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장애인자립생활운동 20년
20대에 사고로 하반신 마비
1평 방에 갇힌 재가장애인 5년
이후 노숙하며 자립생활 시작
강원서 IL센터·영화제·야학·탈시설까지
“강원의 캡틴, 나의 전사, 사랑하는 소장님”
어쩌면 다들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할까. 김용섭을 추모하는 사람들 대부분 김용섭을 향해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을 마음에 품는 것과 말하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음이야 누구나 품을 수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찬물 샤워할 때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김용섭의 영정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용기도 필요 없었다. 그들이 “사랑한다”고 말할 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무뚝뚝한 강원도 사투리 말투에 까무잡잡한 60세 장애인자립생활운동가 김용섭. 장례 내내 김용섭을 향한 사랑의 근원을 찾아다녔다.
- 사고로 하반신 마비 후 1평 방에서 5년
용섭은 1964년,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용섭의 작은형 소생인 조카 김미란은 “강원도 김씨 집안 남자들이 원래 표현도 없고 무심해 보여요. 그래도 우리 삼촌은 삼 형제 중 제일 다정하고, 나긋나긋하고, 잘생기셨어요”라고 했다.
용섭이 장애인이 된 건 1987년이었다. 20대였던 용섭은 군 제대 후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큰형과 작은형은 용섭을 안고 업고 다니며 치료에 전념했다. ‘신경치료 잘하는 데가 있다더라’, ‘침 잘 놓는 명의가 있다더라’ 하는 곳은 전부 다녔다. 용섭은 걸을 수 없었다.
30대가 된 용섭은 탁구장에서 살았다. 버스터미널 인근에 있던 탁구장은 용섭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탁구장 한편, 1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있다가 손님이 오면 돈을 받고 탁구공과 라켓을 주는 일을 했다.
탁구장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건물에 있었다. 탁구장 밖으로 나가려면 누군가가 도와줘야 했는데 용섭은 아무에게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미란은 “삼촌이랑 술 한잔하는데 그러시더라고요. 탁구장에서 살 때 형님들이나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연락을 안 하셨다고요. 성격상 그게 잘 안되셨대요”라고 말했다.
용섭은 그렇게 5년을 탁구장에 갇혀 살았다. 자존심도 세고 남에게 빚지는 걸 싫어하던 용섭은 이후 야반도주와 풍찬노숙으로 자립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 ‘얹혀살기 싫다’ 길거리서 시작한 자립생활
용섭이 40대가 됐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당시 큰형은 원주, 작은형은 춘천, 용섭은 평창에 있었다. 미란이 말했다. “그때 삼촌이 ‘평창에서 원주가 가까우니까 큰형님 집으로 가겠습니다’ 했대요. 그렇게 큰아빠 댁에서 같이 살다가 삼촌이 어느 날 밤, 집을 나가셨어요.”
큰형 집을 나온 용섭은 한 체육관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용섭은 가족 중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가족도 용섭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용섭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미란은 “삼촌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죄라고 생각할 정도로 강한 모습만 보이셨어요. 남한테 의지하고 기대는 걸 못 하는 분이에요”라고 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자립한 용섭은 스스로 기반을 만들어갔다. 우선 생활공간부터 만들었다. 체육관에 있는 온갖 물건을 가져다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물이 차고 팔뚝만 한 쥐가 돌아다녔던 체육관, 용섭의 첫 자립생활 공간이었다.
용섭은 그렇게 열악한 곳에서 강원 지역 장애인들과 함께 자조모임을 만들었다. 2005년부터 가사도우미, 활동지원사 등으로 용섭과 20년간 함께한 정은희는 “야구장이었던가,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소장님이 컴퓨터를 갖다 놓고 살고 계셨어요. 장애인끼리 모여서 자조모임도 하고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하더라고요. 비만 오면 한강이 돼서 치우고 청소하고 그랬어요”라고 기억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도 체육관에서 용섭을 처음 만났다.
