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 테스트’ 만든 만화가 앨리슨 벡델 책 두 권
“신학이 밑바탕인 학교”라며 구매 거절한 나사렛대 도서관

나사렛대학교 도서관 전경. 웅장한 느낌의 건물 앞에 푸른 나무들이 있다. ⓒ나사렛대학교 도서관 페이스북
나사렛대학교 도서관 전경. 웅장한 느낌의 건물 앞에 푸른 나무들이 있다. ⓒ나사렛대학교 도서관 페이스북

기독교 학교인 나사렛대학교 도서관이 동성애를 다룬 책을 구매해 달라는 재학생의 요청을 거부했다. 학생은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올렸고 민원 내용은 현재 교육부로 이관된 상태다.

“욕설·동성애 내용 있어서” → “학술 가치 없어서”

나사렛대 재학생 ㄱ 씨는 지난 9월, 미국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작품 『펀 홈: 가족 희비극』과 『당신 엄마 맞아?: 웃기는 연극』 두 권을 구매해 달라고 학교 도서관에 요청했다.

이 책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취하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의 만화책이다. 전자에는 게이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후자에는 어머니와 레즈비언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펀 홈』은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가 ‘주목할 만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ㄱ 씨의 도서 신청 현황 화면. 도서관은 벡델의 책 두 권에 관해 '구매불가 (부적합자료-규격/형태)' 결정을 내렸다. 제보자 제공
ㄱ 씨의 도서 신청 현황 화면. 도서관은 벡델의 책 두 권에 관해 '구매불가 (부적합자료-규격/형태)' 결정을 내렸다. 제보자 제공

학교는 ㄱ 씨에게 “책의 규격과 형태가 부적합해 구매할 수 없다”고 알렸다. ㄱ 씨가 “도서관에 규격이 상당히 큰 대형 책도 있는데 벡델의 책이 왜 부적합한지 궁금하다”고 질문하자 도서관 측은 △노블(만화) 장르를 지양하는 편이어서 △책에 욕설이 있어서 △동성애 내용이 들어가 있어서 납품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도서 선정에 관해 “사회적 이슈나 상황에 따라 (담당자마다 책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ㄱ 씨는 즉각 항의했다. △그래픽 노블은 긴 호흡의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점 △욕설과 동성애 내용이 있다고 작품이 평가절하돼서는 안 된다는 점 △영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과 벡델의 대담 내용이 담긴 책이 이미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는 점을 들며 “지성의 산실로 있어야 하는 대학이 책의 주제를 검열하는 행위에 큰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서 선정 지침을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도서관은 ㄱ 씨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학교는 신학이 밑바탕인 학교라 동성애 내용이 담긴 책은 선정하기 어렵다”고 말한 후 이미 공개된 ‘도서관 규정’이 아니라 내부 업무에 따른 지침, 즉 나사렛대 재학생이 확인할 수 없는 비공개 지침을 ㄱ 씨에게 공유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사렛대 도서관이 ㄱ 씨에게 공유한 비공개 지침 중 8조에 따라 ㄱ 씨의 도서 구입 신청은 거절됐다. 제보자 제공
나사렛대 도서관이 ㄱ 씨에게 공유한 비공개 지침 중 8조에 따라 ㄱ 씨의 도서 구입 신청은 거절됐다. 제보자 제공

제8조(자료선정 제외기준)

자료선정 시 대학도서관 장서로서 부적합한 자료는 다음의 각호를 고려하여, 구입불가처리 할 수 있다.

1. 본 대학의 설립정신과 이념에 맞지 않는 자료

2. 대학의 교육 및 연구용으로 부적합하거나 도서관 장서로서의 가치가 없는 자료(개인 수험서, 무협지, 판타지소설, 인터넷소설, 만화, 웹툰, 외설물 등)

이 지침에 따르면 벡델의 책은 나사렛대의 설립 정신과 이념에 맞지 않고 교육·연구용으로 부적합하며 도서관 장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게 된다.

