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 (미란다 프리커, 2025, 유기훈•정선도 역, 오월의 봄)
- 보이지 않는 억압과 차별의 장벽: 정신장애인의 증언과 해석을 둘러싼 이중 억압
뉴진스 OMG 뮤직비디오 배경은 정신과병동으로, 영상 속 정신과의사로 추정되는 인물은 여럿 등장한다. 뉴진스 멤버 중 민지도 마치 의사인 것처럼 묘사되며, 김주헌 배우도 의사로 보이지만, 결국 이들 모두 정신과환자였으며, 진짜(?) 정신과의사는 이병건님(침착맨)이었음이 마지막에 밝혀진다.
우리에겐 다소 익숙한 반전일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등과 같은 미디어에서 ‘흰색 가운을 입고, 정신과의사’인 것처럼 나오는 인물이,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 흉내를 내는’(소위 정신과적으로는 의사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환자였음이 나타나는 클리셰적 장면들은 종종 볼 수 있다. (이후 이러한 인물들은 대부분 보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며 장면이 끝나거나 전환된다.)
단순히 우스꽝스런 코미디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식적 부정의, 즉 자연스럽게 신뢰성이 부족한 존재로 인식이 되는 것, 그들의 증언에 대한 의심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장애인에게 목소리가 사라지는 비가시적 차별과 억압이라는 장벽 속,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Miranda Fricker)의 책 <인식적 부정의>는 이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제공해준다. 학술적 개념인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를 조금 단순화시키자면, “어떤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주장을 펼쳤을 때, 그 사람이 소속되어 있는 정체성에 부여되어 있는 편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경우”로 정리될 수 있다.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말과 증언을 통해 자신이 가진 앎/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사람이 부당하게 낮은 신뢰성을 부여받을 때 발생하는 증언적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집단적 자원의 결여로 발생하는 해석학적 부정의(hermeneutical injustice)이다. 미란다 프리커가 제시한 인식적 부정의는 애초,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목적이 중요했다. 그러나 인식적 부정의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 문제에서도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뉴진스 OMG 뮤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의 경우 높은 ‘신뢰성’이 (자연스레) 따라 붙을 수 있다. 즉 ‘의사라고 주장한 사람이 실제로 의사가 아니라 환자였다’라는 장면에는 의사라는 직업에 상징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인식론적 특권이 작용하고, 극적으로 더 명확하게 대비되기에,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의 신뢰는 더 강력하게 상실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만약 어떤 당사자가 “난 미치지 않았어!” 혹은 “난 정신질환자가 아니야!” 혹은 “난 정신과약물이 필요 없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어쩌면 그 당사자가 ‘확실하게 더 미쳤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정신질환자임을 거부하는 순간, 소위 ‘병식’(insight)이 없다고 판단될 수 있으며, 결국 강제적 치료(강제입원, 강제적 약물치료 등)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정신질환자임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면? 소위 ‘병식’은 있다고 (타자에 의해) 판단되겠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신과진단명(e.g., 조현병 환자)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정신과약물치료에 대한 높은 순응성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 있다. 만약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경우는 어떨까? 가령 어떤 누군가는 자신을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 당사자임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의료모델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해야만 하는 상황을 거부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난’이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해석’이 부재되어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어느새 증발될 수 있다(이는 인식적 부정의 중 해석학적 부정의와 관련되어 있음). 그리고 추측컨대 아마도 병식이 없다고 치부되고, 타자에 의해 강제적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정신장애인은 증언적 부정의(자신의 목소리가 부정 및 배제 당하는 것)와 더불어 해석적학 부정의(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자원의 부족)에 동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식적 부정의라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인식적 부정의는 적극적으로 행사될 수도 있지만, (나름 유머일 수 있는) 농담 안에도 스며들어 매우 미시적으로도 작동될 수 있다.
