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부, 모든 1·2차병원 갈 수 있게 고시 개정
본인부담금 면제됐는데 며칠 뒤 “병원비 내라”
복지부가 개정한 고시, 현장서 무용지물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2022년 3월 10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자물쇠 씨가 ‘홈리스 차별하는 진료시설 지정제도 전면 폐지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
2022년 3월 10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자물쇠 씨가 ‘홈리스 차별하는 진료시설 지정제도 전면 폐지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가 1차 의료기관에서 병원비를 전액 부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홈리스행동은 보건복지부(아래 복지부) 기초의료보장과에 민원을 제기한 상태다.

거리홈리스 ㄱ 씨는 지난 7월 14일, 혈당수치를 확인하고 당뇨약을 처방받기 위해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ㄴ병원에 들렀다. ㄴ병원은 민간 1차 의료기관이다. ㄱ 씨는 혈당수치 정도만 확인하는 기본적인 급여항목 진료를 받았고,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이기 때문에 본인부담금을 전액 면제받는 상황이었다.

ㄴ병원 진료차트 시스템 화면에 “해당 병원이 노숙인 진료시설입니까?”라는 알림창이 떠 있다. 사진 홈리스행동
ㄴ병원 진료차트 시스템 화면에 “해당 병원이 노숙인 진료시설입니까?”라는 알림창이 떠 있다. 사진 홈리스행동

그런데 병원직원이 전자차트 시스템에 ㄱ 씨의 개인정보를 입력하자 “해당 병원이 노숙인 진료시설입니까?”라고 묻는 알림창이 나타났다.

하지만 ㄴ병원을 포함한 모든 1·2차 의료기관에는 이런 알림창이 뜰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복지부가 지난 3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등에 관한 고시’를 개정하면서,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는 요양병원을 제외한 모든 1·2차 의료기관에서 본인부담금을 전액 면제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복지부가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한 병원만 갈 수 있었고, 홈리스들은 차별이라고 지속해서 지적해 왔다.

당시 ㄱ 씨와 동행한 주장욱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병원직원에게 해당 고시를 설명했다. 병원직원이 ‘예’ 버튼을 누르자 ㄱ 씨가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인 게 확인됐다. 이에 ㄱ 씨는 당일 진료와 처방 모두 급여항목으로 처리돼 본인부담금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 4일 뒤인 7월 18일, ㄴ병원은 ㄱ 씨에게 ‘병원비를 내라’고 연락했다. ㄴ병원과 약국에 다시 방문해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진료비 전액이 ㄱ 씨가 부담해야 하는 비급여항목으로 처리돼 있었다.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병원은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의 진료비를 국가에 청구한다. 병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아래 심평원)에 청구서를 제출하면 심평원은 병원이 청구한 진료비를 심사 후 확정한다. 확정된 금액을 토대로 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진료비를 지급하는 구조다.  

그러나 ㄱ 씨가 받은 진료는 별안간 비급여항목으로 바뀌었다. 결국 ㄱ 씨는 진료비 19,500원, 약값 8,060원 등 총 27,560원을 지불해야 했다. 복지부가 개정한 고시는 현장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주 활동가는 “해당 병원이 노숙인 진료시설입니까?”라고 묻는 알림창에 ‘아니요’라고 누르면 어떻게 뜨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ㄱ 씨가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란 정보가 병원 시스템상 나타나지 않았다.

주 활동가는 12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ㄱ 씨의 경우 당시 건강보험도 없고,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따른 의료급여 수급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ㄱ 씨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제도는 노숙인 1종 의료급여가 유일했다”며 “그러나 개정된 고시가 작동하지 않아 ㄱ 씨는 어떤 제도도 적용되지 않는 진공상태에서 진료비 전액을 부담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복지부는 의료현장의 진료차트 시스템을 점검하고 ㄱ 씨가 겪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조치에 불과하단 지적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지부가 개정한 고시의 유효기간이 3년이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고시를 개정하면서 올해 3월 21일을 기준으로 매 3년이 되는 시점마다 고시 내용의 타당성을 검토하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즉, 현재는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가 모든 1·2차 의료기관에 갈 수 있지만 3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단 뜻이다.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병원 수가 전처럼 적어져서 수급자가 차별받는 상황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홈리스 당사자들은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수급자가 어느 병원에서든 진료받게 하라고 요구해 왔다.

주 활동가는 “복지부가 고시를 땜질하는 식의 조치를 하다 보니 현장에서 ㄱ 씨처럼 피해를 겪는 분들이 생긴다”며 “법의 힘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법이 바뀌면 그 아래 시스템도 일사불란하게 바뀔 수 있다. 단순히 고시를 개정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상 노숙인 진료시설을 설치·운영할 수 있다는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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