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캄캄하다.” 희망을 준답시고 흔히 인용되는 이 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금’의 캄캄함이 해 뜨기 직전의 캄캄함인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잠시 후 해가 뜰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지만, 시계도 없이 어둠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저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유의 세계가 아닌 현실은 더욱 복잡하여 정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캄캄한 때”일 것이라는 희망은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라면 몰라도 홀로 남은 시간에는 깜박거리는 촛불처럼 위태롭다.

십 년 단위로 세어야 할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켜낸 소나무 같은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들의 마음이 한밤중을 지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이들은 말한다. 그래도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는데,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 들 때 나의 지난 시간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세상이 바뀌기는 하는 것일까, 묻게 된다고.

나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최소한 그 자리에서는. 대신 속으로 말한다. “당신은 지난 십 년을 돌아보며 달라진 세상의 흔적을 찾고 있지만, 저는 당신을 바라보며 십 년의 시간 동안 변해 왔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십 년은 한 사람에게는 긴 시간이다. 십 년은, 세상의 변화 따위보다 그 한 사람의 변화를 먼저 헤아려야 옳은 시간이다. 젊었던 몸은 쇠약해지고, 단단했던 의지에는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신은 더욱 성숙했을 것이기에 육체와 의지의 쇠락은 보색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게다가 십 년을 넘게 해 온 일이면, 그것이 결국 그의 인생이다. 그는 시민운동의 역사에 그 십 년으로 기억될 것이다.

활동가들은 지금 여기서의 결과를 희망한다. 당연하다. 지금 내 삶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의 삶에서 결과를 손에 잡을 수 없는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공사 조직을 불문하고 온통 일 년 단위 성과 평가로 분주한 이 시대에 어떻게 결과를 생각하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결과는 고사하고 하찮은 절망들과 씨름해야 할 때가 많다. 의미 없는 소송은 걸려 오고, 정부의 정책은 오락가락한다. 활동을 해야 할 시간에 무슨 가치를 생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자원도 사람도 적은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탈진과 갈등이 발생하고, 오랜 동지가 하나둘 떠나고, 신념에 따라 헌신한 이들이다 보니 조직의 크기를 적절히 확보해야 할 상황에서도 약간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함께 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다.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열어가는 이들이 있다. 뭔가 활동을 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모임이, 단체가, 운동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존재가 반짝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아니 사람은 변하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은 10년을 지나왔다면, 그 존재는 역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존경해 마지않는 어떤 분과 이야기하다가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어 말을 꺼냈다. 중요한 건 지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닐 거라고. 당신들이 걸어온 길은 시민운동의 역사에 기록될 거라고. 앞으로 해나갈 일들도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 어떤 역사를 가능하게 할지를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사가 된다는 것은 이들의 활동이 현재의 시민들에게만 말을 거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다. 향후 다가올 세대가 그들만의 캄캄한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들의 이야기에서 길을 찾을 것이다. 어떤 조건도 그들을 지탱해주지 못할 때, 똑같은 상황에서 시대를 지탱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도 견뎌낼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견뎌낼 수 있는지까지도 배울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악이 응축되어 있는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그 반지를 운반하는, 목숨을 건 역할을 맡은 주인공 프로도 배긴스는 자신과 동행하는 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 같아, 샘. 세상이 위험할 때면 누군가는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고, 상실하게 돼. 다른 이들만큼은 그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야.”

소나무 같은 이들은 실패한 것도, 패배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내려놓았을 뿐이고, 기꺼이 상실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조금은 풍요롭다면,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이 지금 곁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 덕분이 아니라 반지를 운반한 프로도 같은 이들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이들이 공헌한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감지하지도 못할 따름이다.

우리 시대를 돌아본다. 지금처럼 작은 존재들의 권리에까지 이토록 관심을 기울인 시대가 있었을까? 과거에는 신분이 나뉘었고, 질서는 위계적이었으며, 어린이와 여성은 재산처럼 취급되었다. 동물? 자연? 오로지 왕과 귀족의 생명만이 가치 있던 오랜 역사를 지나 겨우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냈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존재가 시민은 아니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함을 존중하려 많은 이들이 땀 흘리는 시대는 지금이 거의 유일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특별하다. 노동과 기후가 충돌하고, 장애인권과 동물권이 묘한 갈등을 빚고, 다름과 차별이 복잡하게 얽혀 있더라도, 이는 모두 이 시대가 그만큼 모두의 권리를 가장 멀리까지 배달하는 과정에서 모퉁이를 돌아 이제야 발견한 산과 강들일 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고뇌를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멈춰서는 안 된다.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를 통해 엿보았듯이 이 시대도 언젠가 무너질 것이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더 어두운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벽 같은 시대가 열릴 때, 지금의 역사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별이 될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이라는 시에서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별조차 잘 보이지 않는 이 밤, 뒤늦게나마 가느다란 인연이 된 이름들을 불러본다. 발바닥, 416합창단, 노들, 피플퍼스트, 핫핑크돌핀스, 그리고 비마이너. 누군가 이들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해낸 게 뭐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다.

역사를 만들고 있어요. 이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질문 대신 손을 내밀어 보세요.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2725sena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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