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음성언어로만 주문해야 하는 드라이브 스루
인권위 진정했지만 “매장직원과 필담 나누면 된다”며 기각
청각·언어장애인 당사자 “필담은 ‘정당한 편의제공’ 될 수 없어”
장애계 “장애차별 조장한 인권위, 강력대응할 것”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스타벅스의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차별을 받았다는 청각·언어장애인 당사자의 진정을 기각했다. 이에 장애계는 기각 결정을 규탄하며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다.
대구15771330장애인차별상담전화네트워크(아래 차별상담네트워크)는 지난 4월, 인권위에 청각·언어장애인이 음성언어만 활용되는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를 차별 진정했다. 지난달 20일, 인권위는 진정을 기각한다고 밝혔다. 차별을 겪은 장애인 당사자와는 단 한 번도 소통하지 않은 채, 필담을 통해 음료를 주문하면 된다는 스타벅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진정을 기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위는 진정 통지문에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말하는 ‘정당한 편의’를 장애인이 요구하는 방식 그대로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면서도 “반드시 장애인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제공하여야 할 의무는 없다”며 “스타벅스가 부기보드(휴대용 전자노트 브랜드)를 이용한 필담으로 주문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는 이유로 별도의 구제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 늘어만 가는 드라이브 스루 매장… 언어장애인에겐 ‘그림의 떡’
차별상담네트워크는 9일 오전 10시 30분, 대구시 중구 인권위 대구인권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가 되레 장애인 차별을 인정했다고 규탄했다.
드라이브 스루는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음료나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뜻한다. 매장직원과 고객이 대면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주문한 식료품을 받아 빠르게 매장을 나올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꼽힌다.
드라이브 스루 매장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소비가 늘면서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7일 기준 드라이브 스루 매장은 2016년 356곳에서 지난해 662곳으로 86%가 급증했다.
하지만 청각·언어장애인에게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는 이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오직 음성언어로만 주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장애인 당사자인 하형석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직원은 “드라이브 스루 매장 입구 앞에는 직원과 통화할 수 있는 스피커와 마이크만 있을 뿐 언어장애인을 위한 어떤 편의시설도 없었다. 음성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동승자가 있어서 다행히 주문할 수 있었지만 나 혼자였으면 주차한 후 매장에 들어가서 주문해야 했을 것이다. 대면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드라이브 스루가 생긴 건데 장애인은 대면접촉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라고 토로했다.
- 청각장애인 당사자 “필담은 ‘정당한 편의제공’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권위의 결정처럼 매장직원과 청각·언어장애인 고객이 필담을 나누면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의 원활한 이용이 가능할까? 청각장애인 당사자인 정동환 수어통역사는 필담은 장애인 편의시설이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수어통역사는 “드라이브 스루는 고객에게 신속하고 정확하며 간편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비스다. 그런데 종이에 글을 써서 주문하면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스타벅스가 늘려가겠다는 부기보드도 마찬가지다. 이는 장애인에게만 오랜 주문과정을 요구하는 일이다. 또한 주문시간이 오래 걸려 민원이 발생할 경우 비난의 화살은 매장이 아닌 장애인 고객에게 돌아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정 수어통역사는 또한 “드라이브 스루 매장에 도착하면 매장직원은 듣지 못하는 나에게 음성언어로만 이야기한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손짓을 해도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 보면서 종이에 글씨를 써서 주문하고 커피를 받는데, 이게 진짜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의 목적이 맞는지 궁금하다”고 성토했다.
또한 수어를 이용하는 청각장애인에게 문자언어인 필담은 제대로 된 소통방식이 아니다.
김철환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 활동가는 9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수어를 중심으로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문자언어로 된 한국어는 외국어나 다름이 없다. 비장애인이 영어를 배우더라도 자기 언어로 완벽히 습득하기 쉽지 않듯, 수어 이용자에게 문자언어가 그렇다. 또한 수어와 한국어의 문장구조 자체가 다르다. 필담을 나눌 때 문장이 길어지면 수어 이용자는 해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인권위가 수어 이용자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정을 기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철환 활동가는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에 키오스크를 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키오스크는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는다. 매장마다 수어를 쓸 줄 아는 직원을 의무적으로 고용하거나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화상 콜센터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동환 수어통역사 또한 “글씨 써야 하는 보드판이 아니라 화상수어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실제로 스타벅스 직원이 청각장애인 고객과 수어로 소통해 주문을 받은 사례가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청각장애여성 레베카 킹은 2015년 11월, 드라이브 스루 매장에 도착해 화면을 향해 수어를 했다. 그러자 수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화상통화를 통해 곧바로 등장했다. 직원은 수어로 소통해 빠르게 주문을 받았다. 레베카 킹이 매장에 도착해 주문을 완료할 때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차별상담네트워크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차별시정기구인 인권위는 ‘어찌 됐든 이용할 수 있으면 차별이 아니다’라는 식의 결정을 내렸다. 모든 이의 인권을 지키고 존중해야 하는 인권위가 장애차별을 조장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조사과정 또한 일방적이었다. 인권위의 이번 결정에 강한 유감을 표하며 강력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