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6월 17일, 자립생활을 꿈꾸던 시설 거주인 이훈형 님이 세상을 떠났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훈형 님의 지역사회를 향한 꿈과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왜 그가 오랫동안 시설을 벗어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더불어 지금도 시설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비마이너에 글을 보내왔다.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과 누림홈에서 32년간 살았던 이훈형 님이 지난 6월 17일,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각, 뇌병변 중복 중증장애였던 이훈형 님은 1994년 8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입소하여 오랫동안 시설에서 살았습니다. 요양원에서 이훈형 님과 알고 지내던 8명의 거주인들이 2009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 나와 결국 탈시설을 이뤄낼 동안에도 그는 시설에 있었습니다. 시설 내 오래된 장애인 학대, 수당 횡령 등으로 인해 시설 운영 주체가 석암재단에서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시설 이름이 향유의집으로 바뀔 때도 여전히 그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훈형 님도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는 시설 바깥에서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과거 요양원 시기에 자신을 괴롭혔던 시설 종사자의 행태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시설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던 동료들이 많아,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훈형 님이 탈시설을 꿈꾼 것은 단지 두려움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도 누구보다 높았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정착하고 싶어 했던 김포 양곡 주변에 무슨 병원이 있는지, 탈시설한 친구들이 어디어디 사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시설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이훈형 님의 탈시설도 곧 이뤄지나 싶었습니다. 그가 탈시설할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로니에 8인의 투쟁으로 인해 탈시설 장애인을 지원하는 정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시설 운영 주체가 탈시설을 옹호하는 재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향유의집이 2021년 폐쇄됐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밖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가족들이 탈시설을 반대했습니다. 그가 각별하게 여기는 가족들이 반대하니 이훈형 님도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안 만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훈형 님이 향유의집 폐쇄 후 누림홈으로 오게 되었기 때문에 저희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4년간 거주시설연계사업에 참여한 이훈형 님은 저희들과 상담을 진행했고, 김포, 서울, 인천 등지를 다니며 지역사회를 체험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지하철을 타고,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본인의 고민에 대해 상담을 하고, 산책을 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훈형 님과 함께 인천공항에 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외국에 사는 누나가 한국에 올 때 들를, 어쩌면 이훈형 님이 누나를 만나러 간다면 지나치게 된다는 점에서 이훈형 님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반대로 그는 누나가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동안 인천공항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인천공항에 갔을 때, 그는 비행기들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처음에는 오기가 두려웠는데 와서 경험해보니 너무 좋았다. 감사하다.”라며 눈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훈형 님이 저희 센터와 마을이신나는장애인야학을 찾아왔을 때도 기억났습니다. 야학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 ‘안동역에서’를 열창하셨습니다.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음에도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었습니다. 만나는 센터 활동가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누림홈 원장은 “훈형 씨는 저희가 하는 캠프는 안 가고 성동센터에서 하는 활동만 가려고 한다. 솔직히 많이 샘났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시설 운영주체가 바뀐 후 이훈형 님과 누림홈 종사자, 원장님의 관계는 바깥인 저희가 보기에도 원만하고 친밀해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저희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이훈형 님이 돌아가시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18일 김포 추모공원에서 추모식을 치렀습니다. 시설에서 관계맺었던 수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그곳에서 가족들을 잘 설득해서 어쩌면 김포 양촌읍에 세워질 ‘여기가’ 주택에 입주할 수도 있었다는 김정하 프리웰 이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모두가 안타까워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훈형 님이 시설에서 만 65세가 지나 활동지원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현실이나, 가족에 막혀 탈시설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강한 척하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농담을 즐기고, 누구보다 주변 사람들을 챙겼던 살뜰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물짓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로부터 2일 뒤인 20일, ‘여기가’ 주택 준공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장애인을 비롯해 누구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진 주택이었습니다. 어쩌면 이훈형 님이 자립해서 살게 될 주택이었을지도 모르는 곳입니다. 성동센터에서는 7월에 이훈형 님이 요양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탈시설 동료를 소개하고, 김포 지역의 장애인 자조모임 활동도 체험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못 이룬 꿈, 못 다한 일이 생각나곤 합니다.
비록 시설에서 오래 살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 삶을 꾸려가고자 했던 이훈형 님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못 다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탈시설, 자립생활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도 많이 응원하고 동참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