ㄱ 씨는 이 같은 지침에 반발하며 “우리 학교의 어떤 학생은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 ‘동성애 내용이 문제 된다’고 말씀 주신 부분은 성소수자 입장에서는 폭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차별에 관해 할 수 있는 선에서 목소리 낼 것”이라고 말했다.

나사렛대 도서관은 도서관 규정 14조에 따라 벡델의 책이 '학술 가치가 없어서' 구입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제보자 제공
나사렛대 도서관은 도서관 규정 14조에 따라 벡델의 책이 '학술 가치가 없어서' 구입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제보자 제공

ㄱ 씨가 두 달간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도서관이 지난 20일, ㄱ 씨에게 통보한 최종 사유는 ‘학술 가치가 없어서’다. 비공개 지침이 아니라 재학생 누구나 볼 수 있는 도서관 규정 14조 ‘자료수집의 원칙’을 들어 벡델의 책을 구매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도서관은 학생의 학습과 연구자의 연구에 필요한 책을 수집하는데 벡델의 책은 이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면 요리 가이드북도 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나사렛대 도서관의 원칙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나사렛대 도서관은 지난 13일, 블루스트리트 편집부에서 발간한 『삼시면끼 – 멈출 수 없는 젓가락 비행』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이 책은 냉면, 짜장면, 국수, 라면 등 전국의 면 요리 맛집을 골라 소개한 책이다. 더불어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그림책 『장갑』은 이달 18일에 구매했다. 만화 장르는 지양하고 학술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그림책과 면 요리 가이드북은 ‘신착 자료’로 도서관에 비치된 상태다.

또한 현재 도서관은 수많은 퀴어 소설을 소장하고 있다.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영화 『아가씨』의 원작 『핑거스미스』, 게이가 등장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동명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청소년 작가들이 동성애를 주제로 쓴 단편집 『앰 아이 블루?』도 소장돼 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욕설을 소설에 그대로 싣는 현진건 작가의 책은 65권이 검색된다. 그런데 벡델의 책만 거절됐다.

앨리슨 벡델 책의 표지 이미지. 왼쪽이 『펀 홈: 가족 희비극』, 오른쪽이 『당신 엄마 맞아?: 웃기는 연극』 이다. ⓒYES24
앨리슨 벡델 책의 표지 이미지. 왼쪽이 『펀 홈: 가족 희비극』, 오른쪽이 『당신 엄마 맞아?: 웃기는 연극』 이다. 

도서관 팀장 ㄴ 씨는 24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쓴 책, 학회지 등에 실리거나 학문적으로 논증이 됐으며 학자들이 연구한 책을 학술 가치가 있는 책이라 부르지 않나”라며 “그러면 기자님은 어떤 책을 학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면 요리 가이드북은 어떤 학술 가치가 있냐고 묻자 “다른 업무로 바빠 경황이 없기 때문에 즉문즉답은 곤란하다. 나는 그 정도 전문가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많은 퀴어 소설이 소장돼 있는데 담당자가 벡델의 책만 거른 이유에 관해 ㄴ 팀장은 “오늘 담당자가 휴가를 간 상태”라고 말했다. 담당자에 따라 도서 선정이 달라지는 것은 지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는 질문에는 “도서관 규정 14조에 따라 학생 중심의 맞춤형 학습자료를 지원한다”고 답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벡델은 영화에서 젠더 평등이 얼마나 실현됐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벡델 테스트’를 만든 사람이다. 이 지표는 평론의 영역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술 가치가 없다는 코멘트는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장 의원은 “학교는 학문을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공적 공간이다. 벡델의 책을 주된 교재 삼자는 요청도 아니고 도서관 내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로서 학생이 다양한 진리를 탐구하려고 요청한 것을 학술 가치가 없다는 자의적 이유로 거절한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이런 경우 학교 도서관이 부당한 차별 행위를 했다고 ㄱ 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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