영화 <리플리>에서 그린리프가 마지에게 “여자의 직감도 좋지만 팩트라는 게 있어”라고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자신이 남성이고 상대가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대를 하대하고도 그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그는 자신이 마지를 침묵시키기 위해 젠더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 있으며, 자신이 했던 일이 오히려 선의와 자애로운 온정 속에서 이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정체성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42.p)
어떤 누군가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칠 때, 그것을 거부하며 농담이라는 차원에서 “여자의 직감도 좋지만 팩트라는 게 있어”라고 말하며 거부하는 것. 즉 그가 ‘여성’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우 비가시적으로 인식적 부정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정신장애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가령 어떤 당사자가 유머를 발휘했을 때,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약 먹었어?”라고 반응할 때, 이것은 미세한 차별일 수 있다. 나의 언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농담이 웃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정신장애인)으로 인해 농담에 대한 반응이 병리적 색채를 띠게 될 때, 당사자는 더욱 큰 상처를 받고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가 경제적·교육적·직업적·성적·법적·정치적·종교적 차원 등 사회활동의 다양한 차원을 가로질러 대상이 되는 주체를 ‘추적하는’ 편견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추적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해당 개인을 증언적 부정의뿐 아니라 다양한 부정의 전반에 취약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인종적 편견은 (앵무새 죽이기의) 톰 로빈슨을 증언적 유형의 부정의 이외에도 수많은 부정의에 노출되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가 겪은 증언적 부정의는 명백히 체계적이었다. 특히 체계적 인식적 부정의는 어쩌면 그 당사자를 권력적으로 짓누르게 될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백인 집단에 대한 ‘동정심’과 같은 감정은 그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흑인이고, 동정의 대상이 백인이라면 상대에게 불쌍함을 느끼는 것은 금기시되는 감정이다. 백인 우월주의를 중심으로 구조화된 인종차별적 이념의 맥락 속에서, 백인의 눈에는 인간의 순수한 동점심이라는 근본적인 윤리적 정서조차 더럽혀져, (백인에 대한 흑인의 동정심은) 흑인 주체가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지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보일 뿐이다. 즉 흑인 남성은 백인인 상대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외로울지라도 백인에 대해 어떤 종류의 유리한 입장을 암시하는 감정을 갖도록 허용될 수 없다. (59.p)
-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식적 부정의에 대응하기: ‘인식적 부정의’라는 개념 도구의 힘
증언적 부정의는 사회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분위기적 편견’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그리고 잔여적으로 내면화 되어 있는 부정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인해 그 차별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어찌 보면 뒤에서 다시 언급될 ‘해석학적 부정의’와 연결되는 것인데, 인식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우리가 접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지식들이 생겨날 수 있다면 거기에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상사가 당신에게 마땅한 신뢰를 주지 않는다는 불평은 손쉽게 입증될 수도 없으며,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사회적 위험이 따를 것이다. (당신은 문제 직원이라는 오명을 얻을 수도 있고, 승진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 (중략) 증언적 부정의(라고 내가 부르는 것)가 사소하지 않으며, 실로 깊은 피해를 입히고, 심지어는 다른 형태의 사회 부정의들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윤리적 잘못에 해당한다는 발상은 그동안 거의 인식된 바 없었다. 만약 이러한 발상이 널리 인식되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분개의 목소리를 좀 더 낼 수 있었을 것이며, 개선을 위해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평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그에 대응하는 데서 더 나은 언어와 논의의 장을 개발하기 위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87.p)
사회적으로 만연하지만, 비가시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증언적 부정의,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증언적 부정의로 인한 괴로움의 핵심은 ‘모욕감’이라고 저자는 언급한다. 증언적 부정의를 겪는 사람들은 인식자로서 비하되며, 인간으로서도 상징적으로 비하되는데, 그것이 특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표현될 경우, 당사자에게 ‘깊은 모욕감’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증언적 부정의는 실제 사회활동(직장생활)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직장에서 견뎌야 하는 일상적인 증언적 부정의가 그들에게 상당한 직업적 불이익을 초래하는 사례가 책에서 언급된다. 증언적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정체성을 지닌 대리자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경우, 그것은 부당한 현실 속 살아가기 위한 다소 비극적인 몸부림일 수 있다.