“누가 강원도에 이래저래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얼씨구나, 좋다’ 하고 바로 갔지. 김용섭이는 2005년에 원주의 한 체육관에서 처음 만났지. 원주종합체육관이었던 것 같아. 김용섭이가 책상 하나 딱 두고 거기 있더라고. 강원도에 투쟁할 놈이 없었는데 이 웬 떡이야. 만나자마자 투쟁 이야기했어. 투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만나보니까 싸울 의지도 있고 조금만 꼬시면 싸울 수 있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열라 꼬셨지. ‘센타(장애인자립생활센터) 만들어야 된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하면서. 센타의 역사로 보면 2005년이 복지관을 물리치자는 목표로 조직을 막 시작할 때거든. 이런 시기에 야(김용섭)를 만나게 된 거야.”
체육관은 탁구장과 달랐다. 탁구장에선 고립을 겪었지만 체육관에선 자립생활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20년 넘게 강원도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 원주시 최초로 장애인예산 확대 투쟁
경석이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에, 보자. 요게 2006년 11월 4일 강원센타 창립총회 사진. 강원센타가 지금은 원주센타야. 처음에 만들 땐 강원 전체를 카바(커버)해 볼라 했는데 그땐 역량이 안 됐어. 그래도 내가 김용섭이 샤바샤바 꼬셔가지고 1년 준비해서 센타 만들고 총회 열고 했지.”
구 강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자 현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원주센터)의 시작이었다. 용섭은 사망 때까지 20년간 원주센터 소장이었다.
강원의 첫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사무실 없이 운영됐다. 집도 없이 자립했는데 사무실 없는 게 대수였을까. 용섭은 2006년, 원주센터(구 강원센터) 소장을 시작으로 이동권, 활동보조 제도화, 교육권 등의 투쟁에 앞장섰다.
2008년 3월부터는 ‘원주장애인 차별철폐와 생존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원주장애인공대위)’에서 활동하며 원주시에 10대 요구안을 전달했다. 요구안 내용은 △활동보조인서비스(현 활동지원서비스) 추가 지원 △장애인이동권 보장 △장애인일자리 창출 △장애인야학 예산 지원 △장애인복지예산 확충 등이었다. (관련 자료: 전장연 ‘원주 장애인차별철폐와생존권확보를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요구안과 성명서’)
김기열 당시 원주시장이 ‘예산이 없다’, ‘원주시 장애인 복지가 앞서가면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곤란해진다’ 등의 답변을 하자 원주장애인공대위는 집중투쟁에 돌입했다. 강원도민일보에 따르면 원주시 중앙동에서 첫 집회를 연 공대위는 원주시청 사회복지과 기습점거, 삭발식 등을 하며 10대 요구안을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관련 기사: 강원도민일보 ‘[기획취재] 장애인 복지정책 협상 타결 의미’)
2008년 4월 15일부터는 원주시청 앞에 천막을 치고 약 한 달간 노숙농성을 했다. 그 결과 활동보조인서비스 추가 지원 등 장애인예산 확대를 쟁취했다. 전장연은 이 투쟁을 “강원 지역에서 장애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강원 지역 장애인운동의 토대를 다지는 값진 성과를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 야학·영화제, 사무실도 돈도 없지만 “일단 해보자”
집 없이 자립하고, 사무실 없이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든 용섭은 장애인 없이 장애인야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반딧불장애인야학을 만들었는데 교사도 학생도 없었다. 유일하게 마련한 건 ‘밥’이었다. 정은희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장애인들을 야학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서 소장님이 밥을 하자는 거예요. 일단 밥을 차려 놓으면 제때 밥해 먹기 힘든 장애인들이 와서 먹지 않겠냐고, 밥을 성의껏 차려서 장애인을 많이 모으자고 하셨어요.
밥을 하려니 시설도 없고 기구도 없잖아요. 소장님이 다니던 교회에서 난방기구, 식당기구, 차량 같은 걸 지원받아서 밥을 했어요. 그때 내가 제일 처음 만든 게 된장찌개였는데 먹으러 오는 장애인이 아무도 없어.
그래도 매일 밥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급식과 야학 설립이 동시에 진행된 거죠. 소장님이 급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얘기하셨어요.”
2008년 9월 26일, 원주센터가 사무실을 얻게 되면서 반딧불야학 공간도 마련됐다. 처음엔 운영비가 없어서 반딧불야학 학생들이 월 2만 원을 내고 매일 두 끼 급식을 먹었다. 밥을 짓는 은희와 밥을 푸는 용섭도 매달 2만 원씩 냈다. 용섭이 그렇게 원하던 무상급식은 2016년, 지자체 지원을 받으면서 이룰 수 있게 됐다.
