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 이 글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결말과 인물 정보 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생산’이라는 소비 트렌드

현재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리즈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두고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고 있다. 수많은 해석과 비평들은 ‘미녀’(김주령) 역할이 성차별적인지 아닌지에 관한 이야기처럼 ‘오징어 게임’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부터, ‘대장 가면’인 ‘인호’(이병헌)가 과거 살았던 고시원에 놓여 있는 책이나 그림엽서들과 같은 ‘떡밥’을 찾아서 드라마에서 직접 설명하지 않는 부분들을 추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프론트맨’은 폐쇄자막에서 ‘대장’, 화면해설에서 ‘대장 가면’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런 비평의 생산과 논쟁 이전의 단계, 즉 누가 이런 비평에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별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접근성이겠지만,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최소한의 접근성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도 최근 넷플릭스에 업로드되는 여타의 한국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폐쇄자막(‘한국어[CC]’)과 화면해설(‘한국어 – 음성 설명’)을 탑재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도 작품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은 충분한가?

최근 사람들은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을 그저 보고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숨은 의미’를 찾는 데에서 큰 재미를 얻는 경향이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같은 영화 시리즈, 혹은 방탄소년단이나 에스파처럼 ‘세계관’을 활용하는 한국 아이돌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대표적 사례다. 사람들은 시각 매체에서 아주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단서들, 소위 ‘떡밥’을 찾고, 그 떡밥들을 연결하여 다음 내용을 유추하거나 비어 있는 디테일들을 스스로 채워나간다. 이처럼 최근 대중매체에서 시각예술의 감상은 소비보다도 생산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생산들은 모두 ‘비평’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에 적용된, 나아가 현재 넷플릭스에 업로드된 한국 작품 대부분에 적용된 수준의 접근성은 과연 비평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이를 알아보고자 나는 처음부터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을 켜고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각각이 작품의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따져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이 지침을 잘 지켜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는 지금의 접근성 지침 자체의 한계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001이라는 숫자가 적힌 탁한 녹색의 츄리닝을 입고 침대에 앉아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는 일남을 456이라는 숫자가 적힌 같은 옷을 입은 기훈이 바로 앞에서 바라본다. 화면 하단에는 [일남이 중얼거린다]라는 폐쇄자막이 있다. 넷플릭스 화면 캡쳐.
001이라는 숫자가 적힌 탁한 녹색의 츄리닝을 입고 침대에 앉아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는 일남을 456이라는 숫자가 적힌 같은 옷을 입은 기훈이 바로 앞에서 바라본다. 화면 하단에는 [일남이 중얼거린다]라는 폐쇄자막이 있다. 넷플릭스 화면 캡쳐.

- 폐쇄자막이라는 스포일러

우선,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이 흔히 지적하는 것처럼 폐쇄자막의 가장 큰 문제는 인물의 이름과 배경음악 묘사다. 영상에 음악을 삽입하는 것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극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함인데도, ‘의미심장한 음악’, ‘밝은 분위기의 음악’과 같은 자막이 오히려 집중을 깨버린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직 인물이 누구인지 영상과 음성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각 인물의 이름을 자막으로 미리 밝혀 버리는 등 자막이 나서서 스포일러를 자행하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심각한 극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밝은 분위기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때의 폐쇄자막들도 모두 위처럼 단순하게 처리되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인물의 이름이다. ‘일남’(오영수)의 이름은 총 9회 중 6회차에 가서야 밝혀지고, 그 전까지는 ‘할아버지’ 혹은 ‘영감님’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폐쇄자막을 켜면 ‘기훈’(이정재)이 그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던 1회차부터 그의 이름이 ‘일남’이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에서 이름은 꽤 중요한 장치였다. 이름이 소거된 채 번호를 부여받고 ‘참가자’로만 호명되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공간에서, 기훈과 함께한 그룹 안에서는 서로 자신의 이름을 나누며 신뢰를 쌓으려 한다. 그래서 일남이 게임에서 탈락하여 기훈과 헤어져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었다. 폐쇄자막이 있어도 이런 맥락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장면이 주는 감동 혹은 충격은 폐쇄자막의 스포일러로 인해 분명 반감되었다. 만약 그 전까지 ‘영감님’이라고 해두었다가 딱 그 장면에서 ‘일남’으로 바뀌었다면, 훨씬 작품의 연출과 의도에 부합하는 폐쇄자막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 화면해설의 성차별

