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손상’, ‘무능’ 판단하는 종합조사 거부한다
장애인이 직접 체크한 ‘자가진단표’ 제출
복지부 면담했지만 별다른 답변 無
생존권 쟁취 위해 생존 내거는 ‘단식투쟁’ 예고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앞. 사진 하민지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앞. 사진 하민지

전국 장애인 227명이 활동지원서비스 재심사 투쟁을 전개한 지 3주가 지났다.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로비 농성은 18일로 21일 차를 맞았다.

활동지원서비스 변경·이의신청을 하며 재심사 투쟁에 나선 장애인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쟁취하는 개별투쟁이고 300여 명이 동시에 진행하는 집단투쟁이다.

오는 7월부터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할 예정이다. 2006년, 한강다리 위에서 포체투지를 하며 활동지원서비스를 만든 중증장애인이 이제는 단식투쟁으로 “내가 필요한 만큼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쟁취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애인 150여 명은 28일 오후 2시,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로비 농성장에 모여 이같이 밝히고 2시간가량 집회를 열었다.

6컷 만화. 장애인들이 18일 집회에서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6컷 만화. 장애인들이 18일 집회에서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챗지피티를 통해 재구성했다. 

- 10분 만에 “혼자 숟가락 들 수 있죠?” 묻고 조사 끝

18일 오전, 장애인들은 주민센터에 ‘종합조사 자가진단표’를 제출했다.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 항목에 장애인이 직접, 자신이 필요한 만큼 체크한 것이다.

장애인이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려면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종합조사 항목이 신체적 기능을 확인하는 질문으로 구성돼 있어서, 현행 조사표만으론 장애인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조사 과정 중엔 장애인이 자신의 신체적 ‘무능’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위 만화는 이날 집회에서 나온 장애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장애인들은 이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종합조사 도입 6년간 한 번도 개선되지 않았다.

서울시 강동구 강일동 주민센터에 자가점검표를 제출한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가 “조사원이 집에 와서 여러분에게 뭐라고 물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종합조사 중 차별을 겪은 장애인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혼자 세수할 수 있냐,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냐, 혼자 숟가락질할 수 있냐, 혼자 텔레비전 틀 수 있냐, 이런 것만 자꾸 물어봐요!” 박김 대표가 “조사는 몇 시간 동안 하던가요?”라고 묻자 장애인들은 “10분이요”, “20분만 보고 갔어요”라고 대답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장애인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질문으로, 생존이 달린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이 결정된다.

박김 대표는 “어떤 장애인은 연세가 90세인 아버지와 산다. 조사원은 그 아버지가 장애인이 밤에 화장실 갈 때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하더라”라며 종합조사 때 벌어지는 차별 사례를 언급했다.

박김영희 대표가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농성장에서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박김영희 대표가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 농성장에서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 의사 소견만으로 판단? 장애인에게 ‘무능’을 증명하라니

조사원이 장애·장애인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도 문제지만, 변경신청 할 때 의사 진단서나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것도 꾸준히 문제로 지적됐다.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9조에 따라 변경신청 때는 의사의 의학적 판단으로 장애인 신체 기능이 어느 정도 ‘손상’됐는지만 심사한다. 장애인들은 반인권적인 해당 조항을 즉시 삭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또한 해당 조항을 차별적이라고 판단했다. 위원회가 한국의 장애인 인권 보장 상황을 점검하고 한국 정부에 통지한 문서(최종견해)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최근 장애등급제가 6개 등급에서 2개 정도로 개편됐음에도 장애등급제를 포함해 장애에 대한 의학적 모델이 여전히 당사국(한국)에 만연해 있어,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적절한 서비스와 지원에 접근을 제한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장애의 정도와 유형은 사람마다 다르다. 혼자 숟가락을 들 수 있어도 손 떨림이 있어서 식사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긴 하지만 팔과 다리를 뻗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지원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이 같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지원은 장애인의 생존뿐만 아니라 존엄과도 연결된다. 활동지원시간을 필요한 만큼 받으면 가족이나 동료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식사할 수 있다. 옷 갈아입기, 용변 처리 등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깔끔하고 안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활동지원제도는 혼자 숟가락을 들 수 있으면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손 떨림 때문에 음식물을 흘리게 되면서 자기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은 판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애인은 종합조사 때 자신의 ‘손상’과 ‘무능’을 입증해야 한다. 혼자 숟가락을 들 수 있어도 없다고 답해야 더 많은 활동지원시간을 받을 수 있다. 장애인들은 이 같은 과정 자체가 장애인에게 인권침해적이고 모욕적이라고 끊임없이 외쳐왔다.

