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 재생산권 종합토론’ 열어
![]() ▲10월 22일 이룸센터에서 개최된 '장애/여성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토론회' |
결혼, 임신, 출산, 양육. 이러한 경험은 여성의 성역할을 규정하는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성 안에서 ‘장애여성’은 이를 매우 다른 형태로 경험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라는 가족과 사회의 시선에 의해 장애여성 당사자의 재생산 선택권은 아직 우리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이처럼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할까? (사)장애여성공감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22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종합토론’을 열었다.
#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제한되는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
"활보 하는 분들이 정신적인 사랑만 하라고 말하는 것도 성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 같아요."(E, 46세, 뇌병변, 비혼)
"(시어머니가) 날마다 회사로 전화하고 폰으로 전화하고. 하루는 일하고 있는데 사무실로 전화해서 그러고. 제가 연락하면 나를 달랬다가, "아가 너희 둘이 힘들게 살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 아이 떼자." 그러다 또 한 번은 돌변하며 윽박을 지르는 거죠. 애기 아빠가 안 되겠어서 산부인과 가서 (임신 중절) 수술을 했어요." (O, 39, 지체, 혼인 중)
"제가 (비장애인) 아들 낳았잖아요. 엄청나게 좋아하죠. 경사난 거에요. 근데 권리가 없어요. 처음에는 다 해줬어요. 애기 낳고는. 아니야... 내 자존감이 없는 것 같고, 내 자신이 없는 것 같고. 내 새낀데 내 새끼 아닌 것 같고. 혼내면, 니네가 뭘 해줬냐고 혼내지 말라고." (M, 30, 뇌병변, 혼인 중)
위 발언들은 발제를 맡은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정책연구원이 장애여성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생산 권리가 침해받고 있는 현실의 예로 제시한 것들이다. 나 연구원은 장애여성이 2차 성징이 시작될 때부터 불임수술을 요구받거나, 결혼 이후 장애 유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열등한 구성원으로 낙인찍히고 낙태를 종용받는 현실, 양육 과정에서 장애 여성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등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다.
이어 나 연구원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이 제한되고 있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라며 재생산권 논의에서 관점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몇 가지 법률적 사례를 들어 여성의 재생산권이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제약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우선 1953년 제정된 형법에서 낙태를 처벌하는 규정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13년에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라는 이유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즉, 여성의 재생산 권리 행사는 ‘사익’, 태아의 생명권 보호는 ‘공익(=국익)’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는 '우생학적 사유'를 임신 중절 가능 사유로 들고 있다. 이 법은 ‘건강한 국민’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부적절한’ 국민을 걸러내려는 국가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표적인 제도이다. 결국, 장애여성은 ‘건강한 국민’ 생산이라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 재생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억압하는 국가 정책에 대항하여 여성계는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할까.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네트워크 팀장은 여성주의 운동이 비장애 여성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는 점을 반성하며 ‘재생산’ 개념이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포괄할 수 있도록 새로이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팀장은 “그동안 여성운동에서 재생산권은 임신과 출산 및 몸에 대한 결정권에 국한되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애초에 자기 삶의 조건상 선택권 자체를 가지기 어려운 여성들을 고려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재생산 정의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논의는 '좋은 삶', '건강한 몸', '정상성'에 대한 기준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네트워크 팀장(왼쪽), 문현아 건강과대안 연구위원(가운데), 김도현 한국장애학회 정책분과위원장(오른쪽) |
#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외연의 확장과 정치화
문현아 건강과 대안 연구위원은 발제자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비장애여성의 범주로 확대해 나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문 연구위원이 제시한 사례에 따르면, 싱가폴에서는 이주민 여성이 입국해서 가사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 동시에 6개월 마다 임신테스트를 하도록 강제한다. 만일 임신이 되면 강제추방 당한다. 다문화를 지향하는 싱가폴이라고 하지만, 이주민 여성과의 결혼이나 그 후손은 싱가폴 국민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문 연구위원은 “사회에서 존중받기 합당한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를 구분하는 틀을 해체하기 위해서 재생산권에 제약을 받는 집단 간의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며, 노숙인,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등의 문제도 함께 고민해 볼 것을 제안했다.
김도현 한국장애학회 정책분과위원장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장애여성 재생산권 논의들이 응고되어 정치화될 수 있도록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며, 앞서 나 팀장의 발표에서 지적한 대로 “장애·비장애 여성들에게 ‘건강한 임신과 출산’을 요구하는 국가의 규범성을 해체한 후 ‘새로운 재생산권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에 관한 주장이 사회에서 유의미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여성계와 장애계가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며 토론회를 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