물론 청각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도 비평에 중요하지만, 최근의 영상 매체들은 다양한 시각적 요소를 섬세하게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함의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화면해설의 적절성을 따지는 데에는 조금 더 제약조건이 많다. 우선 화면해설은 대사와 겹치지 않아야 하므로 대사들 사이의 빠듯한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림이나 사진처럼 한순간에 고정된 시각적 요소를 설명하는 대체텍스트와 달리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장면의 연쇄가 전달하는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섣불리 화면해설이 부족하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아쉬운 장면들이 있었다. 특히 미녀가 ‘덕수’(허성태)와 그 무리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과 덕수와 미녀가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그랬다. 이는 특히 표정과 같은 사소한 움직임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데, 미녀가 성희롱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을 쏘아보는 것 외에는, 그의 표정이 화면 전체에 가득 잡혔음에도, 미녀의 표정이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반면 미녀와 덕수의 화장실 장면에서는 미녀의 땀과 고개의 위치, 머리카락과 미소, 몸의 움직임까지 음성으로 묘사된다. 혹자는 성희롱 직후에 이어진 미녀의 한숨과 욕설에서 그의 표정도 유추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화장실 장면도 마찬가지다. 상황 맥락을 고려할 때, 한숨이든 신음이든 특정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핵심은 비슷한 조건에서 다른 수준의 디테일이 묘사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화면해설이 대본집을 그대로 사용하여 만든 것이든, 촬영이 끝난 영상을 토대로 구성된 것이든, 감독 혹은 화면해설 작가는 성희롱 피해자가 사건 직후 애써 억지로 웃는지, 아니면 굳은 표정을 짓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 혹은 인물의 성격 묘사보다 화장실에서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데 더 공을 들인 것이다. 장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화면해설에는 성차별적인 시선이 깔려있다고 지적할 여지가 충분하다.

길고 부스스한 머리의 미녀는 덕수 패거리가 가는 방향을 눈으로 따라가며 다문 이빨이 살짝 드러날 만큼 입 주변을 찡그린다. "양아치 새끼"라는 대사가 나오고 있다. 넷플릭스 화면 캡쳐.
길고 부스스한 머리의 미녀는 덕수 패거리가 가는 방향을 눈으로 따라가며 다문 이빨이 살짝 드러날 만큼 입 주변을 찡그린다. "양아치 새끼"라는 대사가 나오고 있다. 넷플릭스 화면 캡쳐.

- 비평을 위한 디테일의 부재

표정 묘사에서의 부족함은 일남에게도 적용된다. 줄다리기 게임이 끝난 직후 일남과 그의 팀은 모두 지쳐서 쓰러져 있었는데, 일남만이 웃고 있었다. 분명 대사가 없어서 화면해설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으나, 일남의 표정은 따로 묘사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설정상 심각한 상황에 자주 웃고 있곤 하는데, 그걸 정확히 명시해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떡밥의 측면에서 큰 차이로 나타난다. 시각장애인에게 일남의 정체가 단지 ‘충격 반전’이 아니라 ‘떡밥 회수’일 수 있으려면 일남의 웃음이 단지 그의 뇌 손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대회의 주최자라는 신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유추도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극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에도 부족한 화면해설들이 있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상우’(박해수)에게 ‘알리’(아누팜 트리파티)는 자신의 옥수수를 꿋꿋이 건네고, 결국 옥수수를 받은 상우는 그것을 쪼개어 알리에게 명백히 ‘더 큰 쪽’을 준다. 하지만 화면해설은 단지 상우가 옥수수를 쪼개어 알리에게 주었다고만 말함으로써, 다음 게임에서 상우가 알리를 배신하여 죽게 만드는 장면의 비극성을 반감시킨다.

음성해설에 담기는 디테일은 선택적이었다. 기훈이 잠에서 깨서 이불을 걷는 장면은 설명해주면서, 정작 인물 이해에 더욱 중요한 정보는 누락시키는 화면해설은 깊이 있는 감상을 어렵게 한다. 혹은, 성희롱당한 직후 미녀의 표정에 대한 묘사가 부재하는 것과 달리, 기훈이 과거를 떠올릴 때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거나, 인호가 자신의 동생을 쏜 뒤의 지은 표정을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얼굴을 실룩인다’라고 묘사하는 일은 대본 혹은 화면해설을 작성한 사람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울긋불긋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테가 가는 안경을 쓴 크리스틴 선 킴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다. [music]이라는 짧은 폐쇄자막이 떠 있다. 유튜브 영상 “Artist Christine Sun Kim Rewrites Closed Captions | Pop-Up Magazine” 화면 캡쳐.
울긋불긋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테가 가는 안경을 쓴 크리스틴 선 킴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다. [music]이라는 짧은 폐쇄자막이 떠 있다. 유튜브 영상 “Artist Christine Sun Kim Rewrites Closed Captions | Pop-Up Magazine” 화면 캡쳐.

- 감각 번역, 비평가이자 생산자로서의 장애인을 위한 조건

이처럼, 분명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이 모두 탑재된 ‘오징어 게임’ 또한 감정선과 분위기를 감상하고 비평하기에는 그 접근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조건으로서의 접근성이 아니라 ‘감각 번역’이다. ‘감각 번역’은 폐쇄자막이나 화면해설을 기존의 시청각요소를 보완하는 장치가 아니라, 아예 대체해 버리는 장치로 이해한다. 나아가 작품의 의도와 의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하여 단지 건조하게 장면이나 음성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며 무엇을 어디까지 감추고 드러낼지 고민하는 과정이다.1)

1) 안희제, “종합에서 대체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 예술 경험의 장벽을 넘어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웹진 <arte 365>, 2021.8.2.