신체 ‘손상’, ‘무능’ 중심의 판단은 발달장애인에게도 차별적이다. 장순영 두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발달장애인 중에는 언어표현이 어렵거나 행동에 특성이 있는 등 일상생활 전반에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종합조사는 신체 기능을 중심으로 점수를 매기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에게는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가 나온다”고 비판했다.

장애인들은 정보공개청구로 받은 종합조사 결과서에 자신이 다시 체크한 ‘자가진단표’를 만들어 주민센터에 제출했다. 장애인들의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가상의 이미지. 장애인들이 실제 제출한 자가진단표와 관련 없다.
장애인들은 정보공개청구로 받은 종합조사 결과서에 자신이 다시 체크한 ‘자가진단표’를 만들어 주민센터에 제출했다. 장애인들의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가상의 이미지. 장애인들이 실제 제출한 자가진단표와 관련 없다.

- “내 종합조사 점수 내놔라” 정보공개청구 투쟁

장애인은 이번 재심사 투쟁에서 국민연금공단에 자신의 종합조사 점수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그간 공단은 장애인에게 점수를 알려주지 않았다. 장애인은 이유도 모른 채 ‘월 n시간’이라는 결과만 받아봐야 했다. 이에 장애인 당사자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승소하면서 자신의 종합조사 점수를 열람할 권리가 있다는 게 확인됐다. 그런데 이것도 정보공개청구를 해야만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다.

장애인들은 정보공개청구로 확인한 점수표를 토대로 장애인 당사자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항목을 다시 체크해 주민센터에 제출했다.

박김 대표는 “의사의 진단이 내 활동지원시간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내가 체크한 자가진단표, 그리고 내 장애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의견서로 활동지원서비스를 받고 싶다”며 “장애인은 기능에 제약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통해 생존권과 존엄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조인제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조인제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집도 절도 없이 탈시설해 쟁취한 활동지원서비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이어 부산에서 온 조인제 씨(75세)가 발언했다. 인제 씨는 활동지원서비스도, 지원주택도 없는 상황에서 자립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었고 가족과 지인은 결사반대했지만 20년 넘게 산 요양시설 밖으로 나가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인제 씨는 만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장기요양서비스 이용만 가능한데, 장기요양서비스의 경우 하루 최대 4시간만 이용할 수 있고 그것도 자택 내 요양에 한정된다. 외출이나 사회활동 등은 지원받을 수 없다.

인제 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시설에 갇혀 사는 동안 못 받은 활동지원서비스를 다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인제 씨는 승리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야간에는 활동지원사가 없어서 기저귀에 대소변이 있는 채로 밤을 보내야 한다.

인제 씨는 “활동지원시간이 부족해서 밤에 밖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고 대소변 처리도 혼자 감내해야 한다”며 “내가 필요한 만큼의 서비스를 달라. 밖에 나가고 싶고 내 멋대로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 지금은 함세상자립생활센터에서 지원을 조금 해줘가지고 그나마 괜찮다. 동지 여러분이 같이 투쟁해 달라”고 말했다.

투쟁을 외치는 사람들. 사진 하민지
투쟁을 외치는 사람들. 사진 하민지

- 복지부 답변 無… 장애인들, 집단적 단식투쟁 예고

장애인들은 변경·이의신청을 하는 개별적이고도 집단적인 투쟁을 지속할 예정이다. 투쟁에 참여한 이들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은 장애인 여러 명을 한꺼번에 재심사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장애인들은 이런 ‘무더기 심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최대한 개별적으로 심사하고, 심사 시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직접 전하기 위해 재심사 일정을 조정하는 등 재심사 과정 중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민연금공단 서울남부지역본부에서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장애계 대표단과 보건복지부는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에 관해 면담했다. 백인혁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는 18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장애계 요구안을 전달하고 국정기획위원회,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복지부 측에서는 특별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재심사 투쟁과 더불어 7월부터는 단식투쟁도 전개될 예정이다. 권달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집단적인 단식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재심사 투쟁처럼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존권 쟁취를 위해 생존을 내걸고 투쟁하는 장애인들이 오고 있다. 이 싸움은 2006년, 한강다리 위의 외침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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