장애인인권영화제도 아무 기반 없이 일단 진행했다. 은희는 “소장님은 ‘일단 해보자’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2006년, 용섭은 스크린이 달린 트럭을 하나 섭외해서 원주종합운동장 모퉁이에 세우고 고 박종필 감독의 ‘버스를 타자’를 틀었다. 장애인 1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마시며 영화를 봤다. ‘제1회 원주장애인인권영화제’가 열린 순간이었다.
원주장애인인권영화제는 지난해 19회를 맞았다. 치악체육관,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등의 장소를 대여해 운영되고 있다. 지자체 지원도 받고 각종 홍보부스도 운영하는 등 큰 규모로 성장했다.
원주센터, 반딧불장애인야학, 원주장애인인권영화제 등은 강원도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의 기반이 됐다. 용섭은 이 같은 기반을 중심으로 장애인을 장애인거주시설과 집에서 탈시설·탈재가시키기 시작했다.
- 사랑하는 우리 소장님
최지원은 7살부터 시설에 살다가 20살부터는 부모님과 살았다. 시설거주 경험도 있고 재가장애인으로서의 경험도 있다. 용섭은 지원에게 ‘자립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지원은 2015년, 체험홈에 입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립을 준비했다.
지원은 “자립하려고 하니 휠체어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소장님이 전동휠체어를 구해다 주셨어요. 국회의원인가 원주시의원한테 가서 ‘지원이가 자립하고 여기저기 많이 다녀야 하는데 전동휠체어가 없어서 집 밖을 못 나가고 있다’고 하셨대요. 자립하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아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라고 말했다.
재가장애인으로 살던 정지연은 성추행 등 여러 피해를 겪다가 2019년, 원주에 와서 용섭을 만났다. 지연 역시 체험홈에 입주하면서 자립했고 이후에는 원주센터 활동가가 됐다. 지연은 “소장님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많이 혼났어요”라고 했다. 지연이 휴대전화를 자주 바꿔서 용섭이 낭비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지연은 “처음에는 소장님 말투가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소장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에요. 혼내시고선 뒤끝 없으시고, 상처받았을까 봐 풀어주시고. 화를 내셔도 그때뿐이에요. 사랑하는 소장님 덕분에 저희가 자립도 하고 활동도 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던 권오승이 “그건 네가 잘못해서 혼난 거야”라고 했다.
오승도 용섭에게 많이 혼났다고 한다. 오승은 “우리 소장님은 화를 엄청나게 잘 내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오승이 용섭과 술 한잔하면서 힘든 일이 있어서 울었는데 용섭이 ‘나 이제 니하고 다신 술 안 먹을래’라고 소리를 지르곤 집에 가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술 한잔해야지’ 하면서 다가왔다고 한다. 오승은 “소장님께 많이 혼났지만 우리 소장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지원도 마찬가지다. 지원은 “처음엔 소장님이 무서워서 많이 울었어요. 근데 10년 넘어가니까 소장님이 잔소리하실 때의 마음이 이해가 돼요. 관심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저를 딸같이 여기셔서 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제 잔소리라고 생각 안 합니다”라고 했다.
이형숙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도 종종 용섭에게 “화나셨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면 용섭은 ‘내 말투가 원래 그래요. 화가 안 났는데 사람들이 평창 사투리 때문에 오해해서 그게 늘 속상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형숙은 “강원도가 대구 못지않은 보수 지역인데 여기서 인권운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90% 이상이 다 적이잖아요. 이런 곳에서 탈시설·장애인자립생활운동을 하면서 장애인을 (시설에서) 직접 빼 오셨어요. 20년간 이렇게 하는 게 쉽지 않아요”라고 했다.
용섭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진행된 광화문역 지하 농성투쟁에도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박경석은 “1,842일 중에 자기 당번 되면 꼭 오고. 빵꾸(펑크) 절대 안 내고. 강원 지역 장애인들 올려보내고”라고 했다. 형숙은 “날마다 강원도에 전화해서 농성장 사수해 달라고 하면 소장님이 원주, 춘천, 동해, 강릉에 있는 활동가들을 서울로 보냈어요”라고 말했다.