미국의 농인 예술가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은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음성을 묘사하는 폐쇄자막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는 음악이 시작할 때 그저 ‘음악’이나 기껏해야 ‘바이올린 소리’ 정도로 작성되는 지금의 자막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설명은 길수록 좋다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점점 더 길고 자세한 대안을 제시한다.2)

2) “Artist Christine Sun Kim Rewrites Closed Captions | Pop-Up Magazine”, 유튜브 채널 ‘Pop-Up Magazine’, 2020.10.13.

1단계: 애절한 바이올린 소리

2단계: 텅 빈 바에서 혼자 우는 것처럼 들리는 애절한 바이올린 소리

3단계: 1920년대 파리의 텅 빈 바에서 혼자 우는 것처럼 들리는 애절한 바이올린 소리. 당신은 아주 작지만 패셔너블한 모자를 쓰고 있고, 네 번째 마티니를 주문할 때 당신은 그 모자를 바텐더를 향해 기울인다. 음악이 멈춘다.

물론 시청자가 자막을 읽는 속도와 작품의 감상 등을 고려하여 조정해야겠지만, 그의 제안은 실제 현장에서 적용해볼 법하다. 감각 번역의 목적은 단지 어느 감각적 요소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것의 분위기를 다른 감각으로도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접근성’이 아니라 ‘감각 번역’으로 폐쇄자막과 화면해설에 접근하면 장애인에게 더욱 평등한 감상과 비평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으로 이루어진 장난감 집 같은 계단과 문들이 사방팔방에 이어져 있고, 어느 계단도 그 목적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소수의 관리자가 총을 들고 감시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이 계단을 일렬로 따라가고, 몇 참가자는 고개를 들어 크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중.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분홍색, 연두색, 하늘색으로 이루어진 장난감 집 같은 계단과 문들이 사방팔방에 이어져 있고, 어느 계단도 그 목적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소수의 관리자가 총을 들고 감시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이 계단을 일렬로 따라가고, 몇 참가자는 고개를 들어 크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중.

- 모두의, 모두에 의한, 모두를 위한 비평

이를 위해서는 단지 자막과 화면해설을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특히 시각적 떡밥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접근성을 고려하고 만들지 않는 한 화면해설로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드라마의 디테일을 분석하는 영상 중 하나는 이 대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구조와 색감을 중심적으로 비평하고 있었는데, 특히 화면해설에서 단지 ‘복잡한 미로’ 정도로 묘사된 장면을 그 영상은 ‘파스텔 톤이지만 그림자가 없고, 어느 계단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기 힘들어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3) 하지만 이만큼의 해석을 위한 떡밥을 화면해설로 넣기는 어렵다.

3) “[ENG] 오징어게임 속 돼지저금통의 비밀은? 유현준의 오징어 게임 리뷰ㅣsquid game”, 유튜브 채널 ‘셜록현준’, 2021.10.8.

시각적 떡밥을 해석하는 문화는 사람들이 TV나 영화관이 아닌 각자의 컴퓨터나 핸드폰을 통해 영상을 보면서 언제든 재생을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감상 기술과 플랫폼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영상물은 연속적이기에 어디서든 멈추고 떡밥을 탐색할 수 있지만, 같은 이유에서 모든 장면의 대체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구간 묘사’를 제안한다. 내용 흐름과 시각적 요소들의 배치를 고려하여 구간들을 나누고, 그 구간의 시각적 요소를 묘사하는 별도의 음성인 ‘구간 묘사’를 추가한 후, 시청자가 재생을 멈춘 장면이 속한 구간의 구간 묘사를 재생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구간 묘사가 재생될 때 여기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구간 묘사의 속도에 맞추어 대사와 음악 없이 틀어준다면, 이는 시각장애인만이 아니라 누구든 시각적 떡밥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

구간 묘사는 지금의 기술 수준으로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들과의 관계를 잘 조율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아직 익숙지 않은 것 같다. 온라인 플랫폼과 스마트 기기 등을 통해 예술을 즐기고 있는 지금 시대에 예술의 감상과 비평은 명백히 ‘기술적 활동’이고, 접근성은 기술적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이해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지점, 즉 ‘의무통과점’이나 다름없다.

감각 번역으로 접근성을 이해할 때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더 나은 비평의 기회를 얻게 된다는 사실은 접근성이 “기술적 대상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 모두의 문제”임을 드러낸다.4) 장애인이 애초에 배제되고, 간신히 게임에 참가하더라도 자신의 장애를 감춰야 하는 ‘오징어 게임’에 대한 해석과 비평의 장이 또 다른 ‘오징어 게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미디어 플랫폼과 그 안의 접근성 옵션, 그리고 여기에 연결된 수많은 사람의 경험을 통해 장애 중심적으로 우리 주변의 기술적 대상들과 비평의 조건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4) 안희제, 「접근성, 장애인에게 권력 부여하기」, 『과학잡지 에피』(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 이음, 2021, 178쪽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질병과 통증을 새로운 시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책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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