과 제도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 질병과 건강에 대한 제 사회 문제를 법과 제도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문제를 축소시킨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닌지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질병과 건강을 둘러싼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변혁해 가는 데 있어, 법과 제도를 제외하고는 운동 전략을 만들지 못했던 한계가 존재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법과 제도에 갇힌 운동에 대한 비판 자체가 부족해서인지, 사회운동은 곧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사고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런 운동 기풍에 대해서도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사회를 향한 열망에서 비롯되는 사회운동이 매번 치밀한 전략과 전술 속에서 명확한 변혁 이념을 가지고 진행되기는 어렵다. 대개 다양한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새롭게 진단하고 발굴해 나가며 만들어지는 게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한계는 필연적이다. 중요한 것은 1987년 이후 우리 사회 건강·보건·의료에 관한 변혁을 꿈꾸며 조직적 운동을 전개해 나간 2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여전히 전문가 중심의 한계와 ‘대중운동의 취약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관성화된 비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공의 집단행동과 의료 대란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최근 몇 달간의 상황, 그리고 이에 대한 여론 흐름과 정세는 기존 건강권 운동과 보건의료 운동의 한계를 담지하고 있다. 앞선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보다 근원적인 변혁과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향성의 모색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시작은 관성에서 벗어나 ‘도대체 대중운동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고 낯설게 질문할 때 가능할 것이다.
1) 선언문 전문은 단행본 『질병과 함께 춤을』에 수록되어 있으며, 초기 버전은 비마이너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아픈 몸 선언문).
필자 소개
조한진희 ‘다른몸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큐인’에서 「나는 장애인이다!」, 「장차법, 이제 다시 시작이다」 등을 연출했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공저), 『돌봄이 돌보는 세계』(공저) 등을 썼다. iingmodo@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