- 방광암 치료 중 영면… “화롯불 같은 사람”
방광암 진단을 받은 건 지난해 초였다. 항암치료를 하는 중에도 매일 원주센터에 출근했다. 김서현 원주센터 사무국장은 “소장님은 자신이 원주센터 소장이란 걸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소장이란 직함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애착이 많으셨고요. 그 역할을 끝까지 다하고자 항상 최선을 다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서현은 그동안 차기 원주센터 소장을 키워야 한다고 용섭에게 강력하게 얘기해 왔다. 강원 지역 장애인운동이 1세대에서 끝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용섭이 암 진단을 받고 나선 후배를 키워야 한다는 말을 차마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용섭은 서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자신이 없을 때를 함께 대비했다고 한다. 서현은 “짧게라도 센터에 출근하는 걸 정말 좋아하셨는데 제가 괜히 쉬라고 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아파요”라고 말했다.
2025년 3월 16일 오전 9시 40분, 용섭이 영면에 들었다. 강원도 장애인운동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용섭. 경석은 “김용섭이도 나도 교회 출신이라 그런가. 인간의 탐욕을 복음으로, 권리의 마음으로 바꾸는 에너지가 얼마나 뽕뽕뽕 올라오는 동지인데. 이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나의 전사인데”라고 애도했다.
3월 17일 추모제와 18일 노제에서도 애도와 사랑이 이어졌다.
“강원도는 당신이 씨앗을 뿌리셨으니 이 씨앗이 강원도 곳곳에서 열매 맺을 겁니다.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고 장애인이 평생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강원도가 될 겁니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
“소장님은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을 너무나도 애정하셨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연대 요청을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항상 연대하셨습니다. 소장님, 저희는 소장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이형숙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소장님은 제게 버팀목이자 아빠였습니다. ‘어깨 쭉 펴.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자신감을 갖고 다녀’라고 항상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셨던 소장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빠, 사랑합니다.” (최지원 원주센터 활동가)
“장애인운동 불모지인 강원도에서 장애인권리투쟁의 물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지켜내 줘서 너무 고맙나이다. 하늘나라에서 전장연 투쟁을 지켜 주십시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강원의 영원한 캡틴, 원주센터의 영원한 아빠, 사랑하는 소장님.” (박수은 강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사랑의 근원은 김용섭에게 있었다. 용섭은 강원도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강원 지역 장애인을 아끼며 살았다. 장애인 동료가 해진 옷을 입고 있으면 ‘너 옷 없니?’ 한 소리 하고는 아웃렛에 데려가 옷을 사줬다. 굶고 있으면 밥을 사줬다. 용섭 본인도 수급비로 생계를 이어가는 게 넉넉하지 않았을 테다.
용섭은 자신이 펼치고 산 사랑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었다. 정지연은 “우리는 소장님을 사랑해서 원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강원의 자립생활운동은 사랑의 토양에서 뿌리내렸다.
김미란은 용섭이 화롯불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앞에서 보면 불꽃이 보이지 않는데 한번 뒤적이면 감자를 구울 만큼의 뜨거움이 보이잖아요. 삼촌은 겉으론 차가워 보일지 몰라도 화롯불 같은 뜨거운 마음으로 강원 장애인운동에 헌신해 오셨어요.”
- 장애인이 조문하고 추모할 권리
용섭은 화장 후 원주추모공원 휴마루 봉안당에 안치됐다. 강원 지역 장애인들은 눈물로 용섭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용섭은 마지막까지 투쟁 과제를 주고 갔다. 휴마루 봉안당은 원주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고인을 안치할 자리를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없다. 선착순으로 안치하는데 용섭의 자리는 가장 아래층이었다. 휠체어 이용자가 조문하기 어려운 위치다.
활동가들이 원주시에 문의한 결과 ‘원주시 조례에 따라 순서대로 안치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조문과 추모에도 장애인 접근권 보장이 필요했다. 활동가들은 향후 조례개정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김용섭은 휴마루 봉안당 ‘13실-304’에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라고 적힌 주황색 몸피씨와 함께 안치됐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