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말하는 노숙인복지법 제정 10년 ① 전도영

[편집자 주]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노숙인복지법)’ 제정 10년을 맞아, 노숙인복지법을 평가하는 토론회가 지난 5일 명동 가톨릭회관 3층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비마이너는 노숙인복지법 평가하는 데 있어 당사자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이날 발표된 홈리스 당사자의 증언을 동의받고 게재합니다. 

10살 때 대전역에 버려져 있는 저를 어느 시민이 경찰에 신고해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전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엄마, 여동생이 있었지만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고아원에는 저보다 나이 많은 형이나 동생들 150명이 함께 살았습니다. 한방에 다섯 명이 생활했고 원장님과 사모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고아원에서 저는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늘 혼자였습니다. 초등학교는 시설 안에 있어 괜찮았지만 멀리 있던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고아원 선생님이 저와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대천해수욕장을 갔습니다. 그때 저는 바다를 처음 봤습니다. 

민박집을 빌려서 고기도 구워 먹고, 물놀이도 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함께 간 친구들은 저처럼 혼자 있는 외로운 친구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담배 피는 애들하고는 어울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쁜 길로 빠질까 봐 걱정해주셨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혼자 점심을 먹었는데 이것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이 주위 친구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짝을 지어 주었던 기억도 납니다.

지난 7일 열린 토론회에서 전도영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빈곤사회연대 유튜브 캡처
지난 7일 열린 토론회에서 전도영 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빈곤사회연대 유튜브 캡처

고등학교 졸업 후 저는 고아원을 나와야 했습니다. 만 18세가 넘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여비에 쓰라고 12만 원을 주시며 저를 포함한 두세 명의 친구들을 태워 어느 길인가에 내려주고는 가셨습니다. 시설에서는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주소를 알려 주며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곧장 집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너무 낯설어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는 이틀 동안 대전에 있는 여인숙에서 보낸 후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셨습니다. 부모님은 아프셨고 매일 싸우셨습니다. 집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대를 갔고 제대 후 다시 집으로 왔지만 영세민으로 생활하시던 부모님 집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오게 됐습니다. 

처음 오는 서울역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노숙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면서 알게 된 형들을 따라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1일~3일 정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현장 정리를 주로 하며 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건설현장에서도 일하고 이삿짐센터 일도 하며 생활했습니다.

일을 했지만 집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부역 뒤편에 있는 여인숙에서 일세 3만 원을 내고 잠을 잤습니다. 그때 저의 하루 일당은 일비를 떼고 나면 7만 6000원이었습니다. 일 하는 날은 돈이 있어서 여인숙에서 잠을 잤고, 돈이 없으면 다시서기지원센터를 이용했지만, 그나마 한 달에 15일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일용직 일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숙과 노숙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겨울은 추위 때문에 노숙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다시서기지원센터에 잠을 자기 위해 갔는데 건강검진 받은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결핵이 발견되어 서북병원에서 6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게 되어 퇴원하니 다시서기에서 삼각지 인근의 고시원으로 2개월의 주거지원을 해줬습니다. 고시원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2개월의 주거지원이 끝날 무렵 자활을 하면서 생활해야 한다고 해서 용산자활에서 4년간 일했습니다. 자활을 하면서 알게 된 형이 쪽방을 알려 주었고 그 형이 살고 있는 동자동 쪽방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쪽방은 음식을 해 먹어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고시원과 달리 통금시간(오후 10시)도 없었고 관리자도 없기 때문에 자유로워서 좋았습니다. 자활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대기자가 많아 더 이상 연장해서 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일을 못 한다고 하니 동자동 주민 중 ‘빅이슈’ 판매하시던 분이 한번 해 보라고 해서 4년 동안 빅이슈 판매를 하게 됐습니다. 빅이슈 판매는 힘들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친한 ‘빅판(빅이슈 판매원)’ 5명이 모여 식사를 하며 함께하는 시간은 힘든 것도 잊게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빅이슈를 시작하면서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아현동 희망원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1년을 살았습니다. 이곳에 살 수 있는 기간은 1년으로 정해져 있어 빅이슈에서 소개한 목동의 고시원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고시원에서는 2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시원이 재개발된다고 하여 서울역 근처 고시원으로 이사하게 됐습니다. 

쪽방의 모습. 사진 홈리스행동
쪽방의 모습. 사진 홈리스행동

지난해 1월까지 빅이슈를 판매하며 고시원에서 살았지만, 빅이슈 판매가 잘되지 않아 그만두었고 구세군, 인정복지관에서 자활하며 생활했습니다. 그사이 저는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하게 되었고, 10월 15일이면 입주한 지 1년이 됩니다. 

고시원, 쪽방에서 살다 처음 생긴 집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입주한 첫날 밤에는 잠이 안 왔습니다. 이런 날이 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기분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한 후 집은 좋았지만 어려운 것이 많았습니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집에 들어가지 못해 3일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디 얘기해서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그리고 동자동과는 달리 지원되는 것이 없어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저는 끼니 해결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동자동을 매일 가는데 이웃들이 챙겨주시는 도시락이나 반찬으로 식사를 해결합니다. 

이사한 집은 좋지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입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3개월에 한 번 엘에이치(LH)공사에서 주거확인을 위해 나오는 사람뿐입니다. 새로운 이웃들을 사귀어야 하지만 저는 모르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힘듭니다.

저는 매일 동자동에 갑니다. 동자동까지 가는 시간은 1시간 10분이 걸립니다. 제가 동자동에 가는 이유는 무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지내던 분들을 도와 드릴 수 있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크고 작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쪽방을 벗어나기 위해 이사하면서 집이 좋아졌으니 새로운 곳에서 잘 적응하면서 정착할 수 있는 지원들이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 전도영 님의 구술을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가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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