카이로에서 일하는 한 이집트 여성은 회의 중 제안하고 싶은 정책이 있을 때, 자신의 제안을 작은 종이에 적어 동조적인 남성 동료에게 몰래 건네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성 동료에게 해당 제안을 발언하게끔 하고, 그 제안이 잘 수용되는지 지켜본 다음 그때부터 토론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제안했을 때 남성 동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 온 회의적인 반응으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고서 이런 방안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98~99.p)
지속적으로 인식적 부정의에 노출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존재 그 자체를 ‘상실’하게 될지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 일종의 정체성은 살아감에 있어 본질일 수 있다. 정체성은 혼자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끊임없는 사회적 대화 과정에 관여하게 되면서 조금씩 형성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여기에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바로 “내가 증언을 통해 지식의 확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증언적 부정의는, 주체에게 ‘앎의 능력’ 측면에서 주체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 차별’하는 측면에서 주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정보제공자 공동체로의 진입 금지는 실제의 인식적 삶의 정치를 이루는 중요한 일면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배제는 사실 흔한 형태의 증언적 부정의를 나타낸다. (중략) (만약 당신과 같은 사람의 말이 일반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이런 유의 증언적 부정의는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중략) 특정 주제에서 신뢰성이 이미 충분히 편견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증언을 할 수 있음에도 그러한) 잠재적 증언을 요청받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 화자는 그의 신뢰성을 사전에 약화하는 정체성 편견에 의해 침묵 당한다. (239~240.p)
증언적 부정의는 그것을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더 나아가 ‘강요된 침묵’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를 타자가 먼저 선점해버리는 것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바로 나에 대해 정의하게 되는 것이다. 선점적인 증언적 부정의는 침묵시키기의 기제로 작동한다. 이를 프리커는 ‘베어진 나무’에 비유하고, 그것은 증언적 부정의의 보이지 않는 해악, 바로 ‘인식적 대상화’의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 속 우리가 ‘인식적 부정의’라는 개념 도구를 통해 인식적 억압에 놓여 있는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외칠 수 있다면, 아주 작을 수 있지만 그 때부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 증언적 정의를 향한 길: 관계의 충돌, 그리고 차이의 정치 드러내기
증언적 부정의가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다방면으로, 광범위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는지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증언적 부정의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프리커는 ‘청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이 미치는 영향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다. 즉 증언 교환에서 청자와 화자 어느 쪽도 중립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에 근거하여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증언적 부정의를 생각해보자. 앵무새 죽이기의 톰 로빈슨 사례의 경우 화자인 흑인의 입장이 존재하며, 동시에 청자들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 백인의 입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지각에 발생시키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Sanism(비당사자중심주의, 정신장애차별주의)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Sanism은 정신장애인에게 불이익을 주고, 비장애인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법률·정책·태도·언어·행동의 집합을 의미한다. 결국 정신장애인이 지니고 있는 증언적 부정의와 같은 차별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화자뿐만 아니라 청자인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특권’을 드러내야 한다. 다만 비장애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에 적절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즉 인식적 부정의 상황에서 청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입장,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권의 재인식’을 시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프리커는 ‘증언적 정의의 덕’이 필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일종의 자기성찰로, 청자가 스스로 신뢰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편견의 영향을 가급적 중화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권위, 권력, 인식적 부정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욕심, 차별적 시선들. 어쩌면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찰하기 위한 태도가 항상 가능할까? 그것은 말 그대로 쉽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합리화하고, 무의식적으로 성찰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관계의 충돌’을 통해 증언적 정의 덕을 교정적으로 발휘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개인적 친밀함이 비-편견적 신뢰성 판단을 내리는 것을 초기에 방해했던 편견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낯설었던 대화 방식이 친숙해지며, 피부색이 무관해지고, 성별이 더 이상 영향을 주지 않으며, (상대의) 나이를 잊게 되는 등 말이다. (중략) 대화가 지속되거나 친분이 쌓이며 친밀함의 정도가 증가함에 따라 편견적인 첫인상은 사라지고, 청자의 신뢰성 판단은 저절로 교정된다. 특정 종류의 편견을 무력화할 수 있는 친밀감의 힘은 화자에 대한 청자의 지각을 변화시킨다. (182.p)
가령 ‘층간 소음’의 경우 상호간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故신영복 선생님 또한 ‘관계’에 중점을 둔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위층에서 쿵쿵 뛰는 애 때문에 애로사항이 있다면 올라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면서 아이 얼굴도 보고 이름도 물어보라는 것이다. 왜 일까? ‘아는 아이’가 뛰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덜 시끄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프리커 또한 청자의 증언적 정의의 덕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그렇기에 다양한 사람들, 특히 다소 강력한 편견의 힘에 치중될 수 있는 집단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 사람들과 지속적인 만남, 경험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리커는 개인과 개인 간의 교류와 만남, 충돌, 경험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회적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그 안에서 개인들의 인식적 틀은 여전히 한계에 직면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증언적 정의의 경우에서, 누군가는 이 덕을 소유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은 단지 개인적 차이만이 아니다. 이는 문화적-역사적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젠더의 구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경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정체성 편견에 관해 증언적 정의의 덕을 소유할 위치에 있지 않은 환경이다. (187.p)
