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필자 주] 레인은 김혜진의 장편 소설 『딸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인물로, 60대 여성인 주인공의 딸 그린의 동거인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지난 9월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했다.

레인 님을 이 글에서 레인 님으로 부르기로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레인 님은 소설 속에서 ‘레인’이지만 ‘레인’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레인 님은 그저 “그 애”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레인 님도 주인공을 부르기보다는 겨우, 할 말만, 기능적 언어로만 주인공과 소통했습니다. 그린은 늘 “엄마”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당신은 그저 “계셨네요”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레인 님은 주인공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인공을 부를 수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를 거부당해 왔으니까요.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그 부름의 언어에 부합하는 관계를 그와 맺는다는 것인데,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이의 이름을 부를 방법은 없는 것이겠지요. 비록 불리지 못하는 이름이지만 레인 님의 이름은 좋습니다. ‘그린’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암시하는 것이겠죠.

영화 「딸에 대하여」 포스터
영화 「딸에 대하여」 포스터

영화에서 레인 님을 연기한 배우는 하윤경이에요. 그 유명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주인공 우영우의 오랜 친구 ‘봄날의 햇살’ 역을 맡았던 배우이지요.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레인 님도 하윤경의 레인을 좋아했을 거라 짐작해 봅니다.

소설 속 레인 님은 단단합니다. 말을 아끼고, 깊이 생각하고, 절제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들이 타인을 지향합니다. 주인공의 딸인 그린은 좌충우돌이지만, 레인 님은 훨씬 신중해 보입니다. 레인 님을 체화한 하윤경은 레인 님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그린과의 관계가 진심이라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합니다. 침착했어요. 레인 님은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면서도, 레인 님과의 대화를 계속 거부하는 주인공과 관계를 맺으려는, 반복되는 거절을 이겨내는 마음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의 마음을 열지요. 비록 조금만 일지언정.

거부되는 존재로서 최소한의 영역만을 점유하려 하면서도 그 영역에서는 확고한 주인이 되려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레인 님이 주인공에게 다가가는, 난데없이 커피 마시겠냐, 스파게티 드시겠냐고 하는, 무덤덤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행동들에서 어떤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레인 님은 마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차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인정한다는 듯이, 대화로 풀어갈 의향과 자신이 있다는 듯이, 그 방법밖에 없음을 잘 안다는 듯이, 그리고 상황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달라는 듯이 주인공에게 다가갔습니다.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영화로 먼저 접한 레인 님을 보는 내내 불안했습니다. 레인 님은 레인 님을 거절하는 주인공에게 언제든 똑같이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레인 님과 자신의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그린처럼 날선 말들을 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남이니까요. 날선 말은 가족이라서도, 남이라서도 던질 수 있는 거죠. 레인 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레인 님의 관심은 오로지 주인공과의 진정한 인간적 공존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레인 님의 목표는 그저 평화인 것 같았습니다. 그 지속성은 픽션이어서 가능한 걸까요? 현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걸까요?

소설 속에 레인 님의 부모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정도만 나타나지요. 아마도 아버지는 레인 님을 이해했나 봅니다. 하지만 어쨌든 서른의 레인 님은 독립해 있습니다. 모든 경제적 필요를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린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하죠. 이해를 받는다는 것과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또 다른가 봅니다.

그린은 많은 말을 하고 화도 쏟아냅니다. 2층의 폭력적 가장에게, 주인공인 엄마에게, 부당해고를 한 대학에게, 기자에게… 하지만 레인 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저 그린 옆에 있을 뿐, 레인 님의 사회적 신념에 대해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린의 신념을 지지하는 것인지, 그린을 지지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레인 님의 역할은 온통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것, 심지어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인공이 요양원에서 데려온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 젠을 돌보는 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젠이 레인 님을 주인공의 딸로 착각한 것도 당연하고, 레인 님을 ‘곱다’고 말한 것도 당연합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네 여성이 모여 아주 잠깐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삽입했더군요. 죽음이 임박한 젠, 노년의 주인공, 그린, 그리고 레인 님이 함께 하는 오후. 저는 그 장면에서 레인 님이 이편과 저편을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로 보였습니다. 주인공이 받아들인 젠이 받아들인 레인 님. 자신은 받아들여 달라면서 젠을 받아들이기는 주저했던 그린에게 행동으로 대답한 레인 님. 레인 님이 없었다면 이 어색한 네 명의 조합이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레인 님은 완성의 계기였습니다.

저는 레인 님의 신념에 결국 다가가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인 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인 님과 저는 그냥 모든 게 다릅니다. 인권을 위한 투쟁의 끝에 함께 삽겹살을 먹는 것처럼 해방의 지평선에서 누군가 어디선가는 멈추듯이, 이해한다는 것과 지지한다는 것이 다르듯이, 기능적 공존과 인간적 공존이 다르듯이, 우리에게는 늘 어떤 거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망원경에 비친 바로 눈앞의 레인 님은 실제로는 저 멀리 있겠죠.

그래도 주인공처럼 레인 님이 만든 음식을 함께 먹어보고는 싶습니다. 주인공처럼, 시퍼런 멍이 든 레인 님의 등과 허리에 파스를 붙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관계란 모든 신념을 공유하고, 모든 자리에 함께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관계는 함께 놓여있음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겠죠. 누군가는 서로의 차이와 거리를 감수하면서, 먼저 다가가는 위험을 부담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게 저일 수도, 때로는 레인 님일 수도 있겠지요.

김혜진 장편 소설 『딸에 대하여』(2017) 표지. 사진출처 알라딘
김혜진 장편 소설 『딸에 대하여』(2017) 표지. 사진출처 알라딘

저는 레인 님을 탄생시킨 김혜진 작가에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딸에 대하여』를 한 번 더 써달라고요. 이번에는 당신, 레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한 번 더 써달라고요. 레인 님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습니다. 레인 님의 생각을 더 알고 싶습니다. 제가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야, 레인 님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조금 더 이해하고, 그 시대에 조금이나마 더 공명할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2725sena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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