인식적 부정의를 해소하고 인식적 정의로 가기 위해서, 사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구조인 것이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증언적 부정의는 명확하게 존재한다. 이를 위해선 결국 정신장애 당사자와 비당사자 간의 지속적 충돌을 통해 틈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결국 사회적 구조와 환경의 변화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장애 당사자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은 명백한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개인 간의 균일성을 지향하기 보다는, (동등한 시민권 보장이 기본적이지만)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일 수 있다. 균열을 만들고, 차이를 드러내는 정치적 운동이 어쩌면 증언적 부정의의 추를 조금이라도 정의에 가깝게 갈수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기울어진 인식적 부정의에서 ‘인식적 정의’로 나아가기: 당사자 경험과 목소리로부터 만들어진 풍성한 해석적 자원에서부터
<인식적 부정의>의 진가는 ‘해석학적 부정의’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물론 책은 증언적 부정의에 대한 문제 및 대안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증언적 부정의에 대해 전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증언적 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이를 위해 궁극적으로 해석학적 부정의 타파에 집중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해석학적으로 부정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는데 있어 그 경험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마련되어 있는 것에 부정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의 여지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경험들을 공유하는 것은 이러한 해석적 부정의를 극복해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기존에 구성되어 있던 사회적 해석 습성을 집단적으로 극복하고, (원래부터 존재했음에도) 가려져 있던 경험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 살면서 ‘소그룹으로 나뉘어’ 본 적이 없었어요. 제 그룹에서 사람들은 산후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그 45분 동안 저는 제가 스스로를 비난하고, 제 남편이 저를 비난해왔던 게 제 개인적인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중략) 그 깨달음은 누군가를 영원히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순간 중 하나예요. (270.p)
어떤 여성들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우울감과 괴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 경험과 감정들에 대해 ‘스스로’ 증언을 하기 위해선, 나의 경험과 감정을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럴 때 그들에게 주어진 해석의 자원들, 해석의 프레임은 협소할 수 있다. 적은 선택지 속에 나의 행동과 마음, 상태 등을 산후우울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수 있다. 물론 이 해석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럴듯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석적 틀’ 밖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나의 경험을 그렇게밖에 해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해석적 틀에 따라 나의 경험을 해석하게 되었을 때, 다소 개인에게 초점을 두게 되어 자연스레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는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
프리커는 이러한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다. 즉 해석학적 부정의가 자신의 사회적 경험의 중요한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부당하게 막음으로써 자기이해의 중요한 부분을 박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위의 사례처럼) 약 45분 동안 이루어진 당사자 간 경험의 치열한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의식화 과정으로,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등장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당사자를 둘러싸고 있는 해석학적 부정의를 바로 잡는 것의 시작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장애 당사자들에게는 어떨까? 이들에게 현재 해석적 자원이 없을까? 아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프리커는 어쩌면 작금의 해석적 자원들이 ‘해석적 어둠’의 영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이해의 중요한 부분을 박탈당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일종의 이중 억압 상황으로, 해석적 자원 그 자체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기존의 주류 해석적 자원이 나의 인식적 주체성을 억압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나의 정신적 고난, 혹은 광기와 관련된 경험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의거한 진단명들, 혹은 화학적 불균형(chemical imbalance)과 같은 해석적 자원들이 주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해석에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갑작스레 정신적 고난이 찾아온) 어떤 이는 정신과진단을 받고, “아 이 어려움이 나의 잘못이 아니었구나, 이것은 일종의 ‘질환’이었구나” 라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진단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들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령 일라이 클레어는 책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통해, 진단은 ‘종종 위험하고 이따금 유용하지만, 결코 중립적이지는 않다’라고 지적한다. 매사추세츠에 있는 저지로텐버그교육센터(judge rotenberg educational center)라는 시설을 예로 들면서, ‘치료’ 계획의 일환으로 많은 학생이 등에 4.5킬로그램짜리 배터리팩을 차고, 팔다리와 배에 전극을 달고, “나쁜 행실”을 하지 않는지 24시간 내내 감시당하고, 위반 행위가 일어날 때마다 직원이 한 번에 2초씩 전기충격을 가하는 충격적 현실을 지적한다. 클레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단은 이러한 폭력이 고안되고 또 행해질 수 있게 한다. 입소자들에게 자폐, ADHD, 지적장애, 양극성장애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는 이유로, 로텐버그에서 전기충격은 고문이 아니라 치료법으로 인식되고 옹호된다. 진단의 대가가 이렇게나 크다.”
다시 돌아와서,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것의 핵심은 (해석적 자원이) 단지 ‘그것밖에’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것이다. 즉 해석적 자원의 협소함, 선택권의 부재, 단일한 선택권의 제공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어떤 정신장애 당사자는 해석적 자원 확장에 대한 목마름이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이는 새로운 해석적 자원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한 상황, 즉 해석적 부정의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가령 어떤 괴로운 경험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자원이 부재한다면, 그 당사자는 지속적인 괴롭힘에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될 뿐 아니라, 깊은 괴로움과 혼란, 고립 상태에 남아 있게 될 수 있고, 이에 저항할 수도 없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적 괴롭힘’이라는 개념이 부재되어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해악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일차적인 인식적 해악은, 그 이해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경험 일부가 집단적으로 이해되지 않아서 그것이 그녀 자신조차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이차적 해악 중에는 그녀가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적 증상을 겪었다는 것, 호명할 수 있는 이유를 댈 수 없어서 이직조차 성공적으로 신청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결국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는 것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실업 수당을 신청하러 갔을 때, 이 모든 것의 원인에 이름이 없다는 점은 또다시 그녀가 수당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294.p)
그렇다면 새로운 해석적 자원들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바로 억압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권력적으로 주변화 되어 있는 집단의 사회운동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해석학적 주변화를 겪는 것은 사회적 권력을 갖지 못한 집단으로, 바로 그 당사자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교차하면서 서서히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침묵을 깨고자 했던 ‘이것’에는 이름이 없었다. 소빈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중 8명이 인사부 사무실에 앉아, 공개 발언을 위한 포스터에 무엇을 적을지 머리를 맞대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걸 ‘성적 협박, 성적 강압, 직장 내 성착취’라고 부르고 있었죠. 이 이름들 중 어떤 것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미묘하거나 미묘하지 않은 지속적 행동들을 모두 포괄하는 무언가를 원했어요. 누군가 ‘괴롭힘’을 떠올렸어요. 성적 괴롭힘! 우리는 즉시 동의했어요. 바로 그거였죠. (273.p)
여성운동의 당사자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 억압, 차별, 트라우마의 이야기가 공유되는 과정, 거기에서 그 때까지 ‘플러팅’으로 해석되던 것이 ‘성적 괴롭힘’이라는 새로운 해석적 개념으로 정의되어 전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장애 관련 영역에서 해석적 부정의 대응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최근 정신장애인의 인권과 관련된 가장 뜨거운 이슈 중에 하나는 ‘격리·강박’이다. 격리(Seclusion)는 입원 환자치료의 일환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일정시간 동안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며, 강박(Restraint)은 손목이나 발목을 강박대로 고정시켜 환자의 신체운동을 제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격리·강박은 정신과입원치료 과정에서 ‘치료적’ 처치의 일환으로 흔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종종 사망과 같은 비극적 참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가령 2016년 서울 모 정신의료기관에 입원 중이던 당사자가 35시간 격리·강박 이후 사망한 사건이 있었으며, 최근 24년 8월부터 한겨레의 지속적인 보도로 인해 춘천(252시간 강박), 부천, 인천 등의 정신의료기관 내 격리·강박 사망사고들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격리·강박 과정을 인식적 부정의로 들여다보면 어떨까? 먼저 증언적 부정의 차원에서는 격리·강박 과정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외면당하는 현상이 연결될 수 있다. 정신질환에 부착되어 있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정신과환자가 진실을 말할지라도, 의료진은 환자 발화 신뢰성 수준을 축소하여 증언적 부정의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 경기도 모 정신의료기관 사망사고의 경우 피해자가 계속 119를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배가 많이 아프다고 응급실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러한 증언은 외면당했다).
해석학적 부정의 차원에서 격리·강박 현상을 조망하면 어떨까? 몇 가지 차원에서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관점들이 형성될 수 있다. 우선 ‘강박’이라는 행위와 관련하여, 주로 신체적 강박(Physical restraint)과 기계적 강박(mechanical restraint)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억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당사자들은 강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광범위한 폐해들을 제기했다. 가령 강박 과정에서 진정제 또는 향정신성 약물 투여로 인해 자유로운 움직임이 제한되는 경험들을 표출하기 어려웠지만, ‘화학적 강박’(Chemical restraint)이라는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등장하면서 적극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은 격리·강박을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목격하는 경우 겪게 되는 어려움도 토로하였다. 병동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목격(더 나아가 자신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부여 할 수 있다. 이 또한 적절한 해석적 자원이 없었을 때는 기저에 위치했지만, ‘정서적 강박’(emotional restraint)이라는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등장함에 따라 외부로 표출되었다. (격리 및 신체적, 기계적, 화학적) 강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환자들이 의료진들에게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거나 특정방식으로 행동하는 것 등에 제약을 느끼는 상황을 지칭하는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된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의 해석적 자원은 격리·강박이 ‘치료’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현상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사자들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해석되는 격리·강박을 ‘처벌 및 고문’으로 느끼기도 했다. 가령 (3번의 입원을 경험한) 당사자이자 정신과의사인 대니얼 피셔는 ‘독방에 갇힌 것’이 ‘치료적 격리’로 해석되는 현상, 강박된 뒤 ‘강제로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약물 주사’를 맞은 것이 ‘치료적 계획’으로 해석되는 현상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치료’를 위한 서비스가 누군가에게는 ‘영혼의 깊은 상처’이자 ‘고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UN CRPD(장애인권리협약)의 등장은 공식적인 해석적 자원을 제공했다. CRPD는 제15조를 통해 ‘고문 또는 잔혹, 비인도적이거나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대우 및 처벌’로부터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을 표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후안 멘데스(Juan Mendez) UN 고문 특별보고관(United Nations Special Rapporteur on Torture)은 정신장애인을 단기간으로 강박하는 것은 ‘고문과 학대’에 해당될 수 있으며, 강박과 독방 감금을 포함한 모든 강압적이고 비동의적인 조치를 절대적으로 금지해야 함을 주장했다. 즉, 격리·강박이 ‘치료적 행위’로만 해석되던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주장한 경험에 기반하여 ‘고문’이라는 개념으로 (동일한 현상이) 새롭게 해석적으로 정의되었을 때, 당사자들이 인식할 수 있는 문제 영역은 확장되며, 이로 인해 눌려있던 감정이 표출되고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해석학적 부정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석적 자원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씩 평평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프리커는 해석학적 부정의의 본질은 ‘사회적 권력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결국 해석학적 주변화를 만들어내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꾸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회변화를 위한 집단적 정치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부족한 해석적 자원, 이는 결국 당사자운동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당사자운동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해석적 자원을 통해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은 작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가령 당사자연구를 통해 대안적인 자기서사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현재의 정신의료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신건강 위기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오픈 다이얼로그, 목소리 들림에 대해 병리적 해석을 넘어 의미 있는 현상으로 재정의하려는 Hearing Voices Movement 등이 있다. 매드 프라이드(Mad Pride) 또한 광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자신의 경험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해석적 자원’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해석적 자원이 ‘해방’을 갈구하는 당사자들의 경험이 모이고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직관적이지는 않더라도, 다소 낯설더라도, 이러한 새로운 해석적 자원은 당사자의 경험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응축된 ‘날것’의 서사이기에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집중하여 경청해야한다. 더 나아가 당사자운동과 여기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느리더라도 조금씩 사회적 행동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새로운 해석적 자원이 등장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변증법적으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본질적 삶의 투쟁일 수 있다.
필자 소개
송승연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유기